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소리뉴스] ㉝ 버릴 곳 없는 핵폐기물

“이곳은 우리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묻은 곳입니다. 큰 고통을 치르면서 말이에요. 이곳은 당신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건들지 말아야 하는 곳이죠. 절대 가까이 오면 안돼요.”

느리고 낮은 목소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가 어두컴컴한 지하터널 안으로 천천히 들어갑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탁’ 하고 성냥불을 켠 남자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비밀을 털어놓듯 말합니다.

“여기는 당신들이 와서는 안 되는 곳, ‘온칼로’입니다. 은신처(hiding place)라는 뜻이죠.”

세계 최초의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온칼로’

2010년 마이클 매드슨 감독이 덴마크·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 합작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원한 봉인>의 첫 장면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핀란드 남서부 발트해역의 올킬루오토(Olkiluoto)섬에 건설되고 있는 핵폐기물 처분장 온칼로(Onkalo)를 다뤘습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폐기물 영구처분장 부지를 확보해 공사를 완료한 나라입니다. 지난 2004년 첫 삽을 떴습니다. 핀란드는 2018년부터 원전 3기에서 나오는 핵폐기물을 이곳 온칼로에 매장하고 있습니다. 지하 100층 규모의 시설에는 앞으로 100년간 9000톤(t) 가량의 사용후핵연료가 매립됩니다. 그리고 2120년에는 이 공간을 콘크리트 등으로 완전히 메운 뒤 폐쇄할 예정입니다. 이후 10만 년 동안 이곳은 인류로부터 완전히 격리됩니다.

다큐에 등장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은 사용후핵연료의 방사선량이 자연 상태로 줄어드는 데 필요한 ‘최소 10만년’간 어떻게 해야 미래 인류가 온칼로에 ‘침입’하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말한 ‘당신들’은 바로 미래의 인류입니다. 까마득한 훗날 인간이 지금과 같은 언어를 그대로 쓴다는 보장이 없고,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인류의 후손들이 사용후핵연료통을 ‘숨겨 놓은 보물’로 오해하고 열어, 치명적인 방사성물질이 대기 중에 퍼지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이들은 걱정합니다.

미래 인류에게 ‘손대지 마시오’를 알리는 방법은

다양한 아이디어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핵폐기물전문회사인 포시바(Posiva)의 엔지니어링담당 부사장 티모 아이카스는 “비석에 국제연합(UN)의 여러 공용어로 메시지를 적어 세워 놓는 건 어떠냐”는 감독의 질문에 “일정기간은 유효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장기적으로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당신들에게 유용한 물건은 없다, 위험한 장소이니 물러나라”하는 의미를 그림(일러스트)으로 표시하자는 아이디어도 제시했습니다. 또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공포나 절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회화를 활용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보도에 따르면 이런 문제 외에도 핀란드의 환경단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지하수의 영향으로 폐기물의 방사성물질이 바다로 새나가진 않을지’ ‘빙하기가 닥쳐서 암반이 갈라지진 않을지’ 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올킬루오토섬의 암반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이고 지하수도 적어 현재로선 핵폐기물처리장으로 적합하지만, 과연 10만 년 동안 이런 조건에 변화가 없을지 알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건설을 시작도 못한 다른 나라 입장에서 보면 핀란드의 이런 논의는 사치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큐 <영원한 봉인>은 ‘최소 10만 년의 관리’가 필요한 맹독성 위험물질을 현재의 인류가 만들어 낸다는 게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될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안면도·굴업도·부안서 방폐장 반대 투쟁

우리나라는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가 1978년 상업가동을 시작한 후, 1983년부터 핵폐기물 영구처분시설 부지 확보를 아홉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1990년에는 정부가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 방사성폐기물처리장(방폐장)을 몰래 건설하려다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백지화했습니다. 1994년엔 정부가 일방적으로 인천 굴업도를 방폐장 부지로 선정했으나 지질조사 과정에서 지진이 날 수 있는 활성단층이 발견돼 중단했습니다. 2004년 전북 부안에서도 방폐장 추진 시도가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이후 정부는 고준위폐기물(사용후핵연료)과 중저준위폐기물(작업복, 기계부품 등)을 분리해서 저장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주민 반발이 덜한 중저준위폐기장을 경주에 건설,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선을 내뿜는 사용후핵연료는 현재 각 원전 내부의 임시저장소에 보관 중입니다. 가동 중이거나 가동정지 상태(고리 1호기)인 25기 모두 원전 내에 수영장처럼 생긴 습식저장 시설을 만들어 사용후핵연료의 열을 식히고 있습니다. 매일 일정한 핵연료다발을 교체해 주어야 하는 중수로인 월성 1~4호기의 경우 습식저장 후 건식저장소에 옮겨 보관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발전소마다 한 개씩 있는 임시저장소는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2019년 월성원전을 시작으로 2024년 한빛과 고리, 2037년 한울, 2038년 신월성원전의 임시저장시설이 포화됩니다. 사실 월성원전의 경우 2017년이 포화 시점이었으나, 2017년 3월 사용후핵연로 임시저장시설이 추가로 건설되었습니다.

