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가꾸는 정진야학] ① 김서진 제천시청 주무관

평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 곳곳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 ‘정진야학’의 수업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86년 이래 지금까지 1980여 명이 정진야학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860여 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지난 37년 동안 오직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학교를 운영해왔다. 공무원, 교수, 교사, 학생, 직장인, 주부, 외국인 등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웠다.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정진야학을 만들고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주)

 야학에서 교사의 참맛을 느끼다

제천 시민을 가르친 미국인 야학 교사

④ 학생들에게 청춘을 바친 평생 야학교사

⑤  한글을 모르니까 평생 막일만 한 거야


충북 제천시 남현동에는 주민자치센터가 있다. 지역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행정복지센터에서 동쪽으로 150m 떨어진 거리다. 재작년 리모델링을 마친 행정복지센터와 달리 주민자치센터는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치센터의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세 개의 방이 나란히 있다. 방문에는 각각 교무실, 고등부, 중등부라고 적혀있다. ‘정진공부방’이라는 팻말도 있다. 정진야학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는 작은 표식이다.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옛 동현동사무소) 2층에 정진야학의 교무실과 교실이 있다. 김은송 기자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옛 동현동사무소) 2층에 정진야학의 교무실과 교실이 있다. 김은송 기자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인 정진야학은 1986년 8월 개교했다. 그 시절, 방송통신대에 진학한 제천·단양 지역의 학생들이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방송이나 라디오를 들으며 원거리에서 공부했다. 그 가운데 서울 지역 학생들은 곳곳에 설치된 ‘방송통신대 학습관’에서 만나 함께 공부했다. 제천을 포함한 시‧군 지역에는 그런 공간이 없었다. 제천과 단양의 방송대 학생들은 공부할 곳을 물색하다, 이정일(85) 대명저축은행(당시 대명상호신용금고) 이사장을 찾아갔다.

이 이사장은 무상으로 공간을 마련해 줬다. 대신, 야학을 만들어 운영해달라고 학생들에게 제안했다. 학생들은 지역의 동문들에게 연락해 야학 교사를 모았다. 이윽고 제천 시내에 있는 당시 ‘대명상호신용금고’ 건물 지하에 공부방이 마련됐다. 주경야독하는 방송대 학생들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주민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이 정진야학의 뿌리인 것이다.

현재 정진야학에는 중등학력과 고등학력을 위한 검정고시 대비반이 각각 운영되고 있다. 평일 저녁 6시 30분부터 9시 50분까지 수업이 진행된다. 1교시는 저녁 6시 30분부터 8시 10분까지, 2교시는 8시 30분부터 9시 50분까지다. 매일 수업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검정고시 필수과목인 국어, 수학, 영어, 과학, 사회, 국사를 중심으로 시간표가 짜여있다. 21명의 학생이 그 시간표를 따라 공부한다. 그들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는 15명이다.

김서진(29) 제천시청 주무관은 15명 교사 가운데 가장 어리다. 그는 정진야학에서 중등부 국어를 가르친다. 금요일이면, 시청에서 퇴근하자마자 다시 야학으로 출근한다. 매주 금요일 1교시가 그의 수업 시간이다. 하필이면 금요일 저녁에 수업을 맡은 데는 이유가 있다. “어쩔 수 없죠. 제가 막내니까.” 김 주무관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정진야학 교사 가운데 유일한 20대다.

김서진 제천시청 주무관이 정진야학의 중등부 교실에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김은송 기자
김서진 제천시청 주무관이 정진야학의 중등부 교실에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김은송 기자

자연스레 스며든 야학 교사의 삶

그는 야학교사가 된 이유를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았다”라고 설명했다. 아버지 때문이다. 김 주무관의 아버지 김창순(58) 씨는 제천시청 자연치유특구 과장이자 정진야학의 교장이다. 아버지 김 과장은 1992년부터 정진야학의 교사였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공무원이 되면 야학을 해야 한다’고 김 주무관에게 말해왔다. 공무원이 되고, 야학에서 봉사하는 것은 김 주무관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지난해 5월, 김 주무관은 제천 시청에 부임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정진야학의 교사가 됐다.

정진야학 교무실에 국어 교과서가 놓여있다. 김은송 기자
정진야학 교무실에 국어 교과서가 놓여있다. 김은송 기자

다만, 가르칠 과목은 김 주무관이 직접 골랐다.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아무래도 국어 수업을 맡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았다. 가르치는 일이 처음이라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첫 수업을 마친 날, 김 주무관은 깜짝 놀랐다.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다음 수업 선생님이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 그날, 그는 혼자 생각했다. ‘이게 나한테 천직인가?’

청년에서 중노년으로, 시대와 함께 변화한 학생

열성적 교사이지만, 학생에게 숙제를 내지는 않는다. 야학에서 공부하는 대다수 학생은 해가 떠 있는 동안 어딘가에서 일한다. 야학을 마친 늦은 밤에 다시 책을 펼치기가 힘들다. 대신 수업 시간에 집중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김 주무관은 더욱 열성으로 가르친다. 그런 수업을 마치면, 아버지 또는 어머니 나이의 학생들이 “감사하다”라고 말한다. “젊은 사람이 놀지도 못하고 아줌마들 가르치러 오느라 고생이 많다”라고 말한다.

