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사맥(脈)] 피타 림짜른랏
지난 4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성소수자 축제 ‘방콕 프라이드 2023’가 열렸습니다. 전진당(MFP)의 피타 림짜른랏(42) 대표는 축제에 참석해서 자신이 총리가 되면 취임 100일 이내에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피타는 지난달 치러진 총선에서 제 1당이 된 전진당의 대표로 태국의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 총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습니다.
피타 림짜른랏은 정치인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농업부 고문이었고, 삼촌은 탁신 전 총리의 측근입니다. 피타 대표는 뉴질랜드에서 지낸 10대 시절, 호주 의회에서의 토론과 뉴질랜드 총리의 연설을 보며 정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후 하버드대에서 공공정책 석사를, 메사추세츠공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2019년 총선에서 전진당의 전신인 ‘미래당’의 의원으로 당선돼 정치활동을 펼쳤습니다.
피타 림짜른랏이 속한 전진당은 지난달 14일 치러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원의원 500석 중에서 152석(30%)을 확보하면서 제 1당으로 부상한 겁니다. 2020년 창당한 전진당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당으로 꼽혔습니다. 징병제 폐지, 군주제 개혁, 동성 결혼 합법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기성권력을 상징하는 군부나 왕실 모두와 거리를 뒀습니다. 덕분에 수도 방콕에서 33개 지역구 중에서 32석을 차지할 정도로 도시지역과 젊은 층에서 두터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군부에 대항해 온 중심 세력은 탁신 가문이었습니다. 태국은 군부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입니다. 군부는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1932년 이후 쿠데타를 19차례나 일으켰습니다. 현 총리인 쁘라윳 짠오차(69) 역시 군인 출신으로, 육군 사령관이던 지난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탁신계’ 정당은 2001년 이후 실시된 모든 선거에서 승리하며 군부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져 왔습니다. 탁신 친나왓(75)은 2001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에 오르고, 200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연임에 성공했지만 2006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태국의 전 총리입니다. 군부에 의해 금방 물러났지만, 2008년에는 탁신의 매제 솜차이 옹사왓(76)이, 2011년에는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56)이 태국의 총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도 탁신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36)이 프아타이당의 총리 후보로 총선을 이끌었죠.
전진당이 프아타이당을 제치고 제 1당으로 올라설 수 있던 이유는 전진당이 내건 ‘왕실 개혁’ 때문입니다. 전진당은 이번 총선에서 ‘왕실모독죄 폐지’를 약속한 유일한 정당이었습니다. 왕실모독죄를 규정한 태국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욕하거나 위협할 경우 최대 징역 15년까지 처할 수 있는 조항입니다. 이 때문에 태국에서 왕실 비판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태국의 최대 반 군부 시위로 불리는 2020년 ‘세손가락 시위’에서 처음으로 왕실에 대한 개혁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시위대는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왕의 정치적 행위와 불투명한 재산관리,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특권 등을 지적하며 왕실 개혁을 촉구하는 10가지 요구 사항을 발표했습니다. 전진당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요구를 포용하면서 제 1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전진당이 확보한 의석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른 정당들과 연합해서 이른바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합니다. 이번에 30%가 가까스로 넘는 의석을 확보한 상태여서 피타 대표가 실제 총리가 되기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통상적으로 태국처럼 하원과 상원이 나누어진 양원제 형태의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뽑는 하원에서 총리를 선출합니다. 그런데 태국 군부는 지난 2017년 헌법을 개정해 2019년 총선 이후 5년 동안은 상원의원 250명이 총리 선출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피타 대표가 총리로 선출되려면 하원 500석과 상원 250석을 합친 750석의 과반인 376석을 확보해야 하는 겁니다. 상원의원은 모두 태국 국왕이 지명하게 돼 있는데, 사실상 군부 세력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난 2019년에도 상원의원 250명 가운데 대다수가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현 총리 선출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피타 대표는 총선에서 141석을 차지한 프아타이당 등 다른 7개 정당과 연정을 꾸려 집권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선거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22일 ‘전진당 연정’을 발족하고 23개 합의사항에 대한 양해각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상원의원 20여 명까지 피타 후보의 연정에 지지 의사를 밝힌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직 총리 선출에 필요한 의석 수를 확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총리를 선출하기 위한 상‧하원 합동 투표는 오는 8월 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피타 대표는 그때까지 연정 구성에 성공하고 총리에 오를 수 있을까요? 이 주의 시사맥(脈), 피타 림짜른랏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