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가꾸는 정진야학] ④ 이상곤 교사

<지난이야기>

정진야학은 1986년 충북 제천 대명상호신용금고 지하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인 정진야학은 지난 37년 동안 오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운영됐다. 지난 3회에서는 정진야학 개교 이래 유일한 원어민 교사 매튜 위더스푼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명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했던 그는 겨울 방학 기간을 이용해 정진야학에서 제천 시민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이번에는 정진야학이 태동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야학을 지켜온 이상곤 교사의 이야기를 싣는다.


1986년 개교한 충청북도 제천 정진야학에는 20년 이상 꾸준히 학생을 가르쳐 온 교사들이 많다. 이들은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 정진야학에 합류해 지금까지 야학을 지켜왔다. 제천 대명금고 지하방 한 칸에서 시작한 정진야학이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땀으로 학교를 가꿔온 이들이다. 특히 정진야학이 태동하던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 역사를 모두 지켜본 사람이 있다. 정진야학 학생들의 영어 선생님 이상곤 씨(64)다.

40년 야학 교사 인생의 시작

이상곤 씨가 정진야학에서 중등반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이상곤 씨가 정진야학에서 중등반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이상곤 씨와 야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야학 교사로 처음 일하기 시작한 20대 청년 시절부터 60대 중반이 된 현재까지 이 씨는 충청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야학을 만들고, 키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원도 춘천에서 나고 자란 이 씨는 1982년 강원도 원주 상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학을 시작했다. 이 씨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늘 옆구리에 두꺼운 사전을 끼고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 지인이 근처 야학에서 영어를 가르쳐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이 씨는 흔쾌히 승낙했다. 입학 이듬해인 1983년부터 원주 성지야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2년 뒤에는 또 다른 지역 야학인 성문야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그곳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원주에서 야학 교사로 일하는 동안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1986년 대학 졸업 후 이 씨는 부모님이 계신 제천에 왔다. 이듬해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정진야학과의 인연도 그즈음 시작됐다. 1987년의 어느 봄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지역방송 채널의 자막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정진야학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였다. 원주에서 쌓은 야학 교사로서의 경험을 제천에서도 이어나가고 싶었던 이 씨는 고민 없이 정진야학을 찾아갔다.

당시 정진야학은 문을 연지 반 년이 지나 있었지만 학교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상태였다. 야학 경험이 전혀 없는 방송통신대학교 학생들이 운영하고 있어 교육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다. 야학 학생도 다섯 명에 불과했다. ”당시 정진야학은 말 그대로 문만 열어둔 상태였다. 교사는 부족하고 교사 역할을 맡은 방통대 학생들은 학교 운영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이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이 씨는 비슷한 시기에 합류한 동료 교사와 함께 야학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사들을 모집하고 교실에 칸막이를 설치해 교무실을 만들었다. 교과 과정은 중등반과 고등반으로 분리해 학습 체계를 갖췄다. 시민들이 가꾸는 정진야학의 시작은 바로 이때부터였던 셈이다.

정진야학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이상곤 씨(오른쪽에서 네 번째). 출처 정진야학
정진야학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이상곤 씨(오른쪽에서 네 번째). 출처 정진야학

야학이 학교의 모양새를 갖추고 나니 학생도 점점 늘어났다. 영어 과목을 맡은 이 씨는 밤마다 그 학생들을 가르쳤다. 검정고시 시험이 있는 날이면 정진야학 교사들은 직접 식사를 준비해 시험장에 따라갔다. 봄이면 방앗간에서 얻어온 밥과 따뜻한 국을, 여름이면 오이냉국을 만들어 도시락을 쌌다. 쉬는 시간에는 커피나 음료수를 타서 교실에 올라갔다.

검정고시 시험장에서 준비한 점심 식사를 학생들에게 배식하는 정진야학 교사들. 출처 정진야학
검정고시 시험장에서 준비한 점심 식사를 학생들에게 배식하는 정진야학 교사들. 출처 정진야학

몸과 마음을 다해 야학을 가꾸는 일

초창기 정진야학 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운영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당시 교장직을 맡고 있던 이 씨는 원주 야학에 몸담던 시절 운영비 마련을 위해 일일 찻집을 기획한 경험을 떠올렸다. 제천에서는 찻집이 아니라 ‘일일호프’를 열기로 했다. 1996년 12월 6일 정진야학의 첫 일일호프가 열렸다. 일부러 행사가 많은 연말을 피해 12월 초로 날을 잡았다.

티켓은 만 원.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메뉴도 부실했다.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내기 위해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어설픈 장사였지만 취지에 공감한 제천 시민들은 선뜻 지갑을 열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전 바가지였다. 모금을 위해 지인들에게는 ‘반강매’를 하기도 했다”고 이 씨는 웃으며 말했다.

정진야학 교사들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티켓은 하루 200장이 넘게 팔렸다. 첫 장사에서 남긴 순수익이 760만 원이었다. 5년 동안 호프를 운영하고 나니 정진야학 계좌에 5000만 원이 들어왔다. 교실의 빔 프로젝터나 책걸상 등 오래된 장비를 교체하는 데 일부를 쓰고, 나머지는 저금했다.

돈을 모은다고 학교가 운영되는 것은 아니었다. 액수를 따질 수 없는 교사들의 헌신이 필요했다. 정진야학 교사들은 각자 생계를 꾸리는 일로 바쁜 와중에도 1박2일이나 무박 2일로 ‘교사 수련회’를 떠났다. 더 잘 가르치는 방법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이끄는 법, 5분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 마치는 법 등 교사에게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들을 함께 의논했다. “수련회에 한번 다녀오면 선생님들 눈빛이 달라졌다”고 이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야학 교사들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교사 수련회를 떠나곤 했다. 출처 정진야학
야학 교사들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교사 수련회를 떠나곤 했다. 출처 정진야학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어도 힘들지 않았다. 다만 수업이 잦고 회식 자리 등 모임이 자주 있어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다. 이 씨는 “그래도 당시 교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야학에 오는 시간은 비워뒀다. 야학에 가는 날은 몸이 기억해서 그냥 가게 됐다”고 말했다.

