[기후위기시대] 113. 전자제품 수리권을 요구하는 사람들
지난 6월 13일 오전 11시쯤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수리점 ‘서강잡스’에서는 김학민(36) 대표와 30대 직원 한 명이 의견을 나누며 애플의 휴대전화 아이폰을 수리하고 있었다. 20평 규모의 아담한 매장에는 파스텔 색조의 벽면을 따라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 등 애플의 통신기기 수십 대가 출시연도순으로 전시돼 있었다. 김 대표가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한 기기들이라고 한다.
스물다섯 살에 탈북해 서울로 온 김 대표는 이미 열세 살부터 학교에 다니며 시계 수리공으로 일해, 수리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는다. 장난감과 전자제품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은 여덟 살부터 취미로 했다고 한다. 북한에선 전자제품이 귀해 수리 수요가 높지만, 부품 구하기가 쉽지 않아 중고 전자제품을 사서 빼 쓰기도 했다. 남한 드라마를 몰래 보며 키워 온 정보기술(IT) 강국에 대한 동경은 그의 탈북 동기가 됐다.
열세 살 북한 시계 수리공, ‘서강잡스’가 되다
그는 탈북 약 3년 후 수시전형으로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전자제품 제조회사의 연구원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진로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폰 액정이 깨져 애플 수리점에 갔더니 40만 원이나 내라고 한 것이다. 당시 한 장학재단에서 매달 40만 원가량을 받아 기숙사비 등 생활비로 썼던 그에겐 너무 큰 돈이었다. 그는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서 아이폰을 7만 원에 사, 자신의 아이폰 액정을 교체했다. 이를 보고 친구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수리를 맡기려는 학생들이 그의 기숙사 앞에 줄을 섰다. 그는 배터리 교체 5만 원, 액정 10만 원 등으로 저렴하게 해결해 주었다. 어느 순간 서강대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합친 서강잡스가 그의 별명이 됐다. 그는 2016년 아예 수리점 서강잡스를 창업했다.
김 대표는 전자제품 수리가 소비자에게 우선 경제적 이익을 주지만, 제품의 수명을 연장해 자원 낭비를 막고 환경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더욱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수리가 재활용보다 환경에 더 이롭다”며 “재활용은 제조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수리는 필요한 부품만 교체하면 그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계획적 진부화’로 낭비 조장하는 제조업체
반면 휴대전화 제조사들은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를 통해 제조단계부터 수리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계획적 진부화는 물건이 쉽게 고장 나도록 만들거나, 부품을 단종시켜 수리를 어렵게 하고, 유행에 뒤처진 것처럼 느끼도록 해 새 상품을 사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내장형 배터리라고도 불리는 일체형 배터리다. 2007년 출시된 애플의 아이폰과 2015년 출시된 삼성의 갤럭시 에스식스(S6) 이후 제품 등은 사용자가 혼자 배터리를 교체하기 어렵다. 그래서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소비자가 수리센터에 가야 하는데, 이것이 귀찮아 새 기기를 구매하는 사례가 많다.
애플은 또 지난 2013년부터 ‘부품 페어링’(part pairing)이라는 기술로 제조 시점과 다른 부품이 장착되면 알림이 뜨거나 오작동하도록 하는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소비자 항의와 여론의 비판이 거세자, 애플 본사는 지난 4월 ‘아이폰 15부터 중고 부품으로 아이폰을 수리해도 알림이 뜨지 않게 하여 환경에 기여하겠다’고 발표했다.
김 대표는 소비자의 수리권에 관한 정보와 요구가 담긴 ‘너드’(https://nerdsable.com) 사이트도 만들었다. 너드는 괴짜 과학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 사이트에는 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획적 진부화를 비판하는 페이지가 있다. 또 아이폰과 아이패드, 맥북 등을 수리할 수 있는 부품도 여기서 살 수 있다. 그는 이 사이트에서 수리 전문가를 소개하고, 수리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아이폰 수리하려다 환경운동가의 길로
통신기기를 수리하려다 환경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다. 지난 6월 17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 서울환경연합에서 만난 고은솔(36) 활동가가 대표적이다. 수리상점 ‘곰손’과 성동구 자원순환센터의 활동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수리하는 자들’의 운영자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 아트센터 대학에서 공부하던 2014년 아이폰 배터리를 교체하려다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렴한 방법을 찾다가 ‘아이픽스잇’이라는 웹사이트를 알게 됐고, 여기서 부품을 싸게 구입해 수리한 후 본격적으로 수리권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는 독일 물리학자 볼프강 엠 헤클의 ‘리페어 컬처’를 읽고 수리가 환경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지난해 6월부터는 서울환경연합에서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물건을 버리고 그것을 재활용하는 것보다, 하나의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것이 환경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전자제품은 플라스틱, 금속 등 여러 가지 재질의 자원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재활용의 한계가 크다”며 “전자제품을 수리해서 오래 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 활동가가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1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82%가 ‘수리 문화가 확산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고장 난 제품을 수리해서 사용한다’는 응답자는 19.8%에 불과했다. 특히 고장 난 제품을 스스로 수리하고 싶어도 수리 방법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부품이 없어서 수리할 수 없다는 응답(복수)이 각각 37.9%, 32.8%를 차지했다. 고 활동가는 수리에 관한 정보를 나누기 위해 지난 2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수리하는 자들’을 열었다.
