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워터게이트: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1972년 6월 17일 토요일 아침 9시,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지닌 다섯 명의 남자가 불법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그들은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건물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를 노렸다. 현행범 중 한 명은 닉슨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수석 경호원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현행범은 전 CIA 직원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초년 기자 밥 우드워드와 그보다 몇 년 앞서 입사한 칼 번스타인은 단순 침입 사건이 아니라는 걸 직감하고 수사에 가까운 취재에 돌입했다.
우드워드는 예일 대학을 졸업한 해군 장교 출신이지만, 번스타인은 대학을 중퇴했다. 사회부에서 사건 취재를 담당하던 두 사람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파트너가 됐다. 당시 우드워드는 29살, 번스타인은 28살이었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재선 운동 과정에서 저지른 부정과 그 은폐 공작을 밝혀, 1973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974년 8월 닉슨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 최초로 사임했다.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다
두 기자가 워터게이트 빌딩의 침입자 중 한 명인 버나드 바커의 은행 계좌를 조사한 결과, 닉슨 재선 캠페인 조직(CREEP)의 비밀 자금과 연관된 수표가 발견됐다. 이는 백악관의 불법 정치 자금 조성 및 유용 의혹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두 기자는 닉슨 대통령 재선 위원회가 선거운동을 위해 비밀 자금을 동원했다는 사실도 발견했고, 재선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존 미첼이 법무장관 시절부터 비밀 자금을 직접 관리하고 지출을 승인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번스타인이 심야에 미첼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기사로 보도할 것임을 알리자, 미첼은 격렬하게 분노하며 협박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벤 브래들리 편집국장 등 워싱턴포스트 간부들은 미첼의 발언이 오히려 기사가 핵심을 찔렀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판단하고 보도를 강행했다.
결정적인 증언도 치열하게 교차 검증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닉슨 대통령은 1972년 11월 7일 대선에서 6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재선 성공 이후 의기양양해진 닉슨 정부는 워싱턴포스트가 소유하고 있는 방송사의 면허를 취소하겠다며 압박을 가했다. 방해 공작의 와중에도 우드워드는 백악관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익명의 취재원 '딥스로트‘(Deep Throat)를 만났다.
익명의 취재원은 두 기자가 파악한 정보를 확인 또는 부인하면서, 사건의 개요와 취재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줬다. 마지막 순간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백악관의 주도로 진행된 선거 공작이라는 점도 귀띔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2005년에야 그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FBI 부국장이었던 마크 벨트는 집권 세력의 압박으로 정당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 반발하여, 두 기자를 도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두 기자가 딥스로트에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다. 매우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 접촉했고, 언제나 교차 검증했다. 두 명 이상의 취재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 한 신문에 특정 혐의를 싣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으면 기사 게재를 연기하거나, 인쇄 직전에라도 기사를 뺄 마음으로 임했다. 기자들의 탐사보도를 끝까지 독려한 편집 간부들과 정치적 외압에도 굴하지 않은 경영진의 역할도 컸다.
살아있는 권력을 감시한 상징적인 보도
기자들의 끈질긴 보도는 사법부를 넘어 정치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상원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워터게이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상원이 주도한 청문회는 1973년 5월부터 시작했으며, 백악관 내부의 불법 공작과 은폐 시도를 공개적으로 다뤘다. 조사 과정에서 백악관에서 비밀리에 녹취된 테이프의 존재가 폭로됐다. 닉슨 대통령은 의회와 사법당국에 테이프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1973년 10월 닉슨은 특별검사에 대한 해임을 지시했고, 법무부 장관에 이어 차관까지 그 명령을 거부하며 사임했다.
정치권이 대혼란에 빠졌으나, 연방대법원은 비밀 녹음 테이프의 공개를 명령했다. 이 테이프의 녹취록을 통해, 닉슨 대통령이 직접 FBI 수사 방해를 모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1974년 7월,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고, 다음 달인 8월,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자진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 권력에 대한 감시에 실패할 경우,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사건 이후 미국은 ‘대통령 기록법’(Presidential Records Act)을 제정하여, 대통령이 생산한 모든 기록물을 국가 소유로 귀속하고, 퇴임 이후에도 그 기록을 보존하며 적절히 공개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 권력에 대한 사전, 그리고 사후 감시가 작동할 법적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와글와글 토론합시다
하미래 기자 딥스로트라는 익명의 취재원에게 우드워드가 기사 초고를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딥스로트는 취재 방향을 도와주는 중요한 취재원이었지만, 취재원과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취재원을 익명으로 인용한 것도 저널리즘 원칙에 어긋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장태린 기자 두 기자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면서 취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일대 출신) 우드워드는 문장력이 너무 떨어져서 비영어권 출신 이민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번스타인은 고졸이지만 문장력이 좋았다는 내용이 책에서 등장한다. 기자들이 함께 협업해서 좋은 결과물을 내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고민했다.
김현희 기자 우리나라에서 탐사보도 매체라고 할 만한 곳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시사IN> <뉴스타파> <한국일보>의 ‘액설런스랩’ 정도 떠오른다. 언론의 속보 경쟁 때문에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 매체가 없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했다.
김정현 기자 언론의 첫 번째 역할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다. 권력을 집요하게 추적한 과정의 시작은 사소한 좀도둑 사건이었다. 작은 사건에서 시작해 본질과 중심을 향한 취재로 넓히면서 대통령 사임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 전체가 인상적이었다.
콕 찍어 곱씹어 봅시다
안수찬 교수 저널리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보도다. ‘Investigative report’라는 말 자체가 워터게이트 보도에서 비롯됐다. 한국에선 이를 ‘탐사보도’라고 번역하여 쓰고 있지만, 그 영어 단어의 원래 뜻에 충실하자면 ‘수사보도’가 맞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는 주체는 원래 FBI였다. 그런데 조직적으로 그 임무를 회피했다. 그러니, 두 명의 기자가 직접 수사해서 권력을 고발한 것이다. 공권력도 없는 기자들이 권력 부정부패를 수사하기 위해 적용한 방법을 보자. 대단하고 복잡하지 않다. 직접 취재원을 만났다. 대신 많이 만났고, 계속 만났으며, 끈질기게 만났다. 그래서 그 증언을 교차 검증했다. 그 증언을 입증할 기록도 찾아냈다.
‘딥스로트’와 관련해 투명성 원칙이나 실명 보도의 원칙을 설명해야겠다. 당시 두 기자의 보도엔 익명 관계자가 등장하긴 하지만, 1970년대의 미국 언론계는 오늘날에 비해 실명 보도 원칙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당시 익명 보도는 2020년대 한국 언론의 익명 보도와는 다르다. 1970년대 워싱턴포스트의 두 기자는 끊임없이 교차 확인을 한 상태에서, 사실 입증에 대해 자신 있는 경우에만 익명 관계자를 인용했다. 고발과 비판의 수준이 높을수록 검증의 수준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류 좀도둑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대통령 하야 사태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년 이상, 미국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보도였다. 이를 위해 헌신한 기자가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말고 더 많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시니어 기자들이 공유했던 규범이 있었기에, 두 명의 젊은 기자들이 그 보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 사태의 후반부에 이르면, 정치인들도 초당파적 관점으로 이 사안을 다루게 된다.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을 조사하는 특별위원회 출범을 공화당 의원들이 찬성했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상은 상식과 합리성을 갖춘 엘리트들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었다.
단비뉴스 팩트체크부, 유튜쁘랜딩팀장 김예은입니다.
언어의 명료함에 안주하지 않고 현장에 서겠습니다. 현장의 고유한 문체로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