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소리뉴스] ⑬ 스페인의 경험 (하)

이글거리는 태양과 풍성한 바람. 이런 천혜의 조건에 혁신적 기술까지 갖췄던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산업을 내리막길로 떠민 것은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였습니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전 세계로 번진 금융위기는 대서양 건너 스페인에서도 부동산 거품을 터뜨리며 금융과 실물경제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위기극복을 위한 정부의 긴축 정책은 태양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 지원을 대대적으로 축소했습니다.

2008년 경제위기, 태양광·풍력 산업 강타

2008년 당시 스페인을 이끌고 있던 사회당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는 2004년 집권 이후 재생에너지 산업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원자력발전의 단계적 폐지를 공약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대안으로 재생에너지를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주창해 온 미국 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을 경제자문으로 두기도 했던 그는 스페인을 유럽 재생에너지의 선두주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파테로 정부는 평균전력가격(AET)에 가중치를 더하는 방식으로 풍력과 태양광을 지원했는데, 태양에너지의 경우 가중치가 240~575%나 되었습니다. 당연히 관련 설비가 급증했습니다. 스페인의 태양에너지 설비용량은 2003년 27메가와트(MW)에서 2008년 약 3000MW로 늘었는데 이는 정부가 당초 목표로 했던 ‘2010년까지 400MW 건설'의 8배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정부가 보조금으로 지급해야 할 돈도 그만큼 급격히 늘었습니다.

금융위기로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쏟아지는 와중에서 재생에너지 보조금으로 많은 세금을 쓰기는 어려웠습니다. 사파테로 정부는 2008년 9월 26일 ‘왕실훈령(Royal Decree) 1578’을 통해 태양광 보조금의 한도(quota)를 정하고 지원 기간을 대폭 줄였습니다. 2010년에는 다시 기준가격을 낮추고 지원받을 수 있는 발전 시간을 제한했습니다. 또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발전원에 전력망 접속요금 명목으로 메가와트시(MWh) 당 0.5유로의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중도우파로 정권교체, 재생에너지 더 찬밥 신세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하고 국민의 원성이 커지자 사회당은 2011년 총선에서 중도우파 국민당(PP)에 정권을 빼앗깁니다. 국민당의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는 이른바 피그스(PIIGS), 즉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5개 나라를 강타한 유럽재정위기의 혼란 속에서 재생에너지 산업에 더욱 가혹한 정책을 단행합니다. 신규 재생에너지 사업에 대해서는 보조금 지원을 하지 않기로 2012년 1월 발표한 것입니다.

그해 6월 유럽연합(EU)에 1,000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130조 원의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에는 재정확보를 위해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한 모든 발전원에 5~7%의 전력세를 부과했습니다. 2013년 7월에는 재생에너지의 판매가격을 보장해 주던 발전차액지원제(FIT)를 폐지해 태양열·풍력산업에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악시오나(Acciona), 가메사(Gamesa), 아벵고아(Abengoa) 등 세계 정상에서 경쟁하던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기업들은 자국 내 경영환경이 나빠지면서 경쟁력을 잃고 뒷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2008년 13만 6,163명이던 신재생에너지 종사자는 2014년 7만 750명으로 반토막이 났습니다. 특히 태양에너지와 풍력 분야의 타격이 컸습니다.

라호이 정부는 2015년 한발 더 나아가 ‘태양세’(Sun Tax)를 도입했습니다. 태양에너지 자가발전에 전력망 사용 비용 분담을 이유로 세금을 매긴 것입니다. 이 세금은 기존 자가발전 설비에도 소급 적용됐습니다. 6개월 이내에 기존 설비에 대한 등록을 하지 않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최대 600만 유로, 우리 돈으로 약 80억 원의 벌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태양에너지를 지원하지 않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페널티’를 물린 셈입니다.

태양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카운티에서 2011년 도입돼 법적 분쟁을 일으킨 제도로, 다른 나라에서는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스페인 마드리드 류재원 무역관장에 따르면 태양광 발전사업자들이 반발하고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가 ‘재생에너지원에 세금을 부과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라호이 정부는 도입을 강행했습니다.

