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청초 기자

▲ 이청초 기자

1970년대 후반 영국은 만성적인 경기침체, 이익집단의 욕구분출 등으로 ‘불만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비대한 복지와 공공부문의 비효율 등 이른바 ‘영국병’이 문제라고 보고 ‘노조 분쇄’를 불사하며 공기업 민영화 등을 추진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대처의 강력한 추진력 아래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인 정부와 재계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파업 중인 1980년대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를 사랑하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리면서 이 ‘빛나는 승리’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저항, 연대, 좌절을 함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장면은 아들의 발레면접에 따라 간 빌리의 아버지에게 왕립발레학교 교장이 “파업 잘 끝내시라”고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파업 노동자를 ‘사회위협세력’이 아니라 연대와 응원의 대상으로 보는 시민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면 지난달 철도노조 파업을 다룬 우리나라 공영방송 등 주류 언론에 비친 ‘시민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하나 같이 교통 불편을 호소하거나 경제적 파장을 걱정하는 부정적 시선이었다. 실제 거리에선 파업의 취지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주요 언론의 보도에선 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신문방송의 헤드라인에는 ‘국민의 발을 볼모로 한 파업’, ‘국가경제 망치는 파업’이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노동자들이 임금과 인사상의 불이익은 물론 사법처리 위협까지 무릅쓰고 파업을 할 때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을 텐데, ‘시민 불편’과 ‘업계 피해’만 강조한 기사에선 제대로 된 설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권, 단체행동권에 근거한 저항을 소수의 이기주의로 치부하면서 무조건 업무복귀를 종용하는 논조는 사측과 정부 입장의 ‘확성기’를 보는 듯 했다. 

단정적으로 ‘불법’을 강조한 보도도 문제였다. 노조는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사측은 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위법성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몫이었다. 동시에 언론은 노사가 각각 어떤 근거에서 상반된 주장을 하는지 정확하게 전달하고 검증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다수 언론은 ‘정부가 불법파업으로 규정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노조는 수서발 케이티엑스(KTX) 자회사 출범이 철도민영화의 시발점이며, 이후 본격적인 민영화를 통해 노동환경이 악화될 것이므로 이를 막는 것은 합법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또 민영화로 요금인상과 안전관리 소홀 등 이용자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므로 파업은 공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언론은 이번 파업을 ‘철도노조의 철밥통 지키기’라고 폄하하기 전에 이런 주장을 제대로 전달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해야 했다.

정부와 사측의 시각을 여과 없이 전하며 ‘불법’이라는 딱지를 서둘러 붙이고, 노조의 설명과 호소는 외면한 채 시민불편 만을 부각한 것은 우리 언론사들이 늘 강조하는 ‘공정한 보도’와 거리가 멀다. 언론의 본분은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사회적으로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며, 왜곡 없는 소통이야말로 구성원들이 갈등의 원인을 이해하고 합리적 해결책을 찾는 출발점이다. 우리 언론은 과연 이런 본분을 다하고 있는지, 철도파업 보도에 비친 자화상을 꼼꼼히 되짚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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