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가꾸는 정진야학] ② 장진모 청주 금천고 교사

<지난이야기>

정진야학은 1986년 충북 제천 대명상호신용금고 지하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인 정진야학은 지난 37년 동안 오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운영됐다. 지난 1회에서는 정진야학 중등부 국어교사인 김서진 제천시청 주무관의 이야기를 담았다. 야학 교사 중 유일한 20대인 그는 이제 막 야학에서 1년을 보냈다. 이번에는 1990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동안 정진야학에서 과학과 영어를 가르친 장진모 교사의 이야기를 싣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진야학에는 10대 청소년이 많았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둔 청소년들이었다. 아파서,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억압적인 학교가 싫어서 등 학교를 관둔 이유는 다양했다. 그들이 정진야학을 찾아왔다. 이들을 받아들인 정진야학의 교사 가운데는 현직 중‧고등학교 선생님도 있었다. 그들은 낮엔 정규학교에서, 밤엔 야학에서 가르쳤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충실하려는 그들에게 시간과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 안 청소년과 학교 밖 청소년 모두 그들의 제자였다.

장진모(61) 청주 금천고등학교 교사도 낮과 밤으로 가르쳤다. 1989년 제천중학교에 처음 부임하고, 다음 해인 1990년 정진야학의 교사가 됐다. 충북 청주로 발령받은 2005년까지 꼬박 15년 동안, 많게는 일주일에 사흘 밤을 야학에 나가 과학과 영어를 가르쳤다. 청주에서도 다른 야학에 나가 가르쳤으니, 지금껏 34년의 교직 생활 가운데 20년 넘도록 정규 학교 교사와 야학 교사를 병행했다.

장진모 교사는 현재 충북 청주 금천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목은수 기자
장진모 교사는 현재 충북 청주 금천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목은수 기자

물류와 불량배가 모이던 도시

장 교사는 1963년 경북 안동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청에서 역무원으로 근무했다. 장 교사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가 제천역으로 발령받았다. 정부 주도의 산업화 시기였던 1970년대 제천역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무연탄, 시멘트, 비료 등 영서 지역에서 생산된 주요 물자를 내륙으로 수송하는 거점이었다. 제천역이 커지면서, 필요한 철도인력도 늘었다. 이를 수용하기 위해 당시 제천시 영천동 일대에는 철도관사 40개 동이 들어섰다. 부모님과 함께 장 교사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 시절 제천은 ‘험한 동네’였다. 수많은 화물과 여객이 머무는 제천역을 중심으로 이권을 챙기려는 폭력배가 늘었다. 당시 폭력배들은 역 근처 ‘굴다리’에 터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았다. 장 교사가 살았던 관사도 그 부근이었다. 집을 오가느라 굴다리를 지나면서 동네 친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폭력배와 어울렸다. 굴다리 근처 동네에 살던 또래 친구들 가운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장 교사는 회고했다.

1980년대 제천역 앞의 모습이다. 많은 화물과 여객이 오가면서 당시 제천역 인근의 상권도 발전했다. 출처 한국철도공사
1980년대 제천역 앞의 모습이다. 많은 화물과 여객이 오가면서 당시 제천역 인근의 상권도 발전했다. 출처 한국철도공사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무렵, 당시 담임 선생님은 장 교사에게 사범대 진학을 권했다. 사범대의 인기가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물리교육과가 어떻겠느냐고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담임 선생님이 졸업한 학과였다. 사범대도 좋고, 과학 전공도 좋지만, 기왕이면 지구과학이 좋겠다고 장 교사는 생각했다. “물리나 화학은 너무 공식적이고 틀에 박힌 것 같았어요. 생물은 또 너무 째깐해 보였고.” 지구과학은 땅속부터 우주까지 넘나들며 공부하는 학문이라 생각했다. “스케일이 커서 마음에 들었다”라고 장 교사는 웃으며 말했다.

청주의 대학, 서울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느라, 그는 몇 년 동안 제천을 떠났다. 제천에 돌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89년 교사로서 첫 근무지를 발령받았다. 제천중학교였다.

학교 밖 청소년을 포용하는 학교

제천중학교에서 장 교사는 3학년 담임을 맡았다. 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담임을 맡은 반의 어느 학생이 자퇴했다. 명목상으로 자퇴였지만, 사실상 퇴학이었다. 그 학생은 대낮에 사람이 있던 가정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 장 교사가 경찰서로 달려갔지만, 그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은 소년원에 들어갔다. 장 교사에게 그 일은 오랫동안 충격으로 남았다.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교사로서 학생을 이끌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거죠.”

몇 달 뒤 그는 정진야학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전단지를 봤다. 그는 자퇴한 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기라면 그 학생을 가르치고 이끌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사 부임 1년 만인 1990년 당시 제천시 대명금고 지하에 있던 정진야학을 무작정 찾아갔다. 이후 15년 동안 야학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원에 들어갔던 제자가 정진야학에 입학했다.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그 학생은 정진야학에서 장 교사의 지도를 받아 중‧고교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1993년, 당시 정진야학이 있던 제천시 대명상호신용금고 지하에서 열린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서 장진모(가장 왼쪽) 교사가 웃고 있다. 출처 정진야학
1993년, 당시 정진야학이 있던 제천시 대명상호신용금고 지하에서 열린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서 장진모(가장 왼쪽) 교사가 웃고 있다. 출처 정진야학
2004년 4월, 장진모 교사가 정진야학 19기 신입생을 위한 입학식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정진야학
2004년 4월, 장진모 교사가 정진야학 19기 신입생을 위한 입학식을 진행하고 있다. 출처 정진야학