사회당 재집권, 재생에너지 부활 공약과 태양세 폐지

경제위기, 보조금 삭감, 태양세 부과로 이어진 긴 터널을 달려온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기업들에게 2018년 6월 국민당 라호이의 실각과 사회당 페드로 산체스의 집권은 ‘광명’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스페인 국민당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전·현직 핵심 당원 29명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불신임 절차에 몰렸습니다. 이어진 총선에서 사회당은 제3당인 포데모스와 연정으로 집권했습니다.

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사회당은 ‘오는 2030년까지 전체 발전량의 30%를 재생에너지원으로 한다’는 목표를 35%로 상향 조정하고 재생에너지 보조금 제도를 되살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논란이 됐던 태양세를 2018년 10월 폐지했습니다. 그러나 연정으로 집권한 사회당이 의회에선 여전히 소수정당이기 때문에 국민당 등의 반대를 뚫고 재생에너지 부흥을 이룰 수 있을지 아직은 단언하기 어려운 분위기입니다.

2017년 7월까지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에너지정책을 총괄했던 우태희 전 제2차관은 2018년 8월 2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두주자였던 스페인 재생에너지산업이 추락한 것은 지난 10년간 연립정부가 난립하면서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친 탓입니다. 에너지정책은 긴 안목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한국전력거래소 전력거래처 신시장개발팀 이재혁 차장은 2018년 11월 2일 <단비뉴스>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페인 재생에너지 산업은 정부지원 축소 및 폐지로 침체를 맞은 뒤 이를 해소하기 위한 계획들을 수립하는 상황입니다.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줍니다.”

출연: 이정민 이현이 강훈 기자
영상편집: 이정민 이현이 기자
출처: <마지막 비상구>(제정임 엮음)


디지털 시대의 멀티미디어 실험에 앞장서는 <단비뉴스>가 ‘소리뉴스’를 시작합니다. 2020년 ‘올해의 환경책’으로 선정된 <마지막 비상구>를 환경부 기자들이 목소리로 전합니다. 이 책은 <단비뉴스>가 2017년 9월부터 약 1년 반 동안 연재한 ‘에너지 대전환, 내일을 위한 선택’ 시리즈를 엮어낸 것입니다. 석탄·석유·원전 등 기후위기와 방사능재난을 부르는 ‘위험한 에너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깨끗한 에너지’로 전환할 길은 무엇인지 모색했습니다. 소리뉴스는 이 책 중 3부 ‘에너지 대전환은 가능하다’부터 시작합니다.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재난의 현장을 조명하고, 파국을 막을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입니다. 탈원전 논란과 에너지정책을 다룬 1, 2부는 그다음에 이어집니다. 이 기사들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올해의 좋은보도상’과 데이터저널리즘코리아의 ‘올해의 영데이터저널리스트상’을 받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을 포함, 더 많은 독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작하는 단비 소리뉴스. 주 1회 <단비뉴스>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실립니다. (편집자)

① ‘기후붕괴 시대’ 위협받는 삶의 현장

② ‘세계 4대 기후 악당’ 한국이 받는 벌

③ ‘트럼프의 훼방’에서 파리협정 살리기 

④ 달려가는 유럽, 끌려가는 한국

⑤ 화석연료 줄여도 경제는 쑥쑥 성장

⑥ ‘1달러 골리앗 크레인’ 탄식 뒤의 기적

⑦ 실업자 없는 에너지 자립촌 펠트하임

⑧ 재생에너지가 이끄는 유럽 최강 경제

⑨ 태양광·풍력으로 프랑스에 전기 수출

⑩ 석유파동 후 세계 1위 풍력기업 탄생

⑪ 거리엔 자전거 물결, 국민 건강은 '쑥쑥'

⑫ 태양열과 소금으로 밤에도 전기 생산

편집: 박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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