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 미디어비평

김순악 할머니는 열여섯 살의 나이에 일본 위안부로 끌려갔다. 동네 아저씨를 따라 대구의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공장이 아니라 대구의 한 소개소로 넘겨졌다. 업자들은 화장을 시키고 옷을 해 입혀서 그녀를 일본군에 팔아넘겼다. 다음 행선지는 중국의 내몽고 장가구였다. 그곳에서 1년 넘게 일본군을 상대했다. 일본군의 패전 소식이 들렸다.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무작정 화물열차를 얻어 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한국 광복군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수수를 물에 갈아 먹으며 겨우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나이 갓 열여덟 살이었다.

박문칠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는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전쟁 같은 삶을 담았다.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받았다. 출처 인디플러그
박문칠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는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전쟁 같은 삶을 담았다.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을,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받았다. 출처 인디플러그

그동안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위안부 피해자를 ‘역사적 아픔’으로 함축했다. 영화 <귀향>은 일본군의 꼬임에 속아 전쟁터로 끌려간 소녀들의 아픔을 핍진하게 묘사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은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27년간 투쟁했던 할머니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는 천진한 소녀 혹은 투쟁하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익숙하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기억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히는 데 필요치 않은 서사다. 박문칠 감독은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 시기에 주목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보드랍게>는 전쟁이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온 뒤 김 할머니의 삶을 다룬다.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어”

정신대시민모임의 안이정선 대표는 1990년 가을에 처음 김 할머니를 만났다. 당시에도 할머니의 상처는 채 아물지 않았다. 가시가 잔뜩 돋은 할머니에게 선뜻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안이 대표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해주자 할머니의 내면에 깊이 박힌 가시도 하나둘 뽑혀 나갔다. 어디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나라가 가난하고 자신이 못 배워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자책했다. 공감과 위로의 힘으로 김 할머니는 속에 감춰뒀던 말들을 꺼내놨다. 그 증언은 ‘내 속은 아무도 모른다카이’로 발간됐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화는 세세히 기록된 아카이브를 토대로 제작됐다. 박문칠 감독은 자료에서 전쟁 이후 할머니의 삶이 특히 아프게 느껴졌다고 제작 소회를 밝혔다. 출처 일일사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화는 세세히 기록된 아카이브를 토대로 제작됐다. 박문칠 감독은 자료에서 전쟁 이후 할머니의 삶이 특히 아프게 느껴졌다고 제작 소회를 밝혔다. 출처 일일사

“사람을 이렇게 좀 만내서 이런 얘기를 하는데 통하는 데가 없으니께네. 내가 이야기를 해도 ‘어이구 그랬구나! 하이구 참 애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

대단한 말도 아니었다. 단지 그동안 애먹었다, 이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에게 보드랍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도망칠 땐 갈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조선 땅을 밟았을 때도 그랬다. 그땐 성폭력이란 말도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순결을 버렸다는 이유로 피해자는 영원히 손가락질받았다. 고향의 어머니와 동생들도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이제 갓 열여덟 살. 그녀가 경험한 세계라고는 경산의 강과 들, 그리고 위안소가 전부였다. 결국 서울의 한 유곽을 찾아 성매매를 시작했다. 미군의 기지촌에서 ‘색시 장사’(여자들을 두고 술이나 몸을 팔게 해 돈을 버는 장사)도 했다. 오갈 곳 없는 삶, 경험에 의지해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다. 칙칙한 톤에 간결한 그림체는 담담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그녀의 삶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사회가 강요했던 ‘순결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벗기기 위한 노력이다. 출처 인디플러그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된다. 칙칙한 톤에 간결한 그림체는 담담하게 느껴진다. 영화는 그녀의 삶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사회가 강요했던 ‘순결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벗기기 위한 노력이다. 출처 인디플러그

그렇게 자신이 당한 일이 뭔지도 모른 채 수십 년 세월을 묵묵히 견뎠다. 피해자이지만 피해 사실을 말하기 껄끄러웠다. 1992년 3월,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 그 이듬해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다. 이제야 한국 사회가 위안부 피해 사실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여전히 외로웠다. 국가와 국민들은 이들이 ‘순결한 피해자’이길 바랐다.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끌려갔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살아왔다는 순백의 개인사를 요구했다. 김 할머니는 공식 석상에서 유곽과 색시 장사 경험을 고백하지 않았다. 기지촌에서 낳은 둘째 아이도 남의 아이를 거둬 키운 것이라고 속였다. 절대 보드랍지 않을 현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게 발언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안이 대표는 “괜찮다고” “그동안 욕봤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보드랍게 피해자를 위로했다. 피해자를 탓하는 시대적인 착오 속에서 작은 위로는 큰 변화를 낳았다. 위로가 세력을 넓혀 위안부 피해자 모임을 만들었다. 서로 연대하고 지지하며 ‘피해자다움’을 드러낼 용기를 줬다. 그제야 김 할머니도 “그동안 힘들었다고” “알아줘서 고맙다고” 용기를 냈다. 악착같이 살다 보니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고 고백했다. 빈곤은 여성의 주체성을 빼앗고, 주체를 빼앗긴 여성은 누적된 경험에 갇혀 또 다시 성매매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삶의 형태를 빚고 싶어도 마음처럼 쉽지 않다. 사회가 이들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탓이다.

2016년부터 국내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발을 국내 첫 미투 운동으로 보는 시각도 이때 생겨났다. 성폭력 문제는 여전히 피해 여성의 ‘피해자성’을 빼앗으며 2차 가해로 이어지고 있다. 소름 끼치도록 닮은 과거와 현재는 피해자들의 아픔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여성들은 김 할머니가 고백한 것처럼 용기를 내고 있다.

