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특강]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요. 좋은 나라, 나쁜 나라가 딱 갈라져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진실은 넓은 스펙트럼 사이 어딘가에 있고, 저널리스트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최대한 실체적인 진실에 가깝게 설명하면서 단순화되어 놓치고 있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달 19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학술관에서 ‘세계의 분쟁과 국제전문기자의 세계’를 주제로 강연한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의 말이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초청으로 저널리즘특강에 나선 그는 “분쟁의 정확한 맥락을 파악해 보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구 기자는 <문화일보>와 <경향신문>에서 30여 년 동안 일했으며, 경향신문 국제부장을 지내고 3년 전 퇴직한 후 독립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0년 후 세계사’ ‘성냥과 버섯구름’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등의 책을 냈으며 <한겨레>에 ‘구정은의 현실 지구’를 연재하는 등 신문 기고와 방송 출연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분쟁’이라는 프레임 속에 가려졌던 죽음들

구정은 기자가 세명대 학술관에서 ‘세계의 분쟁과 국제전문기자의 세계’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구정은 기자가 세명대 학술관에서 ‘세계의 분쟁과 국제전문기자의 세계’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구 기자는 언론이 무엇을 전쟁으로 부를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프레임 싸움’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거의 70년 동안 전쟁 상태였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가 이를 ‘분쟁’으로 부르면서 참상이 가려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구 기자는 “분쟁이란 용어는 실제보다 피해를 축소해, 대등한 두 집단이 갈등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지난달 7일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고 이스라엘이 반격에 나선 후에야, 세계 언론은 이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라고 명명했다.

구 기자는 직접 작성한 연표를 보여주며 이 전쟁에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설명했다. 1948년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1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고, 약 96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대재앙, ‘알 나크바’(al-Nakba)라고 부른다.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습격해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하고 200여 명을 납치해 간 것은 끔찍한 반인도 범죄지만, 그 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을 억압하고 봉쇄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구 기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거지역인 요르단강 서안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하고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동안,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저항운동 ‘인티파다’(intifada)가 일어났고, 무장정파 하마스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구 기자는 “이스라엘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무고한 시민이 있을까’하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스데롯 시네마’라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2014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할 때, 이스라엘 주민들이 스데롯 언덕에서 팝콘을 먹으며 환호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그는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수천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지만, 미국도 여러 나라에서 민간인을 살해하고 나쁜 행위를 저지르던 나라였기 때문에, ‘미국 시민으로 이권을 누려오던 이들이 과연 무고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졌다는 것이다.

구정은 기자가 강연 중 소개한 ‘스데롯 시네마’(Sderot Cinema) 사진. 2014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폭격했을 때, 이스라엘 주민들이 스데롯 언덕에서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폭탄을 보며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덴마크 기자 알란 쇠렌슨이 촬영했다. 알란 쇠렌슨 X(트위터) 갈무리.
구정은 기자가 강연 중 소개한 ‘스데롯 시네마’(Sderot Cinema) 사진. 2014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폭격했을 때, 이스라엘 주민들이 스데롯 언덕에서 가자지구에 떨어지는 폭탄을 보며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덴마크 기자 알란 쇠렌슨이 촬영했다. 알란 쇠렌슨 X(트위터) 갈무리.

그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 역사가 있다 하더라도 하마스의 반인도적 범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는 있다”며 “민간인들을 의도적으로 죽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악을 가리기 힘든 전쟁을 보도할 때 중요한 일은 ‘지금 누가 가장 아픈가’를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강대국의 책임

구정은 기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비극에는 강대국의 책임이 크다고 설명했다. 중동 분쟁의 시작은 일관성 없는 영국의 이중 행위에서 비롯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15년에 아랍인의 독립국가 설립을 인정한다는 ‘맥마흔 선언’을 해놓고 1917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국가 건설을 인정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또 한 것이다. 이 두 선언이 충돌하면서 중동의 복잡한 분쟁 역사가 시작됐다.

미국도 책임이 크다. 미국은 중동지역에 확실한 친미 국가를 확보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 행위를 묵인해 왔다. 구 기자는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의 로비 규모가 큰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행위를 미국이 묵인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냉전 시기에 이스라엘을 통해 중남미의 좌파 정부에 맞선 친미 게릴라 세력에 무기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참여한 외부 청중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이선재 기자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는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참여한 외부 청중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이선재 기자

미국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지지를 선언했다. 구 기자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스라엘을 향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은 거세질 수밖에 없으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 또한 ‘도덕적 탈출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이피(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사망한 주민 수는 지난 10일 기준 1만 1000명을 넘어섰으며, 이 가운데 어린이가 4500여 명에 이른다.

국제보도를 잘하려면 ‘데이터 삽질’ 감수해야

구 기자는 기자들이 국제보도를 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늘 강조했던 게 ‘삽질’”이라며 “기자가 어떤 사안을 잘 알기 위해서는 직접 (자료를) 찾아보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위키(온라인 백과사전)는 나의 벗, 구글링(검색)은 나의 힘, 디플(번역기)은 나의 무기”라는 말로 온라인 정보검색과 데이터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들여 찾은 정보를 활용해 사건의 범위를 공간적, 시간적으로 확장하고 지명, 인물, 무기, 사건 등을 중심으로 사안을 새롭게 조명하면 남다른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특강에 이어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오른쪽)의 사회로 질의응답이 진행되고 있다. 이선재 기자
특강에 이어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오른쪽)의 사회로 질의응답이 진행되고 있다. 이선재 기자

구 기자는 또 복잡한 국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연표를 만드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부 기자로 일하면서 늘 분쟁 지역의 지도와 함께 연표를 만들어 사안을 정리했다고 회고했다. 또 소셜미디어(SNS)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소셜미디어에는 무궁무진한 정보가 있다”며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찾아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기자들이 외신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만약 인용하려는 외신에서 어떤 보고서가 활용되었다면 해당 보고서를 직접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공개된 정보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평소에 많이 알아두는 것이 기자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정호원 씨가 분쟁 지역 취재에 따르는 안전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정호원 씨가 분쟁 지역 취재에 따르는 안전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이선재 기자.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정호원(27) 씨는 “최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언론인이 여럿 사망했다”며 “한국 기자들은 그런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구 기자는 영미권의 프리랜서 기자들은 사진 한 장, 영상 한 장면을 더 담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면이 있지만 한국의 신문기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경로를 찾는 편이라고 답했다. 구 기자는 “그러나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항상 주의해야 하며, 구급차나 병원 시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총을 든 반군이 통행료를 달라며 버스를 세웠는데,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를 내고 무사히 벗어났던 일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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