정진야학 교장, 댠양야학을 만들다

밤낮으로 야학을 챙기던 이 씨의 본업은 공무원이었다. 2021년을 끝으로 퇴직할 때까지 31년을 공무원으로 일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했던 이 씨는 곧 생활고로 공부를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이 씨는 1990년 11월 강원도 화천으로 발령받아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한 1년 4개월 동안은 정진야학을 쉬어야 했다. 이후 제천과 가까운 충청북도 단양으로 발령받으며 다시 정진야학에 나가기 시작했다.

90년대 말 이 씨는 단양군청에서 근무하며 매주 제천으로 야학 학생들을 가르치러 다녔다. 어느 날 단양군수가 결재받으러 찾아온 이 씨에게 대뜸 물었다. “너는 제천시민이냐, 단양군민이냐.” 영문을 모른 채 의아해하던 이 씨에게 군수는 그 후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됐다. 군수가 밑도 끝도 없는 핀잔을 반복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었다. 이 씨가 일하는 단양에는 야학이 없었다던 것이다. 이 씨는 지역발전 정책의 하나로 단양에도 야학을 만들겠다는 기획안을 제출했다. 2000년 3월 15일 단양야학이 탄생했다.

퇴직 후 제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지금까지도 매주 단양야학과 정진야학 두 곳에서 가르친다.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정진야학에, 목요일에는 단양야학에 간다. 퇴직 전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수요일 영어 수업을 담당할 새 영어 교사를 구해달라고 정진야학 교장 선생님에게 이야기했어요. 교장 선생님이 ‘새로운 교사를 찾을 때까지 한 달만 더 수업을 해달라’고 했었는데,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제가 수업을 하고 있네요, 하하.”

삶이 된 야학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야학도 변화했다. 예전엔 젊은 학생들이 많았지만, 2000년대 이후 학생들의 연령대가 점점 높아졌다. 수업 방식에도 고민이 생겼다.

“90년대까지는 수업 시간에 ‘I have a book’이라는 문장을 가르치면 다음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문장을 외워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글자들 밑에 ‘아이 해브 어 북’이라는 한글을  하나하나 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돼요. 게다가 국어가 잘 안되는 학생들도 많아요. 그저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손짓, 발짓까지 써가며 가르치고 있어요.”

이상곤 씨가 빔 프로젝터를 사용해 수업하고 있다. 이 빔 프로젝트는 1990년대 말 정진야학 교사들이 일일호프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수익으로 구입한 것이다. 김은송 기자
이상곤 씨가 빔 프로젝터를 사용해 수업하고 있다. 이 빔 프로젝트는 1990년대 말 정진야학 교사들이 일일호프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수익으로 구입한 것이다. 김은송 기자

그 변화를 감당하며 야학을 가꾸고 지킨 덕분에 이 씨에겐 수많은 제자가 있다. 원주, 제천, 단양에 흩어진 제자들에게 이 씨는 졸업 후에도 찾아가고 싶은 선생님이다. 정진야학이 대명금고 지하에 있던 시절 이 씨가 가르쳤던 한 학생은 지금까지도 스승의 날에 꽃바구니를 보내온다.

정진야학 학생이 이상곤 교사의 수업을 들으며 공책에 필기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정진야학 학생이 이상곤 교사의 수업을 들으며 공책에 필기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1987년 이 씨와 함께 정진야학을 시작했던 한 동료 교사는 이 씨를 ‘야학에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 씨는 “그게 아니라 애정이 있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 애정이 아직 식지 않았으니 체력이 받쳐줄 때까지, 끝까지 야학에서 가르쳐 보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야학이 빨리 없어져야 좋은 거죠. 못 배운 사람들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동료 교사들과도 ‘언제쯤이면 야학이 없어질까’ 하는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야학이 필요한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이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게 또 우리 교사들 생각이죠.”

이상곤 씨가 자신의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목은수 기자
이상곤 씨가 자신의 밭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목은수 기자

기자가 이 씨를 처음 만났던 날, 그는 퇴직 후에 일구고 있는 작은 밭에서 야학 출신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야학을 하며 가장 뿌듯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물었다. 이 씨는 멋쩍게 웃었다.  

“40년 가까이 야학을 하다 보니 야학은 그냥 내 삶, 생활의 일부가 됐어요. 어제 동료 선생님이 ‘우리가 80세 넘어서도 학생들이 사주는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굳이 뿌듯한 점을 찾자면, 학생들이 야학을 졸업하고 대학까지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 좋아요. 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큼 꼭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야학 학생들이 많거든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잘되는 학생을 보면 좋아요. 그게 다에요.”

※ 정진야학은 신입생을 상시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령제한 없이 중고교 졸업학력을 원하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관련 문의는 정진야학(043-643-7102)이나 김창순 교장(010-9147-2829).

평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 곳곳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 ‘정진야학’의 수업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86년 이래 지금까지 1980여 명이 정진야학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860여 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지난 37년 동안 오직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학교를 운영해왔다. 공무원, 교수, 교사, 학생, 직장인, 주부, 외국인 등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웠다.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정진야학을 만들고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

① 지역 주민 가르치는 청년 공무원

② 야학에서 교사의 참맛을 느끼다

③ 제천 시민을 가르친 미국인 야학 교사

⑤  한글을 모르니까 평생 막일만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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