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77. 예술가의 기후행동 ① 일러스트레이터 윤정열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 산림 훼손, 공장식 축산, 원자력 폐기물, 그린뉴딜.... 윤정열(33) 작가의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사포(SAPO)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기후위기와 환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지만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그의 그림은 기후행동파 시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단비뉴스>는 지난달 20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윤 작가를 만났다.
풍자와 해학 가득한 기후위기 고발 만화
윤 작가는 어린 시절 전문 산악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산에 오르면서 자연을 좋아하게 됐지만, 환경에 관한 감수성은 부족했다고 한다. 그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은 2020년 우연히 기독교방송(CBS)의 뉴미디어 채널 <씨리얼>의 영상을 보게 되면서였다. 기후변화가 얼마나 엄중하고 시급한 문제인지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대학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그는 “그 영상을 보고 ‘기후위기가 이렇게 심각해?’하는 생각을 했고, 이를 주제로 작업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침 문화운동단체인 문화연대에서 일하던 지인이 합류할 것을 권했다. 윤 작가는 그렇게 문화연대에 들어가 기후대응팀 ‘스틸어라이브’(Still Alive)에서 콘텐츠 만드는 일을 맡았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연재를 시작한 만화가 ‘멸종예방접종’ 시리즈다. 멸종예방접종은 인류가 기후위기로 멸종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로 화석연료 남용 등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고, 기후대응에 미온적인 사회 기득권세력을 비판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회의감도 드러냈다.
윤 작가는 “환경 이야기를 하면서 흔히들 말하는 ‘텀블러를 사용하자’ 같은 이야기는 하기 싫었다”며 “더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의 주요한 책임은 선진국, 대기업, 부유층 등에 있지만 피해는 개발도상국, 노동자, 빈곤층 등이 떠안는 ‘기후불평등’의 문제도 주목했다. 그래서 ‘기후정의’를 주요한 소재로 선택했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막연하게 알고 있던 내용을 관련 기사와 자료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한 편씩 풀어나갔다. 2020년 8월부터 1년 남짓 동안 멸종예방접종 32회를 연재했다.
케이블카·원전·산불 등 동물의 관점에서 고발
지난해에는 환경단체 녹색연합이 발간하는 온라인 월간지 녹색희망에 ‘생키호테’ 시리즈를 세 차례 연재했다. 방랑기사 생키호테는 실험용 쥐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현장을 찾아다닌다. 치킨집에서 탈출한 암탉 ‘계르반테스’와 함께 산지 케이블카, 원자력발전, 산불 등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산양들은 서식지에 설치된 케이블카로 고통받고, 원전은 처리 방안이 없는 방사성 폐기물을 남기며, 기후위기로 더 자주 일어나는 산불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에게 큰 고통을 안긴다. 윤 작가의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생키호테 연재가 끝나자 ‘인간으로 인한 자연 파괴를 동물들의 시선에서 재치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며 윤 작가 인스타그램에 아쉽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윤 작가의 가장 최근 작품은 2021년 12월 인스타그램 연재를 시작한 ‘맥문동 우는 주먹’ 시리즈다. 맥문동 우는 주먹은 얼떨결에 생태감수성을 얻게 된 취업 장수생 맥문동이 일상의 곳곳에 있는 환경 파괴적 요소들을 감각하고 기후위기 문제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맥문동이라는 이름은 길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생명력 질긴 식물에서 빌려 왔다.
무거운 주제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예술
윤 작가는 문화연대에 합류한 뒤 환경단체인 청년기후긴급행동에도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주로 행사 등에서 활용할 그림이나 그래픽 등 시각 자료 제작을 맡았다. 지난해 9월에는 서울 시청역 인근에서 열린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가해 긴급한 대응을 함께 촉구했다.
윤 작가는 기후위기라는 무거운 주제도 예술을 통해 재미있게,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도 공유하고 싶어 기후위기를 주제로 함께 그림을 그리는 워크숍도 열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미술학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소규모 그림 수업을 이끈다. 지난해 7월에는 예술대학생네트워크와 ‘기후 만화 워크숍’을 열어 기후위기에 관한 참가자들의 경험과 느낌을 만화로 표현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해 8월에는 8명의 청년기후긴급행동 회원과 기후위기 시대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관찰해 빠르게 묘사하는 ‘크로키 워크숍’을 열었다. 윤 작가는 “언어가 아닌 만화와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방식으로 기후위기를 다뤄 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회원들은 ‘무언가를 관습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바라보고 직접 표현해 보려고 애쓰면서, 어렵지만 즐거웠다’ 등의 후기를 나눴다. 여기서 그린 회원들의 작품은 ‘924 행진’에 사용되기도 했다.
자전거 타고 채식하는 생활 속 실천도
윤 작가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채식을 하는 등 생활 속의 실천도 노력하고 있다. 그는 6년째 스포츠용 비엠엑스(BMX) 자전거를 타는데, 야외에서 타기 때문에 기후가 변하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자전거를 타던 태국 친구는 갑작스럽게, 짧게 내리는 비가 잦아지고 날씨가 후텁지근해지는 것이 태국 기후와 점점 비슷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며 “지난해엔 갑작스러운 폭우로 평소 BMX를 타던 길이 물에 잠기기도 해, 일상을 침해하는 기후위기의 영향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채식은 2년여 동안 비건(완전채식)으로 했다가 사람들과 모일 때 어려움이 있어 지금은 집에서만 채식을 한다. 평소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고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자신의 채식 경험담을 들려주던 윤 작가는 “언젠가는 ‘비건 BMX 모임’이 생기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어렵고 무겁다는 이유로 대중이 외면하는 기후위기 이야기를 좀 더 흥미롭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돼 주기를 기대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만화를 보고 기후위기와 관련한 여러 주제 중 하나에라도 관심을 두게 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소믈리에처럼 ‘기후위기 안에는 이런 맛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이라 같은 주제라도 각자 다르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예술가가 기후위기를 주제로 창작물을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알게 될 거예요. 예술가들은 보통 자기 자신에 관한 주제로 작업을 시작하고 점점 시선을 외부로 확장해 가는데, 그 시선 중에 기후위기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윤 작가는 현재 더 좋은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재정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기후위기를 주제로 작업하며 공부한 내용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왔는데, 단순히 정보 전달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작가로서 회의감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찾아보는 만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나의 개인적 경험이나 이야기가 담긴 만화를 그리기 위한 시간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단비뉴스 환경부, 시사현안팀 김은송입니다.
유연하고, 강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