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83. 마르쉐 지구농부시장
지난달 27일 오전 10시쯤 서울 성동구 왕십리 서울숲 인근 복합문화공간 언더스탠드에비뉴.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26개 농부팀이 10여 개 대형 천막 아래 설치한 가판대가 붐비기 시작했다. 짙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40대 여성 등 남녀노소 100여 명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판대를 오가며 마늘종, 부추, 토마토 등 다양한 작물을 요리조리 살폈다. 서울 한복판에 왁자하게 펼쳐진 장터, 이곳은 ‘마르쉐’(marché@)의 지구농부시장이다.
프랑스어로 ‘장터, 시장’이라는 뜻의 마르쉐에 장소라는 의미의 at(@)을 붙인 마르쉐는 사단법인 농부시장마르쉐가 이끄는 조직으로, 2012년부터 서울 종로구 혜화동 등 5곳에서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고 있다. 경기도 양평, 전북 완주, 제주도 등에서 최소경운, 무비료, 무농약, 무제초 등 친환경 농사를 짓는 ‘지구농부’들이 이곳에서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소비자와 만난다. <단비뉴스>는 지난 4월 22일과 지난달 27일 두 차례 언더스탠드에비뉴에서 지구농부시장을 취재하고, 지난달 8일과 15일 농장 두 곳을 방문해 친환경 농사 이야기를 들었다.
농약과 비료 안 쓰고, 유전자조작 없는 농사
“농약을 치지 않아서, 바로 먹어도 괜찮아요.”
경기도 남양주에서 ‘농부가 된 사진가’ 농장을 운영하는 이정근(65) 씨는 4월 22일 열린 지구농부시장에서 나물·김치 재료로 쓰는 두메부추, 향신료로 쓰는 고수꽃, 약재 등으로 사용되는 골담초꽃 등을 판매했다. 그는 한 손님에게 골담초꽃을 뜯어 권하며 농약을 치지 않아 안전함을 강조했다. 국립수목원에서 식물사진 전문가로 일하다 정년퇴직 후 농사를 시작했다는 이 씨는 쉐프(요리사)들이 자신의 작물을 그 자리에서 뜯어 맛보는 것을 보고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안 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 씨의 가판대에서 요리에 쓸 고수꽃과 기성배추꽃을 산 신동준 씨는 “중간 업체를 거치는 일반 마켓과 달리 마르쉐는 농장에서 바로 따온 것을 바로 받을 수 있고 신선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요리사를 하다 지금은 연구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그는 “허브는 수입산이 많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경우 허브 농장이 서울권 외지에 있어 중간 업체를 끼지 않고는 공급이 어려운데, 이렇게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충남 논산에서 농장 ‘꽃비원’과 농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정광하(43) 씨는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유전자조작(GMO) 없이 재배했다는 밭딸기, 취나물, 아스파라거스 등을 들고나왔다. 그는 “생협조차도 생산 규모가 좀 커야 (거래를) 하는데 마르쉐는 저희 같은 소규모 농가들이 바로 판매를 할 수 있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비자를 직접 만나니까 소비자 취향을 알게 돼 농장 작물을 구성할 때 참고가 됐다”고 덧붙였다.
소비자도 장바구니, 다회용기, 텀블러 등 챙겨
지구농부시장에선 손님도 친환경이다. 대부분 텀블러와 장바구니, 개인 다회용기를 챙겨 온다. 판매자들은 포장용 비닐봉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다시살림부스’라는 재활용 포장재 공간에서 유리병, 아이스팩, 종이가방 등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이들 포장재는 다른 소비자가 기증한 것이다. 지난달 27일 지구농부시장의 다시살림부스에는 유리병 3개, 보냉가방 9개, 신문지 1킬로그램(kg), 아이스팩 22개, 종이가방 161개 등이 기증품으로 쌓여 있었다.
지난달 8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농장 ‘봉금의 뜰’에서 만난 지구농부 김현숙(62) 씨는 “자연에 가까운 농사를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시장에 유리그릇을 챙겨오는 등 일상에서 실천하는 소비자들을 보고 나의 생활이 친환경적인지 반성했다”고 말했다.
9년 차 농부인 그는 마리골드, 수레국화와 같은 꽃과 오레가노, 딜, 캣잎 같은 허브류 등 300여 가지 작물을 재배한다. 그는 “농사 첫해에 감자를 수확한 뒤 멀칭용 비닐을 걷으면서, 비닐 멀칭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멀칭은 땅의 온도를 유지하고 잡초가 자라나는 것과 땅이 가무는 것을 막기 위해 비닐 등으로 토양 표면을 덮는 것이다. 그는 멀칭 비닐을 걷어내는 광경을 ‘검은 파도’라고 표현했다.
비닐 대신 신문지, 볏짚으로 멀칭하기
“땅이 비닐을 토해낸다는 말이 딱 맞더라고요. 그때 아, 이건 안 되겠다.”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영농 폐비닐 발생량은 2021년 기준 연간 31만 9194톤(t)이다. 그중 48.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멀칭용 비닐이다. 전체 영농 폐비닐 중 37.5%인 2만 6403t이 수거되지 않는다. 이 폐비닐은 농촌 경작지 등에 무단으로 매립돼 토양오염을 일으키거나, 불법 소각돼 미세먼지를 발생시키고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차례 검은 파도를 보내고 난 뒤, 그는 신문지 멀칭을 시작했다. 요즘은 버섯을 재배할 때 쓰고 남은 폐 배지(배양토), 볏짚 등의 친환경 재료를 활용한다. 그래서 그의 농장에서는 검정 비닐이 아닌, 볏짚 위에서 초록빛 새싹이 돋아난다. 이 농장에는 화학비료도 없다. 대신 유용미생물(EM) 발효액, 은행잎 삶은 물, 왕겨 등 자연 유기물이 작물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밭 한편에는 음식물쓰레기와 키우다 남은 작물을 모아놓은 퇴비장이 있다. 모두 쓰레기와 화학비료 사용을 줄여 온실가스 감축에 도움이 된다.
