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계미자 송조표전총류’와 동의보감 등 희귀서적 기증

충북 제천시 봉양읍 들머리에 자리한 한약방이 있다. 문 앞에 다가서면 한 뼘 정도 열린 문틈 사이로 약재 냄새가 은은하다. 출입문 위로 보이는 낡은 간판에는 일부 글자가 떨어져 나간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이 한약방은 지난달 31일로 문을 연 지 40년을 맞았다. 박태기(80)·모춘상(75) 부부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오래전에 출간된 책을 틈틈이 모았다.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나온 책들이다. 그렇게 모은 고서가 무려 6200여 권. 부부는 어렵게 모은 엄청난 양의 고서를 지난해 12월 제천시에 몽땅 기증했다.

충북 제천시에서 봉양읍으로 가는 들머리에 있는 인성당 한약방. 오래된 간판에는 일부 글자가 떨어져 나간 채로 남아있다. 박시몬 기자
충북 제천시에서 봉양읍으로 가는 들머리에 있는 인성당 한약방. 오래된 간판에는 일부 글자가 떨어져 나간 채로 남아있다. 박시몬 기자

봉양면의 유일한 한약업사

박태기 씨는 1943년 부산 한의사 가문의 12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0대 시절 박 씨는 한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다양한 약초를 손수 맛보고 향을 맡아보며 약재에 익숙해졌다.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약재를 직접 씻고 말리면서 성분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었다”고 박 씨는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에도 그는 서울 광화문에 있던 한약건재상에서 약재를 만지고 팔았다. 1978년 지인의 소개로 모춘상 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약재상에서 일할 때였다.

6년 뒤인 1984년 3월 31일 부부는 봉양으로 내려와 인성당한약방을 열었다. 직전 해 12월 박 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진 한약업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국가에서 시행한 한약업사 자격 관련 시험은 없었다. 한약업사들의 끈질긴 요구로 그해 11월 의원과 약국이 없는 지역인 ‘무의약면(面)’ 별로 1명씩을 선발하는 한약업사 자격시험이 치러졌다. 한약업사가 될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였던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응시 자격도 까다로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이상 한약 취급업무에 종사한 경력이 필요했다.

한약방을 운영하며 수집한 6200여 권의 고서를 제천시에 기증한 박태기, 모춘상 부부. 박시몬 기자
한약방을 운영하며 수집한 6200여 권의 고서를 제천시에 기증한 박태기, 모춘상 부부. 박시몬 기자

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은 모 씨였다. 그는 우연히 <동아일보>에서 ‘한약업사 자격시험’이 1983년 11월에 시행된다는 소식을 봤다. 남편이 오랜 시간 한약재를 다뤄온 것을 지켜봤던 모 씨는 박 씨에게 한약업사 시험을 보도록 권했다. 당시 면이었던 봉양에서도 한 명을 뽑았다. 무전여행으로 제천을 다녀간 적이 있던 박 씨는 봉양(鳳陽)의 ‘봉(鳳)’ 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 기억났다. 가서 ‘봉(황)이나 잡자’는 생각으로 봉양을 선택했다. “마지막 시험이고 집사람이 자꾸 보라고 하는데 안 보면 그렇잖아요”라고 박 씨가 말했다.

박 씨는 <동의보감>과 <의학입문>, <본초강목> 등을 공부해 필기시험에 통과했다. 50종 이상의 한약재 감별 능력을 평가하는 실기시험도 어려움 없이 통과했다. 만점을 받았다. 전국 550여 명의 최종합격자 명단에 박 씨도 이름을 올렸다. 마흔 살의 박 씨는 봉양면의 유일한 한약업사가 됐다. “남편이 저를 만난 게 봉 잡은 거예요”라며 모 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침 7시부터 환자들이 한약방 문을 두드리면 하루가 시작됐다고 박 씨는 회상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한약방을 찾아왔다. 사소한 감기부터 다리와 허리 통증 등 증상도 다양했다. 박 씨는 “의학서적에 나와 있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여러 약재를 다뤄 약을 지었다”고 말했다. 당시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많아 약값도 저렴하게 받았다. 약의 효험을 본 환자들이 늘면서 한약방이 입소문을 탔다. 지금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전국 각지의 단골손님이 인성당한약방을 찾아온다.

박태기 씨가 인성당한약방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박태기 씨가 인성당한약방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우리 역사 담긴 고서...유출 안 되게 붙잡아놔

한약방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씨 부부의 고서 수집이 시작됐다. 종갓집 화장실에서 고서를 쌓아놓고 휴지로 쓰는 것을 박 씨가 목격하면서였다. 그는 “당시 도자기와 같은 공예품에 비해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며 “고서가 휴지 조각이 돼 우리 역사가 사라지는 일을 막고 싶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내 모르게 박 씨가 고서를 사들였다.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할아버지의 영향도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박시목(1894~1945) 씨는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감찰원으로 활동했다. 대구 팔공산에서 위장 광산을 경영하며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았다. 1942년에 해외 독립군과 합류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지만 이듬해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45년 8월 15일 베이징 감옥에서 막내아들인 박희규 씨와 순국했다. 희규 씨는 박 씨의 삼촌이다.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자란 박 씨에게 역사는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다만 박 씨가 전국을 돌며 고서를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주 6일 한약방을 운영하며 일요일 하루만 쉬었기 때문이다. 주로 고서를 가진 판매업자가 박 씨에게 살 의사가 있는지 전화로 물어왔다. 거래는 판매업자가 박 씨를 조용히 찾아와 이뤄졌다. 그가 고서를 모은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찾아오는 판매업자도 늘었다.