원전 부지 임시저장시설 속속 포화 진행

조밀저장이란 사용후핵연료의 간격을 좁혀 원래보다 많은 양을 넣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녹색연합 윤기돈 전 사무처장은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장을 하는 단계에서는 조밀하게 저장해도 안전하다고 볼 수 있으나, 사고가 나서 냉각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더 많은 양의 사용후핵연료가 같은 수조 안에 있는 만큼 더 많은 열이 발생하고, 더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며 방사능 누출량도 많아질 것입니다.”

한수원은 조밀저장으로도 2019년경 포화 예정이었던 월성원전의 임시저장능력을 확충하기 위해 2022년 3월 맥스터(조밀건식저장시설) 7기를 준공했습니다. 한수원 최득기 사용후핵연료사업팀장은 2017년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래는 21기를 지으려했는데, 새 정부(문재인) 들어와서 설계수명이 지난 원전을 계속 운전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어서 7기만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7기를 지어도 2027년이면 다시 포화되기 때문에 월성 4호기 설계수명인 2029년까지 나오는 연료를 저장하기 위해 2020년쯤 추가로 지을지, (4호기의) 가동을 중단할지 다시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상홍 경주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고준위핵폐기물은 저장고가 다 차면 설계수명과 상관없이 원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활성단층 조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2016년 경주에 지진까지 난 상황에서 임시저장시설을 추가 건설해 원전을 운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중간저장과 최종처분시설은 아직 논의도 못해

정부는 임시저장소에 있는 사용후핵연료를 중간저장시설을 거쳐 최종처분시설로 옮긴다는 기본 계획만 정해놓고 있습니다. 2016년 7월 박근혜 정부가 심의, 확정한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에 따르면 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시설을 동일 부지에 확보하는 방안이 추진됩니다. 중간저장은 영구처분시설이 건설될 때까지 지상에서 50~60년간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고, 영구처분은 10만년 이상 갈 수 있는 지하저장공간을 만들어 사용후핵연료를 인간의 생활권에서 완전히 격리하는 것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6년 ‘기본계획’을 발표하면서 사용후핵연료 최종처분시설을 건설하는 데는 부지선정단계부터 총 36년이 걸려, 2017년 부지 확보를 시작한다 해도 2053년에야 완료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핵폐기장을 짓고 장기간 관리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드는데, 한수원은 이를 감추고 원자력발전단가에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2017년 10월 24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한수원·한국원자력환경공단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홍의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준위폐기물 처리장의 건설과 운영에 64조 1301억 원이 소요될 전망이지만 한수원이 사용후핵연료 관리비로 적립한 금액은 4조 7384억 원에 불과합니다. 중간저장 비용으로 2035년까지 26조 3565억 원, 2053년까지 영구처분 비용으로 37조 7736억 원이 드는데, 한수원이 계상한 사용후핵연료 관리비에는 사고위험에 대비한 보험비만 반영돼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론화를 통해 사용후핵연료 정책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공론화를 다시 추진하는 이유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이뤄진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위원장 홍두승)의 활동이 민주적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추천위원들은 위원회 구성이 편향적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며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이와 함께 탈원전 정책으로 고준위폐기물 발생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기본계획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게 (당시) 정부 입장입니다. 백운규 당시 당시 산업부 장관도 2017년 10월 12일 경주 월성원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역 주민들에게 “사용후핵연료 재공론화 정책을 통해 주민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적합한 부지 찾을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사용후핵연료 처리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보면서도 과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에 관해 비관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을 지낸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는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층처분에 적합한 부지를 찾기 위해서는 전 국토를 조사해야 하는데, 아직 심지층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사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합한 땅이) 한반도에 존재할지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부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역주민들이 동의할 리가 없습니다.”

