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대] 117. ‘원전만 고품질 전력 생산하나’ 팩트체크
* 이 기사는 단비뉴스에서 우수 콘텐츠로 선정돼 2024년 11월 단비언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각국이 재생에너지 확충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원전산업 재건’을 외치며 원자력 중심의 전력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기업들은 알이백(RE100: 재생에너지 전기 100%)과 탄소국경조정(CBAM) 등 높아지는 교역 장벽에 애를 태우고 있다. <단비뉴스>는 ‘첨단산업을 위해 고품질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원전이 필수’라는 대통령의 주장이 사실인지(1편), 기후위기 시대에 원전은 과연 안정적인 전력공급원인지(2편), 재생에너지 확충의 걸림돌과 대안은 무엇인지(3편) 연속 보도한다. (편집자 주)
<기사 차례>
① “첨단산업 위해 원전 필수” 대통령 주장은 ‘거짓’
지난 5월 24일 오후 1시쯤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의 한국전력 경기본부 계통운영센터. 약 60평 크기의 센터 내부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가로 20미터(m)가량의 초대형 전광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면에는 파랑, 노랑, 빨강의 선과 점들이 빽빽했다. 수원, 성남, 평택 등 경기도 내 16개 시를 아우르는 경기 남부의 주요 발전소와 전력 수요처들을 연결한 전력계통도였다. 큰 글씨로 ‘삼성’ ‘SK 하이닉스’라고 표시된 곳은 주변에 선들이 더욱 빼곡했다. 반도체를 만드는 삼성전자 평택, 기흥, 화성 사업장과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이천 사업장 등으로 전력 공급이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기 남부는 전국에서 전력 부하(사용량)가 가장 많은 곳이다. <단비뉴스> 취재일을 기준으로 전국 부하 63.9기가와트(GW) 중 18.3%인 11.7GW가 이곳에서 쓰였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을 위한 전력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곳, 경기 남부다.
24시간 3교대로 전력망 관리하는 계통운영센터
계통운영센터의 직원 3명은 쉴 새 없이 전화를 걸었다. “OO라인 휴전 실시하겠습니다. 상황 확인 바랍니다.” 이들이 가장 자주 한 말이다. 이곳은 3명씩 8시간 3교대로 24시간 내내 돌아간다. 통화하는 곳은 경기 남부에 흩어진 105개 변전소다. 변전소는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수요처로 나눠 보내는 시설이다. 계통운영센터의 한 직원은 “전력 설비들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삽시간에 퍼진다”며 “문제가 생긴 곳을 빨리 끊어주고 전기가 우회하도록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전력 품질 관리’라고 할 수 있다. 전기사업법 18조는 전기품질과 관련해 ‘전압과 주파수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전문가들은 주파수 유지율, 전압 유지율, 정전시간을 전력 품질의 3대 지표로 꼽는다. 이 기준에서 한국은 전력 품질이 매우 우수한 나라다. 우선 세계에서 정전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세계은행(WB)이 추산한 주요 20개국(G20)의 2019년 평균 정전시간은 210분인데, 한국은 2.4분으로 일본(2.3분)과 더불어 압도적으로 짧았다. 미국은 77분, 프랑스는 21분, 독일은 15분이었다. 또 전력거래소와 한국전력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주파수 유지율은 100%였고, 2019년 기준 전압 유지율은 99.9%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 성균관대 반도체관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반도체 등 첨단산업을 위해 고품질 전력을 공급하는 원전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 연구자, 반도체학과 학생, 관련 기업 직원 등 1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첨단산업을 위해서는) 고품질의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고, 이제 원전은 필수”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어 “탈원전을 하게 되면 반도체뿐만 아니라 첨단산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전이 없으면 고품질 전력을 만들 수 없고,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 첨단산업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단비뉴스가 국내외 현장 취재와 전문가 인터뷰, 연구자료 분석을 통해 검증한 결과, 윤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발전소가 아니라 송배전이 전력 품질 결정
계통운영센터의 한 관계자는 전력망을 ‘물길’에 비유하며 원전, 재생에너지 등 발전원이 품질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전국 여러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전력망에서 다 섞인다”며 “어느 전기가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전영환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도 지난 4월 17일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전력 품질은 발전소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전력계통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달려 있다”며 “핵심은 주파수와 전압을 어떻게 유지하냐는 것인데, 그건 송배전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원전이 고품질 전력을 만든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한상 세명대 전기공학과 교수도 “전력 품질을 위해서는 공급과 수요를 맞추는 게 아주 중요하고 이게 전력거래소 업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력의)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을 때 주파수가 흔들리고 전력 품질이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전기는 쓰는 만큼 만들어내야 주파수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전력거래소는 시간별로 전력 수요량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발전소 운용 계획을 만든다. 전력거래소가 수급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 그리고 송배전 문제가 없도록 한국전력이 계통을 관리하는 것이 우수한 전력 품질의 비결이라는 뜻이다.
탈원전 완료한 독일은 첨단산업 강국
윤 대통령은 첨단산업을 위해 원전이 필수라고 말했지만, 원전 없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산업을 유지하는 나라가 있다. 독일이다. 에너지 연구기관인 엠버(Ember)의 지난 9일 발표를 보면 독일은 지난해 전력의 54%를 풍력, 태양광을 포함한 재생에너지로 만들었다. 나머지는 석탄 26.8%, 천연가스 15.1%, 원전 1.7% 등이다. 지난해 4월 이후엔 원전이 생산한 전기가 전혀 없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 지난해 4월 마지막 원전의 가동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탈원전을 결정하기 전인 2010년에는 독일 전력의 22%가 원전에서 생산됐다.