김 씨는 친환경 농사를 위해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원래 호미와 괭이로 잡초를 매고 씨를 뿌리는 방식(최소경운)으로 농사를 짓다가, 올해는 풀을 매지 않는 자연농법(무경운)으로 옥수수를 심었다. 토양의 탄소저장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2월 마르쉐 주최로 열린 지구농부포럼에서 너멍굴농장 진남현 농부 등의 발표를 듣고 자연농법을 시도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탈석유 농법’ 앞장서는 너멍굴농장
지난달 15일 전라북도 완주에 있는 너멍굴농장을 찾았다. 진남현(34) 씨는 개구리참외, 완주 토종 마늘종, 보리벼, 생강, 음성재래종 고추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8년 차 농부다. 그는 일본의 자연농법과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서 제안한 전통농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는 자신의 농사를 무농약, 무비닐, 무석유, 무비료, 무경운의 ‘5무 농법’이라고 말했다.
진 씨는 2021년 저서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다>에서 ‘탈석유 농법’을 설명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전북 완주로 귀농했다. 농산물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해 농약, 비료 등을 뿌리지 않고 화석연료를 쓰는 기계 경운도 하지 않기로 했다. 또 거대 다국적 종자회사에서 파는 종자도 쓰지 않기로 했다. 너멍굴농장에서 재배하는 토종 작물은 종묘 회사가 파는 개량종자에 비해 생산량이 적고 병충해에 약한 단점이 있다. 반면 맛이 다양하고, 농부가 매년 자기 씨앗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그는 “기후위기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국적 종자회사) 구조에 길들여져 있으면 가격이 두 배가 올라도 그걸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한테 손을 안 벌려도 된다. 큰 장점이죠. 결국 남한테 의지한다는 건 엄청난 위험성을 편의성과 바꾸는 거잖아요.”
‘탈석유 농법’의 또 다른 특징은 땅을 갈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경운 농법은 토양의 탄소저장력을 높여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식물의 뿌리에 있는 ‘균근’이라는 미생물이 빨아들인 이산화탄소가 경운 과정에서 대기로 흩어지는 일을 막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최전선에 선 농부, 무심한 정부
농부는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변화를 체감하는 사람들이다. 인천 강화도에서 ‘연두농장’을 운영하는 윤현경(51) 씨는 지난 4월 22일 열린 지구농부시장에서 “기후위기가 자신의 일로 와 닿는 직업이 많지 않은데 농부는 그런 직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몇십 년간의 데이터를 뒤엎는 날씨를 최근에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봄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노지에 심은 작물이 다 죽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기온 상승으로 사과의 주 재배지가 대구에서 강원도로 바뀌고 있는 것도 그 예”라고 덧붙였다. 농촌진흥청이 지난해 발표한 ‘작물별 재배지 변동 예측지도’에 따르면 앞으로 국내에서 사과 재배지가 급격하게 줄어, 2070년대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농사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고, 추가적인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친환경 농사를 지으려는 지구농부들의 노력을 정부는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있다. 지구농사의 핵심으로 꼽히는 무경운 농법을 지원·장려하는 제도는 국내에 없다. 오히려 무경운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 공익직불금 지원도 받지 못한다. 공익직불제 준수사항 중 ‘농지의 형상 및 기능 유지’를 위반하는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공익직불금이란 식품안전, 환경보전, 농촌유지 등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인정해 농업인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난해 발표한 ‘기본형 공익직불사업 시행지침서’를 보면 “농작물을 재배하거나 휴경하는 경우는 연간 1회 이상 경운할 것”이라고 돼 있다.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 무경운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는 찾아보기 힘들고, 무경운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도 공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21년부터 ‘흙 살리기 운동’(Healthy Soils Program)을 통해, 경운을 줄이고 피복작물(탄소고정을 위해 심는 작물)을 재배하며 퇴비를 사용하는 농가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농림부가 2021년 제시한 ‘2050 농식품 탄소중립 추진전략’에는 ‘최소경운 또는 무경운 농법에 대한 인센티브’가 언급돼 있다. 그러나 장단기 로드맵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돼 있지 않다.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줄이는 농가를 지원하는 ‘친환경 농축산물 인증제’가 있으나 국내에서 친환경 농가는 감소하는 추세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2022년도 유기식품 등 인증통계’에 따르면 2022년 친환경 농가는 5만 722호로 2021년에 비해 8.37% 줄었다. 전체 농경지 중 한국의 유기농 경작지 비율은 2020년 기준 2.38%에 그친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유기농업 대상 보조금 지급, 거대 유통 매장 대상 유기농산물 공급 등을 통해 2021년 유기농지 비율이 25%를 넘었다.
단비뉴스 환경부, 소셜전략팀 김지영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역사의 시작입니다. 모든 이의 역사를 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