당시 제천에는 정규학교를 그만둔 학생들이 많았다. 제천시의 관련 자료를 보면, 1984년 한 해 동안 제천시에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200여 명의 학생이 중퇴했다. 당시 제천시 중‧고등학교의 총 학급 수가 약 200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한 학급마다 한 명의 학생이 자퇴한 셈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겠다고 정진야학을 찾아왔다. 정규 교육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들은 야학도 힘들어했다. 10명 가운데 8명 정도는 며칠 뒤부터 야학에 나오지 않았다. 성실하게 공부하여 야학을 졸업한 경우는 10명 가운데 2명꼴이었다. “그래도 한두 명은 올바로 이끈 거잖아요.” 장 교사는 뿌듯한 표정으로 그 시절을 돌아봤다.

야학에서 성실하게 공부하는 학생이라 해도 좀체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초중등 정규 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선생님들은 다 나쁘다’는 게 (야학) 학생들의 생각이었어요. 현직 교사라는 걸 밝히면 아이들이 나를 꺼리거나 싫어했죠.”

장 교사를 비롯한 야학 교사들은 ‘모든 선생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일탈을 비교적 관대하게 대했다. 담배 피우는 학생들을 보면, “꽁초라도 잘 버리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야학 교실이 있던 건물 구석에 흡연 공간을 만들어줬다. 폭행, 절도 등으로 검찰에 송치된 학생을 위해 야학 교사들이 선처 탄원서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함께 야학에서 공부하던 만학도들도 ‘학교 밖 청소년’을 지도하는 데 한몫했다. 뒤늦게 공부하러 야학을 찾아온 어른들에게 이른바 ‘일탈 청소년’은 그저 귀여운 아이였다.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던 그분들이 삶에 대해서는 젊은 야학 교사들보다 더 단련되어 있었던 거죠. 그 만학도들이 어린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도맡았어요. 하하”

교사와 선배가 보듬어 주는 곳에서 학생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이 야학을 다니면서 점점 밝아지는 게, 그게 그렇게 보람이었어요. 교사라는 직업의 진짜 보람과 본분을 그 시절에 느꼈죠.”

장 교사는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사로서 진정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은송 기자
장 교사는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교사로서 진정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은송 기자

야학과 잠시 이별하다

2005년, 장 교사는 충북 청주의 한 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제천의 정진야학에서 가르치는 일도 자연스레 중단됐다. 대신 청주에서 새로운 야학을 찾았다. 2009년부터 5년여 동안 청주의 어느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만, 그 야학은 정진야학과 달랐다. 정진야학에선 여러 직업을 가진 이들이 뜻을 모아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청주의 야학에선 자원봉사하는 대학생들이 주로 교사를 맡았다. 정진야학의 교사들은 야학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자신의 일을 조정했는데, 청주의 야학에선 대학생 교사들이 금세 그만두거나 자신의 시험 일정에 맞춰 야학 수업을 조정했다. 장 교사의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다. 이후 충북 옥천으로 발령받으면서 야학 교사 생활도 접었다.

장진모 교사는 현재 금천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친다. 재직 중인 학교 교문 옆에서 장 교사가 활짝 웃고 있다. 김은송 기자
장진모 교사는 현재 금천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친다. 재직 중인 학교 교문 옆에서 장 교사가 활짝 웃고 있다. 김은송 기자

선생님이 필요한 곳으로

야학 교사 생활을 접었지만, 마음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중‧고등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점점 더 수업 듣는 걸 힘들어했다. 수업 중에 엎드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억지로 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을 가르칠 열의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사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을 만났다. 한국 교사를 동남아 각 나라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늘어나는 다문화 학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부가 기획한 프로그램이었다. 장 교사는 2016년 8월부터 12월까지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한 학기 동안 현지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과학을 가르쳤다.

장진모 교사가 베트남 하노이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장진모 씨 제공
장진모 교사가 베트남 하노이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장진모 씨 제공

“50명의 눈이 나한테서 떨어지지를 않았어요.” 베트남에서 만난 학생들은 배우려는 열의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한국에서 온 장 교사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업을 시작하면 집중해서 공부했다. 동네 시장에서 그를 만나면 먼저 달려와 인사했다. 밥을 먹고 가라며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 교사는 정진야학에서 느꼈던 ‘교사의 맛’을 다시 느꼈다.

“원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건 정말 하나도 안 힘들어요. 하루 내내 수업해도 재미있어요.” 그가 있을 자리를 비로소 찾은 느낌이었다. 교사는 배움이 간절한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야학이 절실했던 예전 한국의 청소년과 만학도를 그는 베트남에서 보았다.

정진야학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야학 교사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퇴임하고 베트남에 가서 정진야학 같은 곳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그의 교무실 책장에는 베트남어 책이 꽂혀있다.

※ 정진야학은 신입생을 상시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령제한 없이 중고교 졸업학력을 원하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관련 문의는 정진야학(043-643-7102)이나 김창순 교장(010-9147-2829).

평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 곳곳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 ‘정진야학’의 수업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86년 이래 지금까지 1980여 명이 정진야학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860여 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지난 37년 동안 오직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학교를 운영해왔다. 공무원, 교수, 교사, 학생, 직장인, 주부, 외국인 등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웠다.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정진야학을 만들고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

① 지역 주민 가르치는 청년 공무원

제천 시민을 가르친 미국인 야학 교사

④ 학생들에게 청춘을 바친 평생 야학교사

⑤  한글을 모르니까 평생 막일만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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