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가꾼 정진야학] ⑤ 만학도 김동금 할머니

<지난이야기>

정진야학은 1986년 충북 제천 대명상호신용금고 지하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인 정진야학은 지난 37년 동안 오롯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운영됐다. 지난 4회에서는 정진야학이 태동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야학을 지켜온 이상곤 영어 교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40년 넘게 충북 제천과 단양, 강원도 원주에서 야학을 만들고, 가꾸고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이번에는 정진야학의 큰언니, 78세 김동금 학생의 이야기를 싣는다.

 

오후 6시 5분 전. 시계를 확인한 김동금(78) 씨의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치우고 일어나야겠네.” 혼잣말을 하며 재빨리 설거지를 마친 그는 식탁 위에 있던 등산 모자를 쓰고 현관 문고리에 걸려있는 빨간색 등산 가방을 멘다. 가방 안에는 두꺼운 공책과 필통, 돋보기안경이 들어있다.

김동금 할머니의 집 현관문 앞에 걸려있는 가방. 김 할머니는 매일 저녁 이 가방을 메고 야학에 간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의 집 현관문 앞에 걸려있는 가방. 김 할머니는 매일 저녁 이 가방을 메고 야학에 간다. 목은수 기자

이윽고 정진야학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이 시간만 되면 옆집 할머니들이 우리 집 앞에 나와 있었어. 내가 문밖으로 나오면 할머니들이 ‘학교 다녀오세요’ 이랬지.” 야학에 가는 그를 배웅하던 이웃 할머니들은 이제 없다. 대부분 돌아가셨다.

김동금 할머니는 정진야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다. 10년 넘게 정진야학에 다니고 있는 그는 현재 고등부에서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3차례 고등 학력 검정고시 시험을 치렀지만, 7과목 가운데 한 과목도 통과하지 못했다. 이제 공부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에게 야학 동료들은 말한다. “언니가 ‘왕언니’니까 야학을 지켜야지!” 야학 친구들의 성화와 응원을 떠올리며 김 할머니는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 같아서는 80이 넘어야 (졸업하게) 될 것 같아. 그때는 내가 또 어떤 꼬라지가 돼있을까?” 

김동금 할머니는 정진야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왕언니’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는 정진야학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왕언니’다. 목은수 기자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소녀

김 할머니는 1947년 충북 음성에서 여덟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국민학교를 다니려면 매달 300환(圜)(약 30원)을 내야 했다. 당시 김 할머니의 집안 형편으로는 낼 수 없는 돈이었다. 입학식은 일단 치렀지만, 차마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만 서성거렸던 일을 그는 기억한다. 학교 가는 대신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도왔다. “아침 먹고 나면 점심 저녁(에 쓸) 땔 나무 해야 되고, 그 사이에 방 뜨시게 불 때야 되고, 그러니까 ‘나무’ ‘밥’ ‘나무’ ‘밥’, 그것만 꼴박에 넣어갖고(머리에 쳐박아 두고) 있었어.”

12살 되던 해 봄, 바로 아래 동생이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다. 밭일하느라 정신없는 엄마 몰래, 어린 김 할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고 집을 나섰다. 동생을 돌보는 척 학교에 갈 심산이었다.

기대를 품고 찾아간 학교는 김 할머니의 입학을 거부했다.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했다. 대신 국어 교과서 앞에 쓰인 ‘국민교육헌장’을 읽고 써서 오면, 나이에 맞게 4학년으로 넣어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학교에 다녀본 적 없는 김 할머니는 글을 알지 못했다.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그날 이후, 12살 소녀는 공부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저 일밖에 몰랐어

김 할머니가 돈 버는 일을 처음 시작한 건 14살 때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다친 ‘상해 용사’였다. 몸이 불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식구를 데리고 충주로 이사했다. 당시 충주에는 ‘곱돌(활석) 광산’이 있었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광산에 매일 나갔다. 광산에서 캔 돌을 고르고 분리하여 돈을 벌었다.