정진야학의 한 학생이 지난달 치러진 중등학력 검정고시 문제지를 보고 있다. 김은송 기자
정진야학의 한 학생이 지난달 치러진 중등학력 검정고시 문제지를 보고 있다. 김은송 기자

현재 정진야학에서 공부하는 21명의 학생 대부분이 50~60대의 중·노년층이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만 해도 10~20대가 가장 많았다. 1994년 4월 발간된 정진야학 문집 <정진소식>에는 당시 학생들의 현황이 담겨있다. 1993년 6월 기준, 당시 41명의 학생 가운데 30세 이하가 30명에 달했다. 이후 의무교육이 확대되고 검정고시를 가르치는 사설학원이 늘어나면서 정진야학 학생들의 연령대가 높아졌다.

나이 많은 학생들은 먹고사는 일 때문에 가끔 결석한다. 대표적인 게 ‘김장철’이다. 지난해 11월 어느 금요일엔 딱 두 명의 학생만 출석했다. 나머지는 김치를 담그느라 수업에 오지 못했다. 그날 김 주무관은 교탁에서 내려왔다. 두 명과 마주 앉았다. 일대일로 과외하는 것처럼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그날 배운 작품을 오래 기억했다. 김 주무관에게도 유독 기억에 남는 날이다.

김서진 주무관이 학생에게 받은 초코파이를 바라보고 있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김 주무관에게 간식을 건네곤 한다. 김은송 기자
김서진 주무관이 학생에게 받은 초코파이를 바라보고 있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김 주무관에게 간식을 건네곤 한다. 김은송 기자

합격률 높은 정진야학

그런 날을 거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 많이 가르친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중·노년 학생의 이해력을 감안해야 했다. 이제 김 주무관은 수업마다 하나의 문학 작품만 다룬다. 작품 하나를 소개한 뒤에는 곧바로 기출문제를 함께 풀었다. 예컨대 소설 ‘소나기’를 배우면, 이와 관련한 문제가 출제된 2015년, 2018년, 2020년, 2022년의 검정고시 시험지를 살펴보는 식이다. 이를 위해 김 주무관은 ‘작품별 기출문제지’를 따로 만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출제된 모든 국어 문제를 살펴본 뒤, 이를 문학 작품별로 분류하고, 그 문제를 가위로 일일이 오리고 붙여 편집한 것이다. “처음에는 열심히 만들었는데 지금은 일이 바빠서 돌려쓰고 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김서진 주무관이 만든 ‘기출 문제지’ 가운데 하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와 관련한 연도별 검정고시 문제를 일일이 오려 다시 붙였다. 김은송 기자
김서진 주무관이 만든 ‘기출 문제지’ 가운데 하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와 관련한 연도별 검정고시 문제를 일일이 오려 다시 붙였다. 김은송 기자

이런 노력과 열성 덕분에 정진야학 학생들의 검정고시 합격률은 높다. 노인복지관이나 사설학원에서 검정고시 수업을 들을 수 있지만, 교사들이 무료로 봉사하고, 학생들도 무료로 수업을 듣는 곳은 오직 정진야학 뿐이다. 게다가 소수의 교사가 여러 과목을 맡는 여느 교육기관과 달리, 정진야학에선 한 명의 교사가 하나의 과목만 맡아 가르친다. “선생님들이 전문적으로 가르치니 학생들의 합격률도 좋다”라고 김 주무관은 말했다.

아무 보상없이 20년 넘게 가르치는 선생님들

그런 전문성은 학생을 가르친 연륜에서 비롯한다. 현재 15명의 정진야학 교사 가운데 4명은 20년 이상 이곳에서 가르쳤다. 정진야학에서 배운 졸업생이 다시 야학으로 돌아와 교사가 된 경우도 있다.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헌신한 이들이 정진야학에는 많았다. 검정고시를 치르는 날이면, 교사들은 큰 버스를 빌려 학생들과 함께 시험장이 있는 원주를 오갔다. 검정고시 시험이 끝나면, 교사들은 학생을 위한 소박한 졸업식을 준비했다. 여름에는 체육대회를 열었고, 가을에는 수학여행을 떠났다. 비정기적으로 문집도 발간했다.

왼쪽부터 각각 2006년과 2023년의 정진야학 교무실 풍경이다. 책상과 의자, 냉장고, 벽에 걸린 사진은 예전 그대로다. 장진모 씨 제공
왼쪽부터 각각 2006년과 2023년의 정진야학 교무실 풍경이다. 책상과 의자, 냉장고, 벽에 걸린 사진은 예전 그대로다. 장진모 씨 제공

초창기에는 야학을 운영할 비용조차 교사들이 마련했다. 월 회비를 냈고, 일 년에 한두 번 ‘일일호프’나 ‘일일찻집’을 열어 모금했다. 그 시절 정진야학의 교사들은 일하는 시간을 쪼개어 지역의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그 시간을 다시 쪼개어 야학 운영비를 마련했던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지자체와 지역교육청의 지원을 받게 됐고, 덕분에 교사들이 직접 학교 재정을 챙기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 헌신과 봉사의 정신은 오늘의 정진야학 교사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평일 밤마다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은 불이 켜진다. 목은수 기자
평일 밤마다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은 불이 켜진다. 목은수 기자

다가오는 5월 20일이면, 김 주무관이 정진야학에 온 지 딱 1년이 된다. 그동안 가르친 학생 대부분은 지난 4월 검정고시 시험에서 합격했다. 그래도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이제 고등과정 국어 시험을 준비한다. 정진야학 국어교사, 김서진 주무관도 그들의 곁을 아주 오랫동안 지킬 생각이다.

※ 정진야학은 신입생을 상시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령제한 없이 중고교 졸업학력을 원하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관련 문의는 정진야학(043-643-7102)이나 김창순 교장(010-9147-2829).

※ <단비뉴스>는 정진야학에서 공부했던 이야기를 들려줄 졸업생을 찾고 있습니다. (010-2821-3503)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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