과거가 현재에게 건네는 위로

“김순옥, 김순악, 왈패, 사다꼬, 데루코, 요시꼬, 마시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주정뱅이, 개잡년, 깡패 할매.”

김 할머니가 증언을 통해 스스로 언급한 호칭들이다. 원래 그녀의 이름은 김순옥이었다. 호적에 올릴 때 ‘옥’ 자는 양반집 자제나 쓰는 것이라는 지적에 급히 바꾼 이름이 김순악이었다. 위안부로 끌려갈 때는 왈패와 사다꼬, 다시 조선 땅을 밟고 나서는 악착같이 살다 보니 이런저런 호칭이 수시로 붙었다가 떨어졌다. 영화는 여러 여성이 한목소리로 그녀의 호칭들을 부르는 오디오로 시작한다. 하나하나 호칭을 읊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이름 ‘순악’으로 뭉쳐진다. 자신의 이름이 온전히 불리지 못했던 삶이었다. 그저 신분이나 역할에 따라 밀려오는 삶을 숙제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을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불러준다. 현재를 살아가는 피해자들이 그녀에게 처음 건네는 위로의 손길이다.

성폭행 피해 여성들은 김순악 할머니의 증언을 낭독한다. 그녀의 말맛을 살릴 수 있는 대구 지역 출신의 여성들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이 시공간을 넘어 그렇게 연대한다. 출처 인디플러그
성폭행 피해 여성들은 김순악 할머니의 증언을 낭독한다. 그녀의 말맛을 살릴 수 있는 대구 지역 출신의 여성들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이 시공간을 넘어 그렇게 연대한다. 출처 인디플러그

김 할머니는 평화와 인권을 위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종잣돈 5,413만 원을 기부했다.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한 후원에도 같은 금액을 기부했다. 식모살이하며 모은 돈에 생활지원금을 차곡차곡 모은 돈이었다. 할머니의 정성으로 건립된 대구의 역사관에 성폭력 피해 여성 세 명이 모였다. 이들은 김 할머니의 증언을 담담하게 낭독했다. 순조롭게 흘러가던 낭독은 일정 부분에서 턱턱 막히며 이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다. 그녀가 유곽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한 피해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다른 피해자는 오히려 이해가 됐다고 말한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이었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과거 할머니가 겪었던 아픔을 직접 낭독하며 느낀 감정은 동병상련이다. 지금도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살아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 여성 피해자는 주변에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회사 내 성폭행을 고발했는데, 사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성폭행 사실을 꾸며냈다는 의심이었다. 또 다른 피해자는 미투를 결심했을 때 가족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미투까지 해야 하느냐는 핀잔이었다. 박혜정 씨는 사건을 겪은 지 10년 만에 처음 미투를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혜정아, 힘들었지” “고생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며 눈물을 떨궜다. 보드랍게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김 할머니의 바람은, 그동안 공허하고 무기력했다. 수십 년 세월을 무기력하게 살아온 뒤에야 누군가 말을 걸어줬다. 혜정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 역시 무기력하게 지나온 세월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자신의 힘들었던 기억과 힘들었을 할머니의 과거가 함께 밀려온다. 피해 여성들은 이렇게 할머니의 삶을 낭독하며 눈물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를 얻기도 한다.

한 피해자는 스쿨 미투 행진에 참여했던 기억을 할머니의 감정에 이입했다. 자신도 스쿨 미투를 준비하며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 인디플러그
한 피해자는 스쿨 미투 행진에 참여했던 기억을 할머니의 감정에 이입했다. 자신도 스쿨 미투를 준비하며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출처 인디플러그

영화는 우리가 잊고 있던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피해 여성들이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우리는 그동안 질문하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그 질문에 ‘보드랍게’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미투에 나선 여성들을 두고 우리 사회는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 동안 뭘 하다가 인제 와서 갑자기 세상에 나서느냐며 냉담한 시선을 보낸다. 오히려 가해자를 옹호하는 모순된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졌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가해자인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맑은 분’이라고 칭했다. 피해자를 향한 사회의 냉대는 이들을 결코 용기 낼 수 없는 순응의 삶으로 인도한다. 보드라운 위로가 필요한 이유다.

이제부터라도 보드랍게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이었다. 다음 날인 8월 15일은 광복절 77주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한일 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윤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만약 한일 관계의 미래가 어둡다면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건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윤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그저 과거에 박제된 기록, 현재의 우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로 여기는 듯하다. 과거에만 머무는 기억은 없다. 영화 <보드랍게>가 현재의 여성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서로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 것처럼,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되면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김 할머니의 아픔은 현재를 살아가는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게도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의 아픔이기도 한 것이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겪은 아픔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집이 가난해서 공부할 여건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다. 글자를 배우고 삐뚤빼뚤 적은 말은 ‘내 하나 죽어가 나라가 잘되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우리나라가 잘 살아야 젊은 사람들이 살기 좋다는 이유였다. 자신을 냉대한 사회이건만 그녀의 마음은 사람을 향했다. 사람을 향하는 보드라운 마음. 그것이 그녀가 세상에 전하는 위로였다. 이제라도 우리가 그녀에게 보드라운 마음을 전해야 한다. 과거의 아픔은 지금, 이 순간의 아픔과 무관치 않다. 과거를 향하는 위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피해자에게도 큰 힘이 된다. 지금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연대하고 있다. 이들이 그들만의 연대로 싸우다 지치지 않도록 지지해야 한다. 김 할머니를 제대로 위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한일 관계의 미래가 잠시 꼬일지라도 과거사 문제는 반드시 사과받아야 마땅하다. 과거는 현재다. 과거를 제자리로 매김하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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