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김현지 MBC경남 PD의 ‘어른 김장하’ 제작기

“새로운 이야기는 늘 변방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걸 찾는 건 심마니처럼 지역 곳곳을 훑고 다니는 우리가 제일 잘한다. 그러니까 지역이 지역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많이 줬으면 좋겠다... 평소에 이런 울분이 쌓여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5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문화관에서 <엠비시(MBC)경남>의 김현지(42) 피디(PD)가 이렇게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초청 저널리즘특강에서 ‘진짜는 변방에 있다: 어른 김장하 제작기’를 주제로 강연한 그는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기획 과정을 소개하며 지역 언론인의 사명감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2006년 <마산MBC>에 입사한 그는 다큐멘터리 ‘낡은 집’(2015)과 라디오 다큐드라마 ‘79년 마산’(2019) 등으로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또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이틀 동안 방영된 ‘어른 김장하’로 백상예술대상 TV교양부문 작품상, 한국PD대상 TV다큐멘터리부문 작품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극장용으로 재편집돼 지난 6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다음 달 전국 영화관에서 개봉된다.

사석에서 우연히 들은 얘기, 2년 동안 공들여 기획

MBC경남의 김현지 PD가 세명대 문화관에서 열린 저널리즘특강에서 ‘진짜는 변방에 있다: 어른 김장하 제작기’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양진국 PD
MBC경남의 김현지 PD가 세명대 문화관에서 열린 저널리즘특강에서 ‘진짜는 변방에 있다: 어른 김장하 제작기’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양진국 PD

‘어른 김장하’는 경남 진주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수십 년 동안 장학사업과 지역 문화·언론·시민 활동 후원에 100억 원 이상 사재를 쓴 김장하(79) 한약사를 조명했다. 언론에 나서길 꺼리는 그를 직접 인터뷰하는 대신 김주완(59) 전 <경남도민일보> 기자를 내세워 그의 발자취를 좇았다. 김장하 선생은 평생 자가용 없이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탔지만,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 등 필요한 곳에는 아낌없이 후원했다. ‘줬으면 그만이지’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세상의 칭송을 거부했다. 다큐는 극적 장치 없이 담담하게 전개됐지만, 시청자의 반응은 뜨거웠다. ‘진짜 어른을 만났다’는 감상평이 이어졌다.

김 PD는 2019년에 사석에서 김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호기심이 생겨 조사를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김 선생이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는 얘기들 듣고, 처음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인물 다큐멘터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사라진 비운의 가수를 추적한 영화 '서칭 포 슈가맨'과 같은 형식이었다. 2년 동안 회사의 제작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 자료를 보강하면서 기획안을 발전시켜 나갔다고 한다. 그러다 2021년 새로 부임한 사장의 눈에 이 기획안이 띄었고, 제작이 결정됐다.

김 PD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으로 김주완 기자를 섭외한 것과 관련해 “김장하 선생의 후광과 위대한 업적에 짓눌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취재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기자는 30년 이상 지역 언론인으로 살면서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그만큼 적도 많고, 대쪽 같고, 자기 자신에게도 냉정한 사람이라는 점이 너무 좋았다”고 덧붙였다. 김 기자는 경남도민일보에서 편집국장을 지내고 퇴직한 언론인으로, <토호세력의 뿌리> <80년대 경남: 독재에 맞선 사람들> 등의 책을 썼다.

‘나의 호기심’과 ‘대중의 관심’ 사이 교집합 찾기

MBC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포스터. 이 작품은 한국 지상파 방송사 자체 제작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MBC경남 제공
MBC경남의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포스터. 이 작품은 한국 지상파 방송사 자체 제작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MBC경남 제공

김 PD는 작품 기획과 관련해 “내 욕망과 호기심 중에서 대중이 공감할 만한 부분을 찾아서 그걸로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막 있어 보이는 이야기, 뭔가 사람들이 같이 공분해 줄 것 같은 이야기보다는 솔직한 내 호기심과 내 분노와 내 즐거움에서 시작하는 게 그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준다”고 덧붙였다. 이어 “나의 호기심 중에서 대중이 공감할 만한 부분을 찾아서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공하는 기획의 단계로 ‘놀이처럼 기획하라’ ‘제발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라’ ‘선명한 로그 라인(한 줄 요약)을 찾아라’ ‘계속 보완하며 키워라’ ‘제발 남들에게 보여주고 소문내라’를 제시했다. 우선 자신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기획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기록해야 하며,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 정리해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김 PD는 ‘어른 김장하’의 로그 라인을 ‘꼰대를 혐오하는 시대,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어른을 기다리는 시대, 진짜 어른을 만나다’로 제시했고, 작품에서 잘 전달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PD는 “2년 동안 제작하라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딴 거 하면서 계속 수정 보완했다”며 “남들한테는 소문을 계속 내면서 ‘이건 내 아이템이니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 해놓았다”고 털어놓았다.

