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파란 재킷 입은 아가씨, 119에 신고해주세요.” 긴급구조 매뉴얼에는 다수의 목격자가 있는 위급 상황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면 특정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해야 한다고 나온다. 단순히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직접적인 구조요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도움을 줘야 할 상황판단이 서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하겠지’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1964년 미국 뉴욕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동네 대로변에서 강도에게 난자당한 채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0~40분간 큰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는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로 시작한다. 문지기는 법으로 들어가겠다는 시골 남자를 가로막으며 “지금은 들어갈 수 없지만 나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믿은 남자는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만, 문지기는 문 앞에서 비켜주지 않는다. 죽어가는 남자에게 문지기가 이런 말을 남기며 소설은 끝난다. “이 문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당신만을 위한 것이니까. 이제 문을 닫겠소.” 법으로 향하는 문은 사람마다 하나씩 주어지는데 시골 남자는 그중 법의 자비가 통하지 않는 문을 할당받았던 것이다.
“어항 속에 갇힌 고기들보다 어쩌면 내가 좀 더 멍청할지 몰라. 네가 먹이처럼 던진 문자 몇 통과 너의 부재중 전화는 날 헷갈리게 하지.”빈지노의 <아쿠아맨> 가사처럼 ‘어장관리’라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 방식을 잘 보여준다. ‘어장관리’는 실제로 사귀지 않지만 마치 사귈 것처럼 친한 척하면서 자기 주변 이성들을 동시에 관리하는 행태를 뜻하는 유행어다. ‘썸’이라는 말은 사귀기 전에 서로 알아가는 시기를 뜻하고, ‘그린라이트’는 호감이 있는 정도를 뜻하는 속어다. 모두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예전의 사랑 방식과는 다르다. 요즘
대전시 유성구에 사는 이종근(48)씨는 지난 2월 12일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신장 기능검사를 위해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 입원한 어머니 윤병순(76)씨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입원하던 날 혼자 걸어 들어갔던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하시다니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윤씨는 걷지도 못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고열에 시달렸고 간간히 호흡곤란도 왔다. 병원에서는 컴퓨터단층촬영(CT)까지 했지만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혈액검사 후 손목 염증으로 호흡곤란뒤늦게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윤씨가 “손목에 염증이 생겼는데
지난해 7월 19일 서울 군자동 세종대 식품공학과 연구실에서 실험 중 황산이 폭발해 7명이 크고 작은 화상을 입었다. 이 사고 두 달 전에도 이 학교에서는 유독 가스인 삼브롬화붕소가 누출돼 학생과 교직원 2000여 명이 대피하는 일이 있었다. 대학의 실험실 안전관리가 너무 허술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같은 해 8월에는 부산 부경대 공대의 한 실험실에서 실험기기가 터지는 바람에 해당 장비를 설치하던 납품업체 직원 한 명이 숨지고 학생 2명이 일시 기절하기도 했다.새정치민주연합 최민희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9년부터
“앗!”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 연구원(29)이 눈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경남의 한 국립대학 생명과학대학원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이정우(29·가명·석사과정)씨는 지난 6월 일어났던 사고를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이씨의 동료가 암환자의 혈액에서 디엔에이(DNA)를 추출하던 중 혈액이 눈에 튄 것이다. 실험할 때는 보호안경을 써야 하는데 무더위로 눈가가 뿌옇게 되는 등 불편하다는 이유로 착용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 연구원은 눈의 통증을 호소하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별 후유증은 없었지만, 만일 간염이나
지난달 6일 서울의 한 사립대 공과대학 환경공학과 학부생 실험실. 평균적인 고등학교 화학실험실 보다 작은 60평방미터(㎡) 가량의 공간에 책상 4개, 의자 18개가 있어 한 눈에 비좁다는 느낌을 주었다. 책상들 위에는 황산 등이 든 시약병 69개가 뚜껑이 열리거나 먼지가 쌓인 채 놓여 있었다. 이 시약 중 상당수는 잘못 다룰 경우 인체에 해를 끼치거나 화재 등 사고를 일으킬 우려가 있어 캐비닛에 별도 보관해야 하지만, 외부인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오후 내내 개방된 실험실 책상에 방치돼 있는 상태였다.책상 위 유해 시약병 누가 가져
"저상버스 이용 잘 안 해요. (버스) 기다리는 시간이나 전동휠체어를 직접 끌고 가는 시간이나 거의 비슷해서 1시간 정도 거리는 웬만하면 그냥 휠체어 타고 다녀요."하반신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지체장애 1급의 이순주(49·여·충북 청주시 용암동)씨는 장애인이 타기 쉽게 만든 저상버스를 평소 잘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먼 거리는 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전용 콜택시(해피콜)를 불러서 타고, 왕복 2시간 거리 정도는 그냥 전동휠체어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전동휠체어는 최대 시속 12킬로미터(km)로, 배터리(전지)를 가득
