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사맥(脈)] 입헌군주제

지난 6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찰스 3세(74)의 대관식이 열렸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1926~2022)와 필립 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1958년 아홉 살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된 찰스 3세는 65년 만에 왕관을 썼습니다. 세계의 시선이 쏠린 대관식에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등 외국 정상 100여 명을 포함해 203개국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이후 70년 만의 대관식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많은 영국인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가운데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거리 한편에서는 군주제 반대 시위도 벌어졌습니다. 오랜 기간 군주제 폐지를 주장해 온 영국 시민단체 ‘리퍼블릭’은 찰스 3세 부부의 행렬 앞에서 ‘나의 왕이 아니다’(Not My King)라고 적힌 노란 손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이날 영국 경찰은 공공질서 위반 등의 혐의로 리퍼블릭의 그레이엄 스미스 대표를 포함한 시민 52명을 체포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통치 형태인 군주제에는 왕이 절대적 권한을 갖고 군림하는 전제군주제와 왕권이 헌법으로 제한되는 입헌군주제가 있습니다. 영국은 17세기 후반부터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왕은 상징적인 국가 원수의 역할만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일부 영국 시민은 어떤 이유로 군주제에 반대하는 것일까요?

군주제에 반대하는 한 영국 시민이 찰스 3세의 대관식 날 런던 거리에서 ‘나의 왕이 아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군주제에 반대하는 한 영국 시민이 찰스 3세의 대관식 날 런던 거리에서 ‘나의 왕이 아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국 국민의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2013년만 해도 75%나 됐던 영국의 군주제 지지율은 지난달 기준 62%까지 떨어졌습니다. 최근 시엔엔(CNN)과 여론조사회사 사반타가 18~24세 영국 시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2093명 중 36%가 ‘10년 전보다 왕실에 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응답하기도 했죠. 또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2021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40%의 응답자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국가 원수를 선출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젊은 층의 지지율이 2020년을 전후해 크게 추락했는데요, 이는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의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과 찰스 3세의 차남 해리 왕자의 아내 메건 마클을 향한 인종차별 등으로 영국 왕실이 논란에 휩싸였던 시기입니다.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왕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죠. 국왕이 된 찰스 3세 또한 불륜, 이혼, 전 부인 다이애나의 죽음 등으로 일부 국민의 미움을 받아왔습니다.

왕실의 막대한 재산 역시 논란의 대상입니다. 지난달 20일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찰스 3세의 개인 재산은 20억 파운드(약 3조 3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영국 왕실은 매년 8600만 파운드(약 1438억 원)에 이르는 왕실 보조금을 국고에서 지원받고, 세습 부동산 자산에서 나오는 배당금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습니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와 코로나19 대유행의 여파로 서민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 상황에서, 막대한 세금을 왕실 유지 경비로 사용하는 것에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왕실은 이번 대관식 규모를 전보다 줄였다고 밝혔지만, 최소 1억 파운드(약 1670억 원)의 세금이 대관식 비용으로 쓰였다는 추정이 나오며 ‘혈세 낭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대관식 2주 전 유고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가 대관식 비용을 지원해선 안 된다’는 반응이 51%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제 사회에서도 영국 왕실을 향한 눈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 식민 지배의 잘못을 반성하고 해당 국가들에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를 중심으로 구성된 영연방 52개 국가 중 12개 나라 원주민 지도자들은 대관식 전날 찰스 3세에게 ‘영국의 식민 지배를 공식 사과하고 왕실 재산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습니다. 영연방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영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주변 국가와의 분쟁에서 보호받으려는 의도 등으로 영국 왕을 상징적 군주로 인정하고 있죠.

영연방 국가 중 벨리즈, 바하마, 자메이카 등에서는 군주제를 떠나겠다는 여론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국가들이 2021년 공화국(세습 왕이 없는 나라)으로 전환한 바베이도스를 따라 곧 영연방을 탈퇴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죠. 호주에서도 군주제 폐지와 공화제 전환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습니다. 지난 2월 호주 중앙은행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얼굴이 들어간 5달러 지폐를 호주 원주민을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여론 흐름 속에 대관식을 치른 찰스 3세 앞에는 무거운 과제들이 놓여있습니다. 왕실 현대화와 왕실 내 갈등 해소 등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군주제 찬성론자들은 왕실이 영국 전통과 고유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대표적인 ‘소프트 파워’라고 주장합니다. 왕실을 활용해 국제 사회의 입지를 다지고, 많은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다는 것이죠. 평생 어머니의 이인자로 살다가 드디어 주인공이 된 찰스 3세와 폐지론에 직면한 영국 왕실은 과연 ‘존재 이유’를 계속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주의 시사맥(脈), ‘입헌군주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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