2년여 뒤에는 강원도 함백(오늘날의 정선)으로 다시 이사했다. 1955년 충북 제천과 강원도 태백을 잇는 태백선이 처음 개통했다. 몇 년 동안 계속된 철도 공사장에서 김 할머니는 일했다. 남자들이 터널을 뚫으면, 길을 뚫을 때 떨어져 나온 돌을 여자들이 잘게 부쉈다.

돌 깨는 일을 하던 이들은 주로 산비탈에 모여 살았다. 산 중턱에 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슬레이트를 얹어 집을 만들었다. 김 할머니는 “바람이 세게 불면 지붕이 덜렁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동금 할머니가 탄광 노동자들과 모여 살았던 산비탈 마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가 탄광 노동자들과 모여 살았던 산비탈 마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은수 기자

산비탈 마을에 살던 김 할머니는 네 살 어린 동생과 매일 일을 나갔다. 아침 먹고 나가 온종일 돌을 깨면 오전 오후로 각각 1톤짜리 박스를 꽉 채웠다. 일당은 ‘만표’(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급여 증표)로 받았다. 만표를 현금으로 바꿔 보리쌀 반되, 쌀 반되, 소주 한 병을 샀다. 조금 더 넉넉히 받는 날에는 밀국수 한 묶음을 더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었다.

현대사를 닮은 굽이진 인생

김 할머니가 18살 되던 해, 가족은 다시 강원도 백운산에 있는 광산 꼭대기 마을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김 할머니는 ‘선탄’ 작업을 했다. 선탄은 석탄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광산에서 나온 탄을 트럭이 쏟아부으면, 김 할머니는 좋은 탄을 골라냈다. 일당은 쌀 두 되였다. 두고 먹을 쌀을 제외한 나머지를 팔아 고등어도 사고 꽁치도 샀다.

그 무렵 김 할머니의 어머니는 하숙을 시작했다. 김 할머니의 일도 늘었다. 낮에는 동생과 함께 탄을 골라내고, 밤에는 하숙 살림을 도왔다. 그러다 남편을 만났다. 하숙집에 살면서 광산에서 일하던 어느 총각이 김 할머니에게 ‘선물’을 줬다. “굴에서 나오는 ‘나무 동갈이’(짤막한 토막)’를 가져다주곤 했다”고 김 할머니는 말했다.

어느 날 그 모습을 본 아버지가 몰래 연애한다며 길길이 화를 냈다. 맏딸에게 “그냥 날을 받아서 결혼하라”고 했다. 21살 되던 해, 김 할머니는 손 한 번 안 잡아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뒤 아이를 낳을 무렵, 김 할머니는 광산 앞에 작은 구멍가게를 냈다. 그러다 난리가 났다. ‘사북사태’가 터졌다. 사북사태는 1980년 동원탄좌 사북지역의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 항쟁이다. 어용노조와 저임금에 항의하는 광부와 그 가족 등 6000여 명이 사흘 동안 시위를 벌였다. 광부들은 사북읍 시가지를 점거하고, 병기고와 화약고를 통제했다.

사북 사태는 결국 노사정 합의로 마무리됐다. 밀렸던 남편의 월급이 다달이 나오며 빠듯했던 생활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구멍가게 장사도 잘되기 시작했다.

홀로 가족을 부양하다

넉넉한 살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남편이 진폐증 11급 판정을 받았다. 8년 동안 광산에서 일하며 폐에 분진이 쌓인 탓이었다. 김 할머니 부부는 광산 일을 관두고 충북 제천으로 내려왔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제천 강제동에 땅을 사서 과수 농사를 지었다. 광산에서만 일했던 두 사람은 농사를 몰랐다. 한 해 만에 농사를 망쳤다. 살림은 다시 빠듯해졌다. 아픈 남편 대신 김 할머니가 홀로 다시 강원도로 향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김 할머니는 함백 광업소에 들어갔다. 남편이 광업소에서 일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그 아내는 다른 이보다 우선하여 선탄 일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 학자금도 대줬다. 가족을 떠나 객지에서 혼자 일한 지 5년째 되던 해에 사고가 터졌다.