김 PD는 또 “거대한 주제를 잡지 말고 작고 선명한 주제를 선택하는 게 좋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장하 선생님이 왜 저렇게 좋은 일을 하셨을까’에 집중했다면 힘들게 성장한 사람이 한풀이하듯 기부한 이야기에 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이 이야기가 왜 지금 나의 심장을 두드리나’에 집중했더니 김장하라는 인물이 이 시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깊게 고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슈를 지역민의 관점으로 보기

김 PD는 마산MBC에 입사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경남 지역민들의 생활을 담은 <얍! 활력천국>의 조연출을 맡으면서 지역 언론의 역할에 관해 성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여러 마을을 돌며 가수를 초청해 잔치를 열어주고, 소소한 마을 뉴스도 전해주고, 어르신의 인생사를 미니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주는 코너 등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는 당시 어르신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포함한 다양한 정치 이슈를 이야기하는 코너도 있었다면서 “세상의 모든 이슈가 지역민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게 지역 언론이라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세명대 문화관에서 열린 저널리즘특강에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등이 김현지 MBC경남 PD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외부 청중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양진국 PD
지난 5일 세명대 문화관에서 열린 저널리즘특강에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등이 김현지 MBC경남 PD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외부 청중 등 40여 명이 참여했다. 양진국 PD

김 PD는 2015년에 ‘리얼 교양’을 내세워 ‘쑥대밭’을 제작했다. 당시 다른 방송사에서 인기를 끌던 ‘삼시세끼’ 등 농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지역을 ‘배경’으로만 활용할 뿐 농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판타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방송 제작진이 직접 농사를 짓기로 했다. 경남 함안에 10평 남짓 되는 밭을 빌려 현지 농민에게 배워가며 농사를 지었다. 김 PD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지역의 농사 이야기를 (지역에) 붙어서 하니까 좋아했고, 인근 창원과 같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텃밭에 대한 판타지(환상)를 충족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 PD는 지역방송사에 근무하는 동안 잊지 못할 기억으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취재를 꼽았다. 그는 “그때 다른 (언론사의) 중계차는 서울 덕수궁 분향소나 봉하마을 등에 지역주민의 반발로 못 들어갔지만, MBC경남의 중계차는 들어갈 수 있었다”며 “지역민과 유대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MBC경남은 봉하마을이 있는 경남 김해시를 담당하는 지역방송사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지역방송에선 ‘회사의 간판’이 될 확률이 높다

김 PD는 언론인 지망생들을 위해 지역방송사 취업과 관련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지역 방송사가 1지망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회사의 간판이 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지역방송의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중앙의 큰 조직에서 일하면 ‘남이 기획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도 많은데, 지역에서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작품이 회사의 간판 프로그램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는 “지역방송사에 지원할 때는 해당 지역의 역사와 최근 이슈, 숙원 사업 등에 관해 사전 조사를 해서 맞춤형 기획안을 준비하고 해당 방송사의 간판 프로그램을 보완할 아이디어를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김동연(30) 씨는 “(지역 프로그램을 만들 때)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지역 프로그램에) 메시지까지 담아서 전달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김 PD는 “지상파 방송이나 넷플릭스와 같이 거대 자본이 하는 것을 크기만 줄여서 하는 것은 시장에서 전혀 매력을 못 느낀다”며 “키치(조악함)하고 어설프더라도 지역방송만이 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 보는 게 좋다”고 답했다.

강연에 이어진 질의와 답변 시간에 김동연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이 질문하고 있다. 양진국 PD
강연에 이어진 질의와 답변 시간에 김동연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이 질문하고 있다. 양진국 PD

같은 대학원생 김지영(25) 씨는 “지역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역민한테조차 가닿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며 “(지역)커뮤니티 안에서 콘텐츠가 전파력을 가지려면 기획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기획 외에 어떤 요소가 더 필요한가”라고 물었다. 김 PD는 “기획이 좋으면 팔 할은 먹고 들지만, 프로그램 기획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브랜드화나 마케팅 등의 다른 전략도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오픈메신저 등을 통해 지역민과 소통하는 <광주MBC>의 ‘본방을 보자’를 예로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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