‘곰손’도 직접 수리할 수 있는 작업장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 있는 수리상점 곰손은 일반인이 수리 방법을 배워 전자제품 등을 직접 고칠 수 있는 가게다. 고 활동가는 일요일마다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곰손에는 값이 싸기 때문에 수리할 곳을 찾기가 더욱 어려운 소형 전자제품 소유자들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찾아온다. 딸이 취직한 후 처음으로 자신에게 선물한 라디오가 고장 났는데, 꼭 고쳐서 쓰고 싶다고 온 사람도 있다. 고 활동가는 “값싼 제품을 수리하지 않고 버리게 되면 수리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는 “제조사가 수리 서비스를 독점한 상태로 수리 서비스를 폭넓게 제공하지 않거나 부품을 제공하지 않으면, 수리할 수 있는 기반이 줄어들어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제조사는 물건의 수명을 생각하지 않고 값싼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하며, 폐기물의 양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일 한델스블라트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1인당 전자폐기물 배출량은 약 16킬로그램(kg)으로, 세계 평균인 7.3kg의 2배가 넘는다. 유엔의 ‘글로벌 전자폐기물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세계적으로 전자폐기물이 5740만 톤(t) 발생했는데, 재활용률은 17.4%에 불과하다.
지난 6월 1일 곰손에서는 30대의 하아연 씨가 아이폰 액정과 배터리 교체 방법을 배워 현장에서 직접 수리하는 데 성공했다. 또 김지영(32) 씨는 고장 난 초소형 선풍기(손풍기)를 갖고 와 직접 고쳐 작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손풍기 수리에 든 비용은 배터리 가격 2천 원이 전부였다.
프랑스는 ‘수리 가능성 등급 표기’ 의무화
한국보다 빨리 수리권을 공론화한 프랑스는 2021년부터 전자제품에 ‘수리 가능성 등급 표기’를 의무화했다. 구매 단계부터 소비자가 제품 수리와 관련한 정보를 알기 쉽게 하자는 취지다.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세탁기, 스마트폰, 텔레비전, 노트북, 청소기 등 8종의 가전제품은 ‘수리 가능성’ 등급을 표기해야 하고, 이를 어긴 판매자는 벌금을 낸다.
국내에서는 내년 1월부터 순환경제사회전환촉진법 제20조(지속가능한 제품의 사용)에 따라 수리에 필요한 예비부품의 확보, 예비부품의 배송기한 등 제도가 정비될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산업통상자원부가 ‘케이(K)-에코디자인협의체’를 발족하고 자원효율등급제 시범사업을 추진하려던 계획은 연구개발(R&D)예산 삭감과 함께 무산됐다. 자원효율등급제란 프랑스의 수리등급제를 본떠 전자제품에 수리 가능성 등급을 표기하는 에코 디자인을 넣겠다는 구상이다.
유럽연합(EU)이 지난 4월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 디자인 규정’(ESPR)을 통과시키면서, 한국 기업은 뒤처진 환경 행보로 무역기술장벽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EU는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순환경제 패키지의 하나로 세탁기, 텔레비전, 차량 충전기 등에 에코디자인을 적용한다고 밝혔다. 에코디자인 규정은 생산, 유통, 판매자가 제품의 설계단계부터 준수해야 하는 환경 및 에너지 효율에 관한 요구사항을 포함한다. EU 내에서 유통되는 제품에 관해 내구성, 재활용·수리 가능성, 에너지 효율, 재활용원료 비중, 탄소발자국 등 지속가능성 기준을 강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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