모춘상 씨가 인성당한약방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모춘상 씨가 인성당한약방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사들인 책이 점점 많아지자 모 씨도 이를 알게 됐다. 그도 곧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 씨도 결혼 전 광화문에서 무역대리업인 ‘오퍼상’에서 일하며 우리나라의 유물 꾸러미가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고서를 모을 수 있는 대로 다 샀다. 특정한 서적을 따로 모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돌아다니는 고서를 어떻게든 잡아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몇백 년이 지나가도 이 고서들과 똑같은 게 나올 수가 없잖아요”라고 모 씨가 말했다. 10여 년 전에는 도난당한 고서인 줄 모르고 샀다가 그동안 모아온 서적 일부가 검찰에 압수되는 일도 있었다. 검찰 조사 뒤에 문제가 된 고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돌려받았다. 고서를 모아온 40년 동안 한약방 2층 공간과 집, 그리고 다른 주택 한곳이 차츰 책으로 가득 찼다.

모춘상 씨는 그동안 수집한 고서를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아 관리했다. 그 덕분에 고서가 훼손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 씨가 제공한 사진을 모았다. 모춘상 제공
모춘상 씨는 그동안 수집한 고서를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아 관리했다. 그 덕분에 고서가 훼손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 씨가 제공한 사진을 모았다. 모춘상 제공

이렇게 모은 고서 중에 일부는 이미 문화재로 등록했다. 2007년 부부는 제천시에 송조표전총류 권8~10과 의학입문에 대해 문화재가 될 만한 것인지 문의했다.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그해 송조표전총류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로, 의학입문은 제286호로 지정됐다.

박태기·모춘상 부부가 기증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 송조표전총류. 제천시청 제공
박태기·모춘상 부부가 기증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7호 송조표전총류. 제천시청 제공

송조표전총류(宋朝表箋總類)는 국가의 의전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표(表)와 전(箋)을 작성하는 데 참고하기 위해 송나라의 표전 중 모범이 될 만한 것을 모아 조선 전기에 편찬한 책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금속 활자인 계미자로 찍어낸 희귀본으로 조선 초기 조판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서울대학교에 있는 권7은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권6~11은 보물로 지정됐다.

박태기·모춘상 부부가 기증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6호 의학입문. 제천시청 제공
박태기·모춘상 부부가 기증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6호 의학입문. 제천시청 제공

의학입문(醫學入門)은 중국 명나라 때 ‘이천’이 지은 한의학 서적이다. 동의보감보다 30여 년 일찍 출간돼 동의보감 편찬에 인용됐고 조선시대 의사 선발시험의 기본과목으로도 채택됐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활자 주조술과 조판술 발달사를 알 수 있다.

영구 보존하려 기증...희귀자료 더 나올 수도

이 책들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고 부부는 판단했다. 지난해 모 씨가 여든을 앞둔 박 씨에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며 정리를 권했다. 한평생 모아온 고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부부는 고민했다. 그러다 제천시 문화예술과에 학예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시에 기증하는 것이 고서를 영구적으로 보존하는 방법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기증한 고서를 필요한 사람이 언제든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지난해 12월 제천시에 그동안 모았던 고서를 기증했다. 같은 달 부부는 제천시 문화예술과 직원 5명과 사흘에 걸쳐 서적을 정리했다. 그동안 모은 책은 모두 6200여 권이었다. 박 씨 부부도 그동안 모은 서적의 양을 그날 처음 알았다. 손수 서적을 정리했던 모 씨는 “떠나보낼 때는 섭섭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씨는 “이미 기증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우리가 관여할 게 아니고 시에서 알아서 잘 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22일 제천시청에서 열린 유물 기증식에서 박 씨 부부가 김창규 시장에게 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제천시청 제공
지난해 12월 22일 제천시청에서 열린 유물 기증식에서 박 씨 부부가 김창규 시장에게 고서를 전달하고 있다. 제천시청 제공

부부가 기증한 고서는 현재 가인수 상태로 제천시청 수장고에 보관된 상태로 박물관및미술관진흥법에 따라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수증평가는 기증자가 문화재나 예술품 등을 기증할 때 이를 관리할 당국에 제공하기 전에 기증물의 가치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절차다. 6200여 점의 고서 가운데 현재까지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에서 200여 점을 심사했다.

지난 2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에서 기증유물 200여 점을 평가했다. 제천시청 제공
지난 2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충청북도문화재위원회에서 기증유물 200여 점을 평가했다. 제천시청 제공

위원회는 고서들 가운데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송조표전총류에 대해 국가문화재 승격을 신청해보라고 권했다. 동의보감과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도 다른 기관에 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나왔다. 위원회는 동의보감과 농사직설도 국가문화재 지정 신청을 권했다.

제천시, “고 이건희 회장 기증 사례 다음으로 많은 양”

제천시 문화예술과에 따르면 유물 기증 정보를 공개한 박물관과 기관을 조사한 결과, 박 씨 부부가 기증한 고서의 양은 2021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이 수집품 2만 3천여 점을 국공립 기관에 기증한 사례 다음으로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제천시청 강진원 학예사는 “이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새로 차릴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고 말했다.

강 학예사는 “앞으로 1년 동안 심사가 이뤄질 남은 6000여 점 가운데서도 희귀자료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수증평가가 끝나면 시에서 고서를 인수해 시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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