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안개'

▲ 이청초 기자
엄마는 자식 사랑이 끔찍한 요즘 엄마들 중 하나였다. 자식 사랑은 교육열로 이어져 안방을 내주더라도 내 공부방은 꼭 마련해주었다.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다. 무엇보다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려주려 했다. 모든 것이 대화 주제였다.

엄마와 나눈 대화가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특히 ‘엄마의 사랑’ 이야기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엄마와 아빠의 연애담은 재미있었지만 아빠 아닌 엄마의 ‘첫사랑’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라는 존재가 엄마와 아빠 사이의 결실인데, 엄마의 다른 사랑 이야기는 왠지 내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추천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자신의 일인 양 아쉬워했다. 중년의 불륜을 왜 감동적인 사랑이라 포장하는지, 마음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엄마는 안개 낀 날을 좋아했고 꽃도 안개꽃을 좋아했다. ‘삶을 시간 밖에서 보면 안개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나지만 엄마는 가끔 우리가 함께한 시간 밖을 그리워했다. 머리칼을 적시며 다가오는 안개를 피하기는커녕 추억에 흠뻑 빠지고 싶어 하는 듯했다. 엄마가 지우려는 현실에 엄연히 내가 있는데, 나마저 안개 속에서 미아가 될 것 같아 섭섭함이 밀려왔다. 잘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축축함, 심지어 음습함을 느꼈다. 그렇게 엄마와 나 사이에 ‘안개’ 장막이 생겼다.

▲ 무료한 일상에 젖어있던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에게 나흘 간 사랑이 찾아오고 그녀는 그 속에서 인류애를 재발견한다. 영화 배경이 된 로즈만 다리. ⓒ 영화 <매디슨카운티의 다리> 화면 갈무리

엄마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에세이집을 건넸다. 읽어보긴 했지만 이방인을 감쌌던 뮌헨의 안개가 축축하게 느껴질 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무엇보다 어린 딸을 두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그녀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고 그가 적은 모든 내용이 비겁한 변명으로 들렸다. 딸의 처지인 나로서는 전혜린도, 그의 책을 건넨 엄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편으로 겁이 났다.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 던지고 고뇌의 바다로 뛰어든 전혜린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기 때문이다. 엄마 또한 안개 밖, 저 멀리 나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 생각은 엄마에게 한 발짝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같은 여자로서 엄마와 딸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시작된 것 같다. 흥미를 너머 엄마가 던지는 말 속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엄마에게 안개는 일종의 신호였다. 엄마는 현실을 부정한 게 아니라 ‘안개’ 위에 또 하나의 풍경을 그려보고 싶었던 듯하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볼 뿐이다’라고 했던 인상파 화가 드가처럼 엄마도 일종의 ‘착시현상’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첫사랑에 대한 향수, 새로운 사랑, 일탈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건데, 그것이 엄마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엄마가 결혼으로 과거와 단절하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살기를 바랐던 나의 이기주의가 둘 사이에 안개 같은 커튼을 드리운 건 아니었을까? 

안개 낀 날은 날씨가 맑다고 한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여자 대 여자’로 거듭난 것처럼 인간관계에 안개가 드리워진다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날은 분명 쾌청한 하루가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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