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64 케이트 레이워스 ‘도넛 경제학’

최근 수십 년 동안 인류는 엄청난 속도로 삶의 질을 개선했다. 1950년에는 신생아의 평균 기대 수명이 48세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은 71세에 이른다. 하루 소득 1.9달러(약 2000원) 이하로 살아가는 극빈층이 1990년 이후 절반 이상 줄었고, 20억 명 이상이 처음으로 안전한 식수와 화장실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이 모두에게 고루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케이트 레이워스(52) 교수는 <도넛경제학>에서 “현재 우리는 과거 왕들보다 부유한 삶을 살고 있지만, 전 세계 인구 아홉 명 중 한 명은 여전히 먹을 것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 세 명 중 한 명은 아직도 화장실이 없고, 열한 명 중 한 명은 안전한 식수원이 없는 환경에서 산다고 덧붙였다.

더 큰 문제는 인류가 생존의 터전인 지구 시스템을 전례 없이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석연료를 태우는 등의 인간 활동이 극적으로 늘어난 결과 지구의 평균 온도는 이미 산업화 이전 대비 1.1도 높아졌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력체(IPCC)의 과학자들은 ‘1.5도 상승’을 넘어설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온난화에 따른 각국의 자연 재난, 농지 황폐화, 어장 손상, 생물 다양성 감소 등의 문제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GDP 성장’이 목표인 경제 모델은 이미 실패

지구의 자원을 추출, 소비, 폐기하는 기존의 경제성장 모델을 비판하고 순환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 표지. 출처 학고재 출판사
지구의 자원을 추출, 소비, 폐기하는 기존의 경제성장 모델을 비판하고 순환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한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 표지. 출처 학고재 출판사

레이워스 교수는 다양한 통계를 나열하며 “오늘날까지 인류가 추구해온 경제 개발 경로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낡은 경제학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근본적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총생산(GDP)의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대신, 지구의 한계 안에서 균형을 이루며 모든 개개인이 인간적 권리를 보장받는 세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도넛’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경제 전략의 나침반으로 제시한다. 도넛은 저자가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에서 일하던 2011년 당시 지구 시스템 과학에서 영감을 얻어 착안한 시각적 개념이다. 도넛은 저자가 그린 2개의 동심원 사이 공간을 말한다. 도넛의 안쪽 원은 누구에게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삶의 필수 요소인 ‘사회적 기초’를 가리킨다. 충분한 식량, 깨끗한 물, 양질의 위생 시설, 에너지 접근권과 청결한 조리 시설, 교육과 의료 서비스 접근권, 제대로 된 주거, 최소 소득과 안정적인 일자리, 정보망과 사회적 지원망 등이다. 도넛의 바깥 원은 인류가 넘어가서는 안 될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가리킨다. 기후변화, 해양 산성화, 담수 고갈, 토지 개간, 생물 다양성 손실, 대기 오염 등 9가지가 포함된다.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도넛 다이어그램. 출처 옥스팜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도넛 다이어그램. 출처 옥스팜

두 원 사이의 영역인 도넛은 인류가 머물러야 할 최적의 지점으로,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공간’이다. 저자는 “21세기의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인류를 이 안전하고 정의로운 공간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넛 안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이 진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레이워스 교수는 유엔, 옥스팜 등에서 일한 뒤 현재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환경변화연구소와 도넛경제학행동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그가 제시한 도넛 경제학 개념은 유럽연합(EU), 로마 교황청 등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주요 도시의 탄소중립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유럽연합, 로마 교황청 등에서 ‘도넛’ 개념 큰 반향

도넛 경제학을 주제로 강연하는 케이트 레이워스 교수. 출처 TED
도넛 경제학을 주제로 강연하는 케이트 레이워스 교수. 출처 TED

저자는 19세기 영국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도약 단계로 들어선 이래 각국이 ‘이익’과 ‘GDP 성장’에만 집착한 결과 소득과 부의 불평등, 기후변화, 삼림 파괴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관심의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1948년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집필한 <경제학> 교과서의 ‘경제 순환 모델 다이어그램’이 성장 중심 경제를 대변해 왔다며, 이의 대안으로 ‘묻어든 경제’(Embedded Economy)라는 새로운 다이어그램을 제시했다. 이 그림은 지구가 태양에서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명시하며, 경제는 에너지와 물질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의 경제 활동이 지구라는 ‘원천’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상식으로 재정립하자고 강조한다.

