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85. 대구섬유박물관 ‘최소한의 전시’
"입을 옷이 없어. 옷은 사도 사도 없어요. 진짜 희한한 일입니다요."
옷걸이에 옷이 잔뜩 걸려있고, 바닥에도 수북이 쌓였는데 여인은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 불평한다. 그녀는 옷을 마구 던지다 옷더미 아래 깔리더니, “차라리 다 같이 발가벗고 다니면 좋겠다”고 외친다. 대구시 동구 봉무동 시립 대구섬유박물관 ‘최소한의 전시’에서 영상으로 보여주는 연극 <옷옷옷옷옷>의 한 장면이다. 국내 유일의 종합섬유박물관인 대구섬유박물관에서 지난 5월 9일부터 열리고 있는 전시는 우리의 의생활이 기후위기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보여주고, 대안을 고민하게 한다.
옷장이 가득한데 왜 마땅한 옷이 없을까
옷더미 속에서도 입을 옷이 없다고 여기는 세태는 ‘패스트패션’과 관련이 있다. 패스트패션은 최신 유행을 즉각적으로 반영해서 빨리 만들고 싸게 파는 의류를 의미한다. 가격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섬유 등 소재는 대개 저렴한 것을 쓴다. 유니클로, 자라, 에이치앤엠, 스파오, 탑텐 등이 대표적인 패스트패션 브랜드다. 유행이 지난 옷은 쉽게 버리게 되기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키고 많은 탄소배출로 기후위기를 가속한다는 비판이 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한 유엔 연합’(UN Alliance for Sustainable Fashion)의 발표에 따르면, 의류산업의 탄소 배출량은 전 세계 배출량의 약 10%를 차지한다. 이는 모든 국제 항공과 해상 운송을 합한 것보다 큰 비중이다. 현재 국내에서 나오는 의류 폐기물은 하루 평균 약 300톤(t), 연간 8만t에 이른다.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 묻고 대안도 제시
최소한의 전시는 이처럼 옷을 쉽게 사고 버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소비를 할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1부 ‘옷장 채우기’에서는 일제강점기·한국전쟁 등을 거친 한국의 의생활 변천사를 다양한 복식과 옷장으로 보여준다. 어머니가 직접 만든 옷을 고쳐 입고 물려 입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 대가족의 옷은 궤짝 하나에 다 들어갈 만큼 단출했다. 반면 현재 한국 사회에는 ‘드레스룸’이 별도로 마련된 집도 많다. 전시장에서는 이런 의생활 변천사를 시대별 복식 70여 점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2부 ‘옷장 파헤치기’에서는 의류의 일생을 통해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옷이 생산, 유통, 소비, 폐기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자원 낭비와 탄소배출이 이뤄지는지 드러낸다. 전시장의 영상은 경기도 광주시의 헌 옷 선별처리장에서 매일매일 쏟아지는 의류를 처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컨베이어벨트로 이동하는 옷 중에는 비닐조차 벗기지 않은 신제품,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들도 있다. 여기서 분류된 옷들은 국내 구제(중고)시장에서 일부 팔리기도 하지만, 대부분 동남아시아로 실려 가 팔리거나 폐기된다.
3부 ‘옷장 비우기’에서는 지속 가능한 의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소개한다. 재사용, 재활용, 기증, 기부 등 대안도 함께 제시한다. 의류 폐기물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만들어진 옷을 오래 입는 것이다. 소방관들이 입었던 방화복을 가방으로 재활용하거나 할머니의 치마, 어머니의 코트, 아버지의 재킷을 수선해 물려 입음으로써 재사용한 사례들이 소개된다. 관람객은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각자 지속 가능한 의생활을 고민해 볼 수 있다. 한 해 옷을 몇 벌이나 사는지 등 의류 소비에 관한 자가 진단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대학에서 패션학을 공부한 이예진(25) 씨는 “옷을 구상하고 만들 생각만 했지, 패션산업 이면에 이런 큰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며 “앞으로는 새 옷을 사기보다 리폼(수선)해 입도록 해야겠다”고 말했다.
중고의류 편견 깨고 연대 다지는 ‘21% 파티’
지난 5월 20일 오후에는 전시장 로비에서 ‘21% 파티’가 열렸다. 각자 옷장에서 입지 않는 옷을 가져와 기부하거나 다른 옷과 교환하는 행사였다. 21%는 사놓고 입지 않는 옷이 평균적으로 21% 정도 된다는 조사 결과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사전에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신청한 참가자들은 집에서 입지 않는 옷을 가져왔다. 현장에서 참여한 이들은 소정의 기부금을 내고 다른 사람의 의류를 골랐다. 기부금은 ‘아름다운 가게’를 통해 지역 소외계층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행사를 주최한 비영리 스타트업 ‘다시입다연구소’의 정주연 대표는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한 설문 조사를 통해 국내에는 중고의류를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중고의류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21% 파티를 이번 전시에 초청한 대구섬유박물관 문재은(34) 학예사는 “의류 폐기물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옷을 오래 입는 것”이라며 “의류 재사용, 재활용 문화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행사에 참여한 전남대생 한기환(23) 씨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에스케이루키(SK LOOKIE)에서 활동하면서 폐의류로 인한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며 “21% 파티가 열린다는 소식에 광주에서 방문했다”고 말했다. 한 씨와 동료들은 각각 바지와 상의 등을 들고 와, 마음에 드는 바지나 가방 등으로 교환했다.
저물어 가던 섬유 도시 대구, ‘친환경’으로 활로 모색
국내 유일의 종합섬유박물관이 대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구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섬유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전쟁으로 국내 곳곳의 섬유생산 시설들이 많이 파괴됐지만, 분지였던 대구는 비교적 피해가 적어 전후 섬유생산을 주도했다. 제일모직과 한국나일론(코오롱의 전신) 공장이 설립되고, 섬유로 먹고사는 인구가 30~40만 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의 섬유 수입 규제 강화와 정부의 중화학공업 우선 육성정책 등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대구 섬유산업은 최근 ‘친환경’이라는 소재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대구·경북은 매년 대구국제섬유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친환경 섬유 생태계 조성에 힘쓰고 있다. 대구시는 2021년 7월 지역균형뉴딜 우수사업에 공모해 ‘페트병 재활용 그린 섬유 플랫폼 조성사업’을 따냈다. 이에 따라 한국섬유개발연구원(KTDI)의 친환경 섬유 개발 지원사업을 통해 44개 지역 기업을 지원했다.
지원 대상 기업 중 대구의 산업용 섬유 전문기업인 ‘비에스지’는 수수와 피마자기름을 이용해 친환경 다기능성 필름을 만들어 물티슈, 기저귀 같은 일회용 제품이나 아웃도어(야외용) 의류를 생산한다. 또 ‘건백’은 폐페트병으로 저탄소 친환경 섬유를 생산해 티셔츠와 침구류를 제작한다. 건백이 매달 재활용하는 페트병은 5천만 개로, 30년생 소나무 220만 그루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둔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한편 오는 10월 1일까지 이어지는 최소한의 옷장 전시는 매주 월요일과 추석 당일을 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공개된다. 관람료는 무료다.
단비뉴스 환경부, 유튜쁘랜딩팀 이혜민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