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방관자의 심리학

▲ 이청초 기자

“앞에 파란 재킷 입은 아가씨, 119에 신고해주세요.” 긴급구조 매뉴얼에는 다수의 목격자가 있는 위급 상황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면 특정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해야 한다고 나온다. 단순히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직접적인 구조요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도움을 줘야 할 상황판단이 서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하겠지’라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1964년 미국 뉴욕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동네 대로변에서 강도에게 난자당한 채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0~40분간 큰 소리가 오갈 만큼 몸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당시 주민 중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없었다. 제노비스의 도움 요청에도 38명의 목격자는 그 현장을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제노비스는 주변의 시선 속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이런 방관자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 혹은 '방관자 효과'라고 한다. ⓒ EBS <다큐프라임-인간의 두 얼굴2> 화면 갈무리

어떤 일에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보기만 하는 ‘방관’은 소극적 행동일까? 그렇지 않다. 괜히 일에 끼어들었다가 자신이 피해를 입을 수 있고, 귀찮은 일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을 선택한 적극적 행동인 것이다. 방관자들의 눈은 피해자에겐 적극적인 ‘거절’이며 가해자에겐 적극적인 ‘동조’이기도 하다.

방관자들은 폭력이나 위험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방관은 폭력과 위험을 용인하는 일에 가깝다. ‘폭력’(위험)이라는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뀌는 건 폭력을 당하는 대상뿐이다. 나 자신도 폭력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의인(擬人)이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 하겠지’라며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가 결국 나를 향한 폭력의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타인의 일에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두렵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향한 폭력 앞에서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한다면 그만큼 서러운 일도 없지 않은가. 나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는 약자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감해야 공존의 가능성이 열린다. 나아가 ‘폭력’의 본질과도 마주할 수 있으며 해결책도 함께 모색할 수 있다. ‘공감’이란 작은 날개짓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거쳐 폭력과 위험을 몰아내는 큰 바람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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