첫눈 오는 날이었다. 날이 추워 탄이 얼며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작업반장은 작업자 가운데 가장 오래 일해온 김 할머니에게 일 처리를 맡겼다. 꽁꽁 얼어 컨베이어 벨트에 쌓인 탄을 삽으로 퍼냈다. 탄을 퍼내고 있는데, 그런 줄 몰랐던 다른 작업자들이 기계를 가동시켜 버렸다. 들고 있던 삽과 함께 김 할머니의 팔이 컨베이어 벨트로 말려 들어갔다. 얼굴까지 빨려 들어갔다.

빽, 빽, 빽, 빽, 빽. 굉음이 들린 뒤에야 사람들은 기계를 멈춰 세웠다. 컨베이어 벨트가 거꾸로 돌면서 김 할머니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팔을 크게 다쳤다. 위아래로 오른쪽 어금니 6개가 빠져 버렸다. 7급 장애를 얻었다. 꼬박 1년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다.

젊은 시절 고되게 일하다 다친 흔적이 김동금 할머니의 몸 곳곳에 남아있다. 목은수 기자
젊은 시절 고되게 일하다 다친 흔적이 김동금 할머니의 몸 곳곳에 남아있다. 목은수 기자

“수술해 갖고서는 완전히 마네킹(처럼 깁스)을 해 갖고, 1년 (동안 병원에) 있었어. 배꼽만 내놓고 이만치 다 통깁스를 하더라고.” 그때 얻은 상처는 아직도 할머니의 몸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얼굴에는 분진이 박힌 까만 자국이, 팔에는 일자로 그어진 두 개의 흉터 자국이 있다.

50살에 글자를 깨치다

김 할머니가 입원해 있던 어느 날, 병원 꼭대기 층에 있던 교회 전도사가 예배에 나와 보라고 말했다. 기대를 품고 갔으나 돌아 나왔다. 성경을 읽지 못하니 예배를 쫓아가기 어려웠다. “새벽 예배를 가면, 사람들이 콧물 눈물 (흘리면서 예배) 하는데 나만 눈이 동그래 갖고 나왔어.”

김동금 할머니는 매일 버스를 타고 정진야학으로 등교한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는 매일 버스를 타고 정진야학으로 등교한다. 목은수 기자

퇴원 이후, 가족이 있는 제천에 돌아온 김 할머니는 다시 교회를 찾았다. 밤마다 들리는 동네 교회 종소리에 마음이 동했다. 교회를 나갔어도 여전히 “허연 건 종이고 꺼먼 건 글씨였다”고 할머니는 회상했다. 그래도 열심히 나갔다.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꿈에서 글자를 깨쳤다”고 김 할머니는 말했다. 사흘 밤 동안, 하나님이 잇달아 꿈에 나왔다. ‘시편’을 주시면서 “이걸 읽으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까지 통달할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째 같은 꿈을 꾸던 날 글자가 읽히기 시작했다.

글이 읽히자 할머니는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다녔다. “아마 한 3년을 내가 미쳐가고 돌아 댕겼어. 버스터미널, 냉면집, 한식당, 여관, 술집, 전부 다, 그 골목골목 다니면서 간판 글자 읽었어. 지금도 골목이 훤해.”

공부하는 날에는 밥이 지대로 넘어가데

글자를 읽게 되자, 쓰고 싶어졌다. 김 할머니는 제천에서 초등학력 검정고시를 가르치는 솔뫼학교에 찾아갔다. “공부하는 날에는 밥이 지대로(저절로) 넘어갔다”고 그는 말했다. 검정고시 시험장에 가서도 의자에 앉기만 하면 기분이 좋았다. “옆에 자리가 비어있으면 누구라도 오면 좋겠다. 막 그러면서 친구들 생각이 나고.” 2년을 공부하고 초등과정 검정고시에 합격한 할머니는 65살이 되던 2012년, 중고교 검정고시를 가르쳐 주는 정진야학을 찾아갔다. 공부하러 간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야학 가러 집을 나설 때 나는 10살이야.”

