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청초 기자

▲ 이청초 기자
신영복의 서화집 <처음처럼>에는 ‘지남철’(指南鐵·나침반)에 관한 글이 나온다. 나침반의 바늘은 불안한 듯 늘 떨고 있지만 그런 전율이야말로 나침반이 제 구실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반면 바늘 끝이 어느 한쪽에 고정돼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침반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변화된 위치에 맞춰 정확한 방향을 찾는 기능이 상실됐다면 더 이상 나침반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신영복이 말한 ‘고장 난 나침반’과 같다. 언제나 ‘북측의 사과와 핵포기가 먼저’라는 하나의 눈금에 바늘이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이라는 돌파구가 필요한 남북의 현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 등은 아랑곳없이 ‘북한이 무릎 꿇어야 대화한다’는 조건은 불변이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지난해 1월 ‘통일 대박’을 외치고, 지난해 3월 ‘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하고 올해 초 각 부처가 남북철도연결 등 거창한 교류협력 청사진을 내놨어도 남북관계는 제자리에서 맴맴 돌고 있을 뿐이다. 마주 앉기 조차 어려운데 남북철도를 어떻게 연결하고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남북이 평화적 협력을 통해 격차를 줄이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박 대통령의 말대로 그 결과는 ‘대박’이 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이를 명확한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 이어주는 길을 찾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개성공단 외의 모든 남북교류를 사실상 동결한 ‘5·24조치’를 해제하는 것은 대화 의지를 보여주는 현실적이고도 상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5.24조치는 북한경제에도 타격을 주었지만 대북경협에 나섰던 우리 기업들이 입고 있는 피해가 훨씬 더 크다. 또 입으로는 ‘대화와 협력’을 말하면서도 탈북자단체 등이 대북비방전단을 살포하도록 방치해 북측의 대남불신을 키우는 행태도 버려야 한다.

▲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신영복이 말한 ‘고장 난 나침반’과 같다. ⓒ pixabay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핵문제 해결’을 남북협력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북핵은 단순히 남북간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정책이 중대 변수로 작용하는 북미간 현안이며,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도 걸린 문제다. 그래서 북핵이 해결돼야 남북협력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전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변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긴 채 끌려 다니도록 만들 뿐이다. 핵 문제는 6자 회담 등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을 추구하면서, 이와 별도로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교류와 경제협력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다. 남북이 다양한 대화의 채널을 만들고 경제적 이익을 많이 공유할수록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가능성도 높아지고 우리의 외교적 입지도 강화될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구호에 박 대통령의 진심이 담겼다면 이제 고장 난 나침반을 과감히 버리고 최종목표까지 우리를 제대로 안내할 새 나침반을 마련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때마다 숨 가쁘게 흔들리는 바늘, 그 바늘이 안내해 주는 오솔길과 비탈길을 참을성 있게 걷다보면 통일로 가는 큰 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새로운 나침반은 지금 우리가 선 자리에서 분명 ‘조건 없는 대화 시작’의 이정표를 가리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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