“초등학교 때 암막상자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아맞히는 실험해본 적 있으시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흔들어 보거나 손을 상자에 넣어보기도 하고···.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던 고대인들에겐 하늘의 뜻이 그런 ‘암막상자’였죠. 그들은 천명을 알아내려고 거북이 배딱지로 점을 치기 시작합니다.” 철학자 이상수 강사는 중국 고대 은나라 이전에 전설로만 존재했던 ‘하’나라 시대를 역사로 바꾼 ‘갑골문’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했다. 갑골문은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넓적다리뼈에 새겨진 글자이다. 중국 고대인들은 나라 대사를 치르기 전,
재벌가 이복형제간의 재산 다툼이나 경영권 다툼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 중 하나다. 혈육지간인데도 재산과 회사지배권을 놓고 서로 적이 되어 죽일 듯 싸운다. 뺏고 뺏기는 암투 과정에서 양쪽 다 상처를 입고, 때로는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오늘의 남북관계 역시 혈육이지만 적처럼 맞서는 이복형제와 비슷하다. 같은 뿌리이면서 체제의 태생이 달랐고 이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남북의 현 집권층과 언론이 이런 대립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소통이 어려운 북한은
- 책 제목이 <황혼길 서러워라>이다. 어떤 내용인가?박정헌(이하 박): 우리사회 노인들이 처한 문제를 전체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 책을 쓰게 됐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이다. 그에 반해 노인복지는 꼴찌 수준이다. ‘노년층이 오늘날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됐을까‘ 하는 취지에서 취재를 시작했고, 황혼육아, 고령노동, 성문제, 고독사 등 노인문제 전반을 다루게 됐다. 덧붙여 대안까지 제시했다. - 가장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체념’이었다.장경혜(이하 장): 노인들의
1970년대 후반 영국은 만성적인 경기침체, 이익집단의 욕구분출 등으로 ‘불만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비대한 복지와 공공부문의 비효율 등 이른바 ‘영국병’이 문제라고 보고 ‘노조 분쇄’를 불사하며 공기업 민영화 등을 추진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의 강력한 추진력 아래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인 정부와 재계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파업 중인 1980년대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를 사랑하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리면서 이 ‘빛나는 승리’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저항, 연대, 좌절을
엄마는 자식 사랑이 끔찍한 요즘 엄마들 중 하나였다. 자식 사랑은 교육열로 이어져 안방을 내주더라도 내 공부방은 꼭 마련해주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다. 무엇보다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려주려 했다. 모든 것이 대화 주제였다.엄마와 나눈 대화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특히 ‘엄마의 사랑’ 이야기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엄마와 아빠의 연애담은 재미있었지만 아빠 아닌 엄마의 ‘첫사랑’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라는 존재가 엄마와 아빠 사이의 결실인데, 엄마의 다른 사랑 이야기는 왠지 내 존
“하루에 계단을 30번쯤 오르내리는데, 저녁때가 되면 다리가 떨려서 움직이기도 힘들어. 마대걸레를 지팡이 삼아 걸어야 해. (지하철)출발지에서는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으니까 전력낭비라고 엘리베이터 가동을 안 해 주는 거지. 화장실도 지하 1층에 있는 승객용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지하 4층에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니 웬만하면 참고 잘 안가는 편이야.”지난달 23일 오후 2시, 서울지하철 5호선 종착역 중 한 곳인 마천역에서 만난 청소노동자 최미순(61·여·가명)씨는 계단 중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대걸레
전국에서 가장 많은 열차와 가장 많은 승객이 모여드는 서울역. 승강장 16개와 선로 20개가 촘촘히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다른 역보다 청소노동자들의 일이 더 힘들고 근무환경도 더욱 열악하다.지난 10월 25일 오후 1시쯤 서울역의 초고속열차(KTX) 승강장. 여성 청소노동자 18명이 열차도착시간 5분전에 각자 맡은 객차 위치에서 대기했다. 정각에 기차가 들어오고 승객들이 우르르 내리자 노동자들은 재빨리 차에 올라 바닥청소, 좌석시트지 교체, 화장실 청소 등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해나갔다. 18량의 객차가 채 10분도 되지 않아 깨끗하
지난 10월 14일 오후 7시 25분, 충북 제천시 제천역의 승강장 부근 허름한 단층 건물에서 50~60대 남성 5명과 여성 1명이 걸어 나왔다. 형광연두색 모자에 목장갑을 낀 이들은 7시 39분에 도착하는 기차를 청소하기 위해 휴게실에서 대기 중이던 노동자들. 17년째 일하고 있다는 작업반장 이모(58)씨는 “(형광색) 이 모자가 우리에게는 작업모이자 안전모”라며 승강장으로 발을 옮겼다. 중간 정차 차량은 5분 만에 숨 가쁘게 청소 강원도 정선군 아우라지에서 온 열차는 예정된 시각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청소노동자들은 열차에서 사람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을 지원하기 위한 희망버스가 오는 30일 밀양을 찾기로 하면서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에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10월 2일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가 밀양 초고압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면서 밀양에서는 공사를 막으려는 주민과 공권력까지 동원해 공사를 강행하는 한전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끊이질 않고 있다.부안 방폐장 건설, 용산 재개발 사업, 강정해군기지 건설 사업 등에서 보듯 우리 사회는 대형 국책사업과 개발사업이 있을 때마다 둘로 갈라져 반목을 거듭해 왔고, 치유하기 힘든 후유증을 앓았다. 이번 밀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