김동금 할머니가 제천의 정진야학 건물 앞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가 제천의 정진야학 건물 앞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목은수 기자

정진야학에 다니며 일도 다시 시작했다. 매년 6월부터 8월까지 수박밭에서 수박 넝쿨의 잔가지 치는 일을 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사장이 직접 야학에 내려주기도 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던 할머니는 69살이 되던 2016년, 중학 졸업 시험 6과목 가운데 네 과목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 공부를 멈춰야 했다. 수박밭에서 일하던 어느 날, 인부들을 태우고 이동하던 트럭이 내리막길에서 사고를 냈다. 트럭 뒤에 타고 있던 할머니는 골반을 다쳤다. 척추 디스크도 터졌다. 왼쪽 얼굴 뼛조각이 눈 밑으로 들어갔다. 눈알을 빼고 다시 집어넣는 대수술을 했다. 이후 할머니의 얼굴에는 철심 12개가 박혀있다. 다시 3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매일 통원했다. 몸이 회복될 무렵, 정진야학도 코로나19로 문을 닫았다.

김동금 할머니가 수업 시작 전, 칠판지우개를 빨고 있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가 수업 시작 전, 칠판지우개를 빨고 있다. 목은수 기자

팬데믹이 진정된 지난해 겨울, 할머니는 다시 야학에 나가려 했지만, 사고 후유증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밤에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마주치면 시야가 흐려졌다. 빛이 모두 자신을 향해 오는 듯하면서 몸이 벌벌 떨렸다.

겨우내 쉬었다가, 올해 2월부터 다시 등교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아픈 몸은 할머니의 공부를 돕지 않는다. 우선 불면증이 생겼다. 야학에 다녀온 뒤 잠에 들어도, 밤 12시가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한번 떠진 눈은 좀처럼 다시 감길 줄 모른다. 할머니는 잠을 포기하고 야학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그런데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다. 밤새 읽고 쓴 내용인데 아침에 보면 생전 처음 보는 것 같다.

불면증이 생긴 김동금 할머니는 야학에서 배운 내용을 밤새 복습한다. 목은수 기자
불면증이 생긴 김동금 할머니는 야학에서 배운 내용을 밤새 복습한다. 목은수 기자

시험을 치러 가서도 난감하다. 문제지에 적힌 문제들이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생소하다. 전혀 배운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고등과정 검정고시 시험을 세 번 치렀지만, 아직 60점을 넘은 과목이 하나도 없다.

요즘에는 자신을 붙들고 열심히 가르치는 야학 선생님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처음으로 ‘이 나이에 공부하는 게 창피한 일인가?’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런 할머니를 보고 손녀가 말했다. “할머니, 우리는 12년 배웠거든?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2년 배웠어. 근데 할머니는 그거 배워 갖고 되겠어? 조금 더 다녀봐!” 같이 공부하는 야학 친구들도 격려한다. “‘왕 언니’ 노릇해야지! 학교 지켜야지!”

김동금 할머니가 사는 집의 거실 벽에 정진야학 고등과정 시간표가 붙어있다. 목은수 기자
김동금 할머니가 사는 집의 거실 벽에 정진야학 고등과정 시간표가 붙어있다. 목은수 기자

다가오는 8월, 김동금 할머니는 네 번째 고등 검정고시 시험을 치른다. 이번에도 합격하지 못할까 걱정이 많다. 언제쯤 모든 과목에서 합격할지, 언제까지 이 공부를 이어갈 수 있을지 할머니는 잘 모른다. 그래도 오늘도 야학에 간다.

※ 정진야학은 신입생을 상시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연령제한 없이 중고교 졸업학력을 원하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습니다. 관련 문의는 정진야학(043-643-7102)이나 김창순 교장(010-9147-2829).

평일 저녁 6시 30분이 되면, 제천시 남현동 주민자치센터 2층 곳곳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제천 유일의 검정고시 야간학교 ‘정진야학’의 수업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86년 이래 지금까지 1980여 명이 정진야학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860여 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지난 37년 동안 오직 시민의 자발적 참여와 봉사로 학교를 운영해왔다. 공무원, 교수, 교사, 학생, 직장인, 주부, 외국인 등이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웠다. 빛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정진야학을 만들고 가꾸고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속으로 싣는다. (편집자)

① 지역 주민 가르치는 청년 공무원

② 야학에서 교사의 참맛을 느끼다

③ 제천 시민을 가르친 미국인 야학 교사

④ 학생들에게 청춘을 바친 평생 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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