김 교수는 핵폐기물 처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풀 수 없는 문제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원자력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이들 역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자력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핵폐기물은 이 땅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경제적 부담을 줄 것이고, 위험 또한 떠안겨 줄 것입니다.”

양이원영 당시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국 처장은 2017년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은 암염이라는 소금덩어리 땅인데 그 단단한 땅에도 핵폐기물을 묻을 결정을 쉽게 못하고 건식저장하면서 더 좋은 기술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올 때까지 (영구처분장 건설은) 기다려야 합니다.”

탈핵에너지교수모임을 이끌었던 이원영 수원대학교 교수는 <단비뉴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업자원부가 핵발전소 추진과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동시에 다뤘다면 함부로 원전 건설을 추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따로 다루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입니다. 공론화에 들어가기 이전에 산업자원부가 주민들과 일반 국민에게 여러 대안을 내놓을 의무가 있습니다.”

출처: 마지막 비상구(제정임 엮음)

목소리 출연: 안재훈 이주연 이현이 조성우 기자

영상편집: 안재훈 이현이 기자

디지털 시대의 멀티미디어 실험에 앞장서는 <단비뉴스>가 ‘소리뉴스’를 시작합니다. 2020년 ‘올해의 환경책’으로 선정된 <마지막 비상구>를 환경부 기자들이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 책은 <단비뉴스>가 2017년 9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재한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 시리즈를 엮어낸 것입니다. 석탄·석유·원전 등 기후위기와 방사능재난을 부르는 ‘위험한 에너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할 길은 무엇인지 모색했습니다. 소리뉴스는 이 책 중 3부 ‘에너지 대전환은 가능하다’부터 시작합니다.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재난의 현장을 조명하고, 파국을 막을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입니다. 탈원전 논란과 에너지정책을 다룬 1, 2부는 그다음에 이어집니다. 이 기사들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올해의 좋은보도상’과 데이터저널리즘코리아의 ‘올해의 영데이터저널리스트상’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을 포함, 더 많은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작하는 단비 소리뉴스. 주 1회 <단비뉴스>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실립니다. (편집자)

① ‘기후붕괴 시대’ 위협받는 삶의 현장

② ‘세계 4대 기후 악당’ 한국이 받는 벌

③ ‘트럼프의 훼방’에서 파리협정 살리기

④ 달려가는 유럽, 끌려가는 한국

⑤ 화석연료 줄여도 경제는 쑥쑥 성장

⑥ ‘1달러 골리앗 크레인’ 탄식 뒤의 기적

⑦ 실업자 없는 에너지 자립촌 펠트하임

⑧ 재생에너지가 이끄는 유럽 최강 경제

⑨ 태양광·풍력으로 프랑스에 전기 수출

⑩ 석유파동 후 세계 1위 풍력기업 탄생

⑪ 거리엔 자전거 물결, 국민 건강은 '쑥쑥'

⑫ 태양열과 소금으로 밤에도 전기 생산

⑬ 금융위기에 흔들린 재생에너지 강국 스페인

⑭ ‘바람은 모두의 것’ 제주의 실험

⑮ ‘주민 배제’가 ‘결사반대’ 낳았다

⑯ 해상풍력 잠재력, ‘조선업 이상’

⑰ '원전 줄이기' 시동 건 햇빛발전협동조합

⑱ 의도적 허위정보가 반감 조장

⑲ 옥상·주차장·도로 등 태양광 설치할 곳 수두룩

⑳ 무심코 쓴 일회용품이 기후재난 재촉한다

㉑ 플라스틱 등 자원 순환에 인공지능도 출동

㉒ 내가 버린 플라스틱, 내 식탁으로 돌아온다

㉓ 태양광 전기, 지열 냉난방으로 에너지 자립한 집

㉔ ‘에너지 덜 쓰고 전기 만드는 건물’ 속속 의무화

㉕ 태양광발전, 빗물 순환으로 ‘친환경 건물 시대’

㉖ ‘주민 안전’과 ‘일자리’, ‘이주권’ 맞섰던 원전 논쟁

㉗ 체르노빌·후쿠시마도 ‘안전’ 자만하다 터졌다

㉘ 생존배낭 챙겨 두고 ‘쿵’ 소리에도 깜짝

‘큰 지진’ 가능한 연약지반에 줄줄이 들어선 원전

㉚ 대피계획 허술하고 훈련도 없다

㉛ 시험성적 위조한 불량부품은 다 교체됐을까

㉜ 사용후핵연료, 불안한 ‘임시저장’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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