저자는 인류가 도넛 공간 안에서 함께 융성하려면 지구적, 국가적 차원의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병리학자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의 저서 <평등이 답이다>를 인용하며 “한 나라의 불평등이 심할수록 그 사회의 구조는 손상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미국, 영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고소득 국가를 연구한 결과 불평등이 심할수록 정신병, 약물 의존도, 수감자 수, 공동체 붕괴가 늘어나고 기대 수명, 여성 인권, 사회적 신뢰는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평등 정도가 심한 나라는 생태 파괴도 더 심하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하면 지위 경쟁에 불이 붙어 과시적 소비 풍조가 조장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 식민주의의 잔재와 제3세계에 관한 왜곡된 무역 규칙 등으로 세계의 불평등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따라서 지구 전체의 재분배 시스템을 다시 설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현할 방법으로는 다국적 기업들을 단일 통합 기업으로 분류해 탈세 구멍과 조세도피처를 막고, 세계의 공공 수입을 늘릴 것을 제안했다. 또 지구를 손상하는 산업에 세금을 매기는 방안 등도 제시했다.

지구적, 국가적 차원의 불평등 해소가 필수 조건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묻어든 경제’ 다이어그램. 출처 도넛경제학행동연구소
케이트 레이워스가 제시한 ‘묻어든 경제’ 다이어그램. 출처 도넛경제학행동연구소
폴 사뮤엘슨의 경제순환 모형 다이어그램. 출처 도넛경제학행동연구소
폴 사뮤엘슨의 경제순환 모형 다이어그램. 출처 도넛경제학행동연구소

레이워스 교수는 지난 200년 동안의 산업 활동이 ‘선형적 산업 시스템’에 기초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지구에서 자원을 뽑아내 제품을 만들어 팔고, 사용 후에는 곧장 버리는 산업 체계를 말한다. 이런 선형적 경제는 천연자원을 고갈시키고, 폐기물을 많이 발생시키며, 기후위기를 가속한다. 그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오염 총량제나 조세 부과 등으로 독일 등 여러 나라가 탄소 배출량 감축과 일자리 창출 등에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런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경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다. 순환 경제는 태양광, 풍력, 조력, 지열 등 재생 에너지로 작동하며, 유독성 화학 물질을 제거하고, 폐기물을 근본적으로 없애도록 설계됐다. 순환 경제 안에서 각종 물질은 쉽게 버려지지 않고 순환의 주기에 따라 무수히 재사용된다. 예를 들어 휴대 전화는 디자인 단계부터 쉽게 분해되고, 폐품 수거와 부품 재사용이 당연하도록 설계된다. 저자는 “이런 원리를 모든 산업으로 확장한다면 20세기에는 산업 폐기물이던 것이 21세기에는 소중한 원자재가 되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이를 위해 부유한 국가 시민이 ‘소비 중독’을 벗어나 사회 전체가 열망할 만한 다른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영국 신경제학재단이 소개한 ‘가족·친지 등 주변인과 관계 맺기’ ‘운동 등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기’ ‘세상이나 일상의 변화에 호기심 갖기’ ‘새로운 기술 배우기’ ‘주위 사람에게 베풀고 지역사회 참여하기’ 등이 대표적 활동이다. 저자는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해 보자”고 권한다.

