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전북 남원 책방&페미니즘문화지구 ‘살롱드마고’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 발표된 <지역×청년×여성의 여성주의 실천 경험에 관한 연구-‘충전소’를 만들고 ‘기피시설’로 여겨지다>에 따르면, 페미니즘 단체는 지역에서 일종의 기피시설로 여겨진다고 한다. 실제로 지역 공무원들은 여성주의 단체에 대해 단체 정관을 수정하라고 요구하거나 타 부서로 일을 돌리기도 한다. 논문에는 젊은 여성들이 모임을 하겠다는 시도 자체를 일부에서는 ‘꺼려지는 일’로 여긴다는 내용도 있다.

지리산에 터 잡은 ‘문화기획달’

2013년에 전라북도 남원시에 정착한 달리(42·본명 이유진) 씨도 처음에는 비슷한 이유로 지역에서 여성운동을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만큼, 글쓰기를 비롯해 원래 하고 싶었던 문화예술활동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즈음 지인들에게 지리산에 외부인 비율이 높은 귀촌 공동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농사를 짓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 귀촌을 결심했다.

지리산 자락 산내면에 정착한 달리 씨는 글을 쓰는 등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에는 자신의 예명을 따 ‘문화기획달’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성별에 제한을 두진 않았지만, 문화 활동을 주로 하는 여느 모임이 그렇듯 여성들이 더 많이 관심을 보였고, 참여도 더 많았다. 여성이 주를 이루다 보니 마을 안에서 있었던 성희롱, 성차별 문제 등의 얘기도 자연스레 나오기 시작했다.

‘문화기획달’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발행한 계간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쓰는 여자들). 지글스 페이스북 갈무리
‘문화기획달’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발행한 계간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쓰는 여자들). 지글스 페이스북 갈무리

문화예술단체에서 여성주의 문화단체로

글을 쓰고자 모인 사람들인 만큼 글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계간지 ‘지글스(지리산에서 글 쓰는 여자들)’가 탄생했다. ‘문화기획달’의 정체성도 1년 만에 문화예술 활동단체에서 자연스레 여성주의 문화단체로 바뀌었다. ‘가부장적이고 성 역할이 분명한 시골에서 여성주의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달리 씨는 그런 모습이 반가웠다. 계몽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음에도 생활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했다.

달리 씨와 동료들은 효과적으로 여성주의 활동을 할 방법을 고민했다. 도시에서는 기자회견을 하거나 시위를 할 수 있지만, 인구가 적고 페미니즘에 관한 관심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좋아하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여성주의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쓰기를 비롯해 미술, 공예 프로그램 등에 여성주의를 접목하기로 했다. 그래서 2015년에 여성창작공간 ‘살롱드마고’를 열었다. 문화·예술이 중심이 되니 지역 주민의 참여도 많아졌다. 덩달아 산내면의 문화도 변화했다. 여성주의를 기조로 활동하는 단체도 생겼고, 남성 페미니즘 공부 모임도 만들어졌다.

살롱드마고 외부 모습. 남원시청 바로 옆 건물 2층에 있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 외부 모습. 남원시청 바로 옆 건물 2층에 있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 외부 입간판.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작게 놓여 있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 외부 입간판.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작게 놓여 있다. 김창용 기자

‘문화기획달’에서‘협동조합마고’까지

그런 ‘문화기획달’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생계 활동을 하면서 단체를 운영하는 일은 적은 인원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일과 단체의 방향을 하나로 모으자는 의견이 나왔다. 동료들과 단체의 형태를 고민한 결과 협동조합의 형태가 활동과 가장 잘 어울리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2019년, ‘협동조합마고’가 탄생했다. ‘마고’라는 이름은 창조신이자 지리산 여신이라 불리는 ‘마고할미’에게서 따왔다.

활동 지역도 산내면에서 시청 옆으로 옮겼다. 자리가 바뀌니 만나는 사람도 달라졌다. 살롱드마고라는 공간도 창작공간에서 책방으로 변했다. 자리와 사람, 공간이 변한 만큼 활동의 형태도 넓혀야 했다. 기존에 하던 글쓰기 교육을 비롯해 디자인 사업과 공간 사업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이라는 소도시에서 활동하는 만큼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갈증도 채워주고 싶었다.

살롱드마고 책방지기들이 직접 제작한 테이프와 실크스크린 노트. 테이프에 들어간 삽화는 남원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그려냈다. 실크스크린의 무늬는 지리산을 모티브로 했다. 책방지기들은 지역의 모습을 담아낸 상품들을 ‘로컬 굿즈’(local goods)라고 부른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 책방지기들이 직접 제작한 테이프와 실크스크린 노트. 테이프에 들어간 삽화는 남원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그려냈다. 실크스크린의 무늬는 지리산을 모티브로 했다. 책방지기들은 지역의 모습을 담아낸 상품들을 ‘로컬 굿즈’(local goods)라고 부른다. 김창용 기자

목표 달성을 위해 대중을 대상으로 한 모임도 만들었다. 강의도 열고, 미술 일일 강좌나 독서모임, 필사 모임도 진행했다. 참여자가 적을 때도 있지만, 많을 때는 15명에서 20명까지도 온다. 독서모임은 다른 지역 사람도 참여할 수 있도록 온라인으로 진행한다. 그런데도 전주나 광주, 구례, 곡성 등 주변 지역에서 사람이 직접 찾아온다. 달리 씨는 ‘공간의 편안한 분위기 때문에 찾아오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살롱드마고 내부 모습. 이 공간에서는 주로 교육이나 모임 등이 이루어진다. 살롱드마고 제공
살롱드마고 내부 모습. 이 공간에서는 주로 교육이나 모임 등이 이루어진다. 살롱드마고 제공
살롱드마고의 책 큐레이션 공간. 진열할 책은 달리 씨를 포함한 3명의 책방지기가 함께 고른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의 책 큐레이션 공간. 진열할 책은 달리 씨를 포함한 3명의 책방지기가 함께 고른다. 김창용 기자

마음을 열어주는 안전한 공간

달리 씨의 취미인 타로를 활용한 워크숍과 글쓰기 프로그램도 인기다. 타로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도구 역할을 한다. 타로를 뽑고 그 카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얘기하거나 글을 쓰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더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달리 씨는 ‘고요한 해방’이라는 이름의 여성 대상 글쓰기 프로그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10명이 참여하고 6개월 동안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들이 매주 모여서 글을 쓰고 자신의 글을 낭독했다. 프로그램 참가자는 ‘(자신이) 달라졌다’며 ‘이야기를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좋다’, ‘안전하고, 무슨 얘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후기도 남겼다. 달리 씨는 페미니즘에 대해 가르치거나 같이 공부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각자의 이야기만 나눠도 페미니즘을 익히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살롱드마고에서 진행한 글쓰기 프로그램 고요한 해방에서 작성된 글을 엮어 펴낸 <해방기록집>. 표지와 삽화는 화가인 모임 참석자가 직접 그렸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에서 진행한 글쓰기 프로그램 고요한 해방에서 작성된 글을 엮어 펴낸 <해방기록집>. 표지와 삽화는 화가인 모임 참석자가 직접 그렸다. 김창용 기자

살롱드마고는 최근 책방에서 하는 모임을 활성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뻔한 지역 문화센터 프로그램의 틀을 벗어나 소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활동을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책방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만큼 독서모임을 더 키우고, 시 수업도 기획 중이다. ‘살롱드마고’라는 이름처럼, 이 책방이 지역 여성들이 만나 공부하고 성장하는 곳이 되기를 책방지기들은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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