독일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다. 기계, 자동차 등 전통적인 제조업은 물론,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3월 ‘6대 첨단전략산업 분야’로 발표한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바이오, 미래 차, 로봇 등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1월 발간한 ‘6대 국가첨단전략산업 수출시장 점유율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를 보면 독일은 2022년 기준 6대 산업 수출시장 점유율이 8.3%로 세계 2위였다. 한국은 6.5%로 5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는 한국이 2위, 독일이 3위였는데 4년 만에 뒤집혔다. 독일은 특히 바이오, 미래 차, 로봇 분야에서 압도적 1등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에 독일의 원전 발전 비중은 11.8%에서 6%로 줄었다. ‘첨단산업을 위해 원전이 필수’라는 윤 대통령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사례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이 지난 4월 발표한 지식‧기술집약산업(KTI) 보고서는 독일이 2022년 세계 부가가치 순위에서 중국, 미국, 일본에 이어 4위라고 밝혔다. 한국은 5위였다. 지식‧기술집약산업은 바이오, 컴퓨터 등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말한다. 한편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 경제는 성장률이 후퇴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영국 일간지 <가디언> 등에 따르면 독일 바렌베르크은행 수석 경제학자 홀거 슈미딩 등 전문가들은 독일 경제가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최대 수출시장인 중국의 불황이 겹쳐 일시적인 약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독일은 원전을 줄이면서도 높은 전력 품질을 유지했다. 독일 전기기술자협회(VDE)의 자료를 보면 2022년 독일의 가구당 평균 정전시간은 10.6분이었다. 반면 원전 강국인 프랑스의 같은 해 평균 정전시간은 59.5분으로, 독일의 6배에 가까웠다. 2022년 프랑스의 원전 비중은 62.6%로 독일의 10배가량이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재생에너지연구소장인 모리츠 딜(53) 교수는 독일이 탈원전을 선택한 배경과 관련해 “탈원전이 경제적으로도 합당한 선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5일 프라이부르크대 연구실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한 딜 교수는 “(방사능물질 유출 사고 등) 안전성과 핵폐기물 문제 때문에 원전은 돈이 많이 든다”며 “재생에너지가 더 안전하면서도 저렴한 선택지”라고 밝혔다. 그는 또 원전이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로 가뭄과 폭염이 심해지면서, 냉각수 부족이나 수온 상승으로 원전 가동을 멈추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원자력기구(NEA) 등의 자료를 보면 실제로 프랑스는 냉각수로 쓰는 강물의 온도 상승으로 일부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는 일이 2003, 2006, 2019, 2022년 등 여러 차례 일어났다.
딜 교수는 이에 반해 재생에너지는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한다고 말했다. 폭염 같은 이상기후에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한 번 설치하면 별다른 유지보수 없이 오랜 기간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너지기상학 덕분에 언제 재생에너지 발전이 가능한지 예측할 수 있고, 태양광과 풍력의 보완 관계를 활용하면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연간 일조시간은 1200시간이지만, 독일은 780시간에 불과하다. 태양광 발전 조건이 한국보다 나쁜 독일이 태양광 강국이 된 비결은 정부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재생에너지 육성정책이라고 딜 교수는 말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은 2022년 기준 약 9%에 그쳐, OECD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한국인 여론은 ‘재생에너지 확대’ 지지
전력 품질의 관건인 수요·공급을 맞추는 일에는 나라마다 선택이 다르다. 전의찬 세종대 환경에너지공간융합학과 교수는 “에너지 믹스(조합)에는 정답이 없다”며 “원전을 얼마나 쓸지는 정치적 판단의 문제”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2050 탄소중립위원회 기후변화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에너지 믹스는 결국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이 탈원전을 할 수 있었던 건 국민이 원전에 부정적이었고, 정치 체제 덕분에 녹색당의 공간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떤 에너지 정책이든 정치권이 관심을 두고 국민의 합의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업체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7월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원전과 재생에너지’ 설문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민심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더 우호적이다. ‘원자력보다 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려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재생에너지 발전 확대에 속도를 내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이 약해질 것이다’에 각각 응답자의 76%와 79%가 동의했다. 또 에너지의 안전성과 관련해 ‘재생에너지가 안전하다’고 답한 사람은 86%인데 원자력은 26%에 그쳤다. 에너지의 효율성과 관련해서도 재생에너지는 69%, 원전은 62%로 재생에너지가 더 높게 나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며, 신규 원전 건설과 기존 원전 수명 연장 등을 통해 전력 생산량 중 원전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5월 발표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을 보면 원전 비중은 2038년까지 36%로, 2023년 30.7%에서 5.3%포인트 늘어난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26기이며, 건설 중인 원전은 4기인데, 2038년까지 대형 원전 3기가 새로 추가될 계획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도 같은 기간 33%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으나 이격거리(건축을 제한하는 거리) 등 각종 규제로 태양광과 풍력발전의 확충은 지지부진한 게 현실이다.
원전 중심의 전력 정책과 관련해 전영환 교수는 “원전론자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힘 있는 사람한테 가서 거짓말을 한다”며 “거짓말을 한 사람들은 나중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전기를 쓰면서 살아간다”며 “그러니 (전력 믹스를 할 때는) 전체의 이해관계를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월 18일 일부 언론이 대통령의 원전 발언을 비판한 것과 관련해 설명 자료를 내고,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의 경우 대규모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원전의 적극적인 역할이 중요하며, 간헐성과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만으로 공급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산자부는 이어 “2021년 대만에서 정전이 발생했을 당시 티에스엠시(TSMC)는 40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며 “아주 짧은 정전이라도 반도체 장비는 작동을 멈추게 되고, 그 즉시 반도체 공장 운영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게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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