[기후위기시대]

① 온실가스 주범 석탄발전소 ‘더 짓는 중’

② '기후우울' 떨치고 '어벤져스'로 나서다

③ 탄소세 부과로 ‘신호’ 줘야 기업 바뀐다

④ 노동·지역경제 배려 ‘정의로운 전환’을

⑤ "석탄발전소 짓는 한국, 리더 아닌 꼰대"

⑥ ‘그린워싱 대신 행동을’ 거센 녹색 함성

⑦ "SMR 등 원전은 기후위기 대안 못 돼"

⑧ “상용화 먼 핵융합, 탄소중립 도움 안 돼”

⑨ “기후위기 극복 의무를 헌법에 넣자”

⑩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 가망 없다

⑪ “파이로프로세싱은 과학 아닌 소설”

⑫ 기후재난으로 원전 위험성 더 커진다

⑬ ‘기후 일자리’ ‘탄소국민배당’ 추진을

⑭ 고기 즐기는 너, 기후변화 공범 아니니

⑮ 청소년은 ‘미래’ 아닌 기후재난 ‘당사자’

⑯ 기후 미술관, ‘제로 웨이스트’로 가다

⑰ 쓰레기 줍다 보니 삶이 바뀌더라

⑱ “한국 공적금융이 에너지 전환 걸림돌”

⑲ ‘ESG 경영’ 뒤로 ‘기후행동 봉쇄 소송’

⑳ ‘국민이 처한 위험’ 알리려 당근 쏟았다

㉑ 나는 오늘 옷을 샀다, 기후위기를 샀다

㉒ 시민이 일어나 정부·기업을 움직이자

㉓ 탄소 줄이는 갯벌 메워 공항을 짓다니

㉔ 공장식 축산 줄이고 채식 늘려야 생존

㉕ 경작과 에너지 생산을 ‘하이브리드’로

㉖ 이재명 ‘재생에너지’, 윤석열 ‘원전’ 강조

㉗ 이재명·윤석열도 ‘기후대선’ 동참해야

㉘ ‘할머니가 지킬게, 초록지구’ 119 출동

㉙ 기후변화만큼 핵발전도 위험하다

㉚ ‘주차장 태양광’ 시급한데 조례로 막아

㉛ 채식 급식 확대, 환경교육과 병행 필요

㉜ 지구는 우리가 지킨다, 연구의 힘으로

㉝ 낡은 단독주택이 제로에너지 건물로 깜짝 변신

㉞ 개발에 밀린 무허가 정착민의 ‘생존 연료’

㉟ 난청·진폐 앓아도 떠날 곳 없는 노동자들

㊱ 실종된 ‘기후정치’를 찾습니다

㊲ ‘막장’에서 땀 흘린 이들의 희망은 어디에

㊳ 물 부족은 아프리카에서 끝나지 않는다

㊴ 돌고 돌아 사람 몸속에 쌓이는 플라스틱

㊵ 바이오연료,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 될까

㊶ 왕우렁이가 돕는 쌀농사, 도시농부도 보람

㊷ 취약층 ‘쪄 죽는 사회’ 막으려면

㊸ 속 썩은 배추에 농부 마음도 썩어들어가고

㊹ 탄소흡수 ‘바다숲’ 228곳 조성 후 관리 미흡

㊺ 중·고교 5600여 곳에 환경담당 교사는 41명

㊻ ‘탈석탄법’으로 신규발전소 건설 중단 길 터야

㊼ 강력한 탈탄소 정책과 기후정의 함께 가야

㊽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역대 최대 인파

㊾ BTS RM의 그 가방, 폐시트와 빗물로 제작

㊿ 채취량 반으로 줄고 낙석에 생명의 위협도

51 ‘그린워싱’ 고발하다 법정에 선 활동가들

52 보틀클럽과 리필스테이션이 있는 마을 실험실

53 ‘블루카본’ 갯벌을 신공항으로 덮으려는 정치

54 애타는 기후 시민, 정부를 법정에 세웠다

55 기후행동 ‘목적의 정당성’ 인정한 판결에 환호

56 ‘단 한 명이라도…’ 매주 간절하게 올리는 기도

57 과학자들, '엉터리 근거로 오염수 투기 강행' 비판

58 농지에서는 농사를, 유휴부지에는 태양광을

59 호수 위에 뜬 그 꽃잎이 태양광발전소라니

60 우리 땅 농산물과 천연재료를 고집하는 가게

61 과학을 부인한 그들,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다

62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봄’을 만드는 마음

63 환경을 살리는 선택이 일자리도 만드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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