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그래픽 노블 '눈, 물'

“겨울밤, 여자는 어쩌다 눈아이를 낳았다”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일까. 눈을 닮은 아이는 품에 안으면 녹아 내렸다. 여자는 자신의 온기로 인하여 아이가 녹아 내릴까 두려웠다. 자신의 온기가 아이에게 닿지 않도록 아이와 여자 사이에 눈으로 만든 담을 쌓아 올렸다. 시간이 지나고 봄과 함께 초록이 다가왔다. 문틈 사이로 초록이 들어오자 아이가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문틈으로 밀려드는 온기를 막았다. 그때 ‘언제나 겨울 선착순 무료체험’이라 적힌 전단지가 왔다. 여자는 아이에게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언제나 겨울’이라는 것을 찾아 도시로 떠났다.

<눈, 물>에서 여성이 낳은 아이는 체온이 닿으면 녹아내린다. 책 속 여자는 녹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살아간다. ©창비
'눈, 물'에서 여성이 낳은 아이는 체온이 닿으면 녹아내린다. 책 속 여자는 녹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살아간다. 출처 창비

따뜻한 온기와 봄으로 표현한 위협

안녕달 작가는 <수박 수영장>, <할머니의 여름휴가>, <당근 유치원> 등 어린이를 대상으로 그림책을 통해 사랑스러운 판타지를 만들어왔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이 어린이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며 동심을 자극했다면, <눈, 물>은 어른들에게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화려한 도시의 이면을 보여주며 충격을 선사하고 있다. 작품에서는 따뜻한 봄이 되어 다가와 퍼지는 초록이 녹아서 사라져버리는 아이의 생존을 위협한다. 초록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는 존재지만, 녹아서 사라지는 아이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다.

아이를 위협하는 초록과 온기를 막기 위해 여자는 ‘언제나 겨울’을 구하러 밖으로 나선다. ©창비
아이를 위협하는 초록과 온기를 막기 위해 여자는 ‘언제나 겨울’을 구하러 밖으로 나선다. 출처 창비

여자는 광고지에 적힌 ‘언제나 겨울’이라는 곳을 찾아 초록 들판을 지나고, 쓰레기로 가득한 쓰레기장을 지나 도시로 향한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는 어두운 회색 벽에 에어컨 실외기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회색 벽 사이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온다. 알록달록 총천연색으로 화려한 불빛은 회색 빛으로 뒤덮인 벽들과 대조적이다. 여자가 만난 도시의 모습은 사람의 욕망을 보여준다. 화려한 명품을 보여주는 백화점과 건물 벽면에 ‘모두 가질 수 있어요’라는 문구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여성과 아이에게는 위협이 되는 따뜻한 온기를 도시에서는 뜨거운 여름 당신을 위한 ‘PARADISE’라 말한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광고에선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해수욕장에서 수영복만 입은 채 웃고 있다.

여자와 아이에게는 위협이 되는 온기를 도시 속 광고에서는 뜨거운 여름 당신을 위한 ‘파라다이스’라 표현하고 있다. ©창비
여자와 아이에게는 위협이 되는 온기를 도시 속 광고에서는 뜨거운 여름 당신을 위한 ‘파라다이스’라 표현하고 있다. 출처 창비

여자는 맨발로 도시를 달렸다. ‘언제나 겨울’을 찾아 아이에게 돌아가기 위해. 간신히 ‘언제나 겨울’을 만났다. ‘언제나 겨울’은 이글루 모양을 한 작은 냉장고 같았다. 무료체험 이벤트가 끝난 뒤였다. 여자는 ‘언제나 겨울’을 구매할 수 없었다. ‘언제나 겨울’을 눈 앞에 두고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은 ‘언제나 겨울’을 사기 위해 돈을 구해야 했다.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의 노동

외지인인 여자가 돈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자는 웃으면서 다가오는 대부업체들을 뿌리치고 신분증이 필요하지 않은 일을 구한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고, 인형 탈을 쓰고 전단지를 돌리고, 건물을 돌아다니며 화장실 청소를 했다. 여성이 한 일은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매일 같이 노동을 반복했지만 ‘언제나 겨울’은 살 수 없었다. 노동으로는 목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으나 ‘언제나 겨울’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여자는 새벽에는 우유 배달을, 낮에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와 같은 노동으로는 목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출처 창비
여자는 새벽에는 우유 배달을, 낮에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와 같은 노동으로는 목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출처 창비

시간이 지나 계절은 여름이 됐다. 여자는 전자제품 판매점 앞에서는 에어컨 탈을 썼고, 도시 한복판에서는 아이스크림 탈을 썼다. 더위로 녹아 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여자는 이런 노동으로는 ‘언제나 겨울’을 평생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상점으로 달려가 유리창을 깼다. 발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언제나 겨울’을 훔쳐 집을 향해 달렸다. 눈으로 된 아이는 이미 녹아 작은 물웅덩이가 되어 있었다. 여자는 녹아 내린 아이를 ‘언제나 겨울’ 속에 넣는다. 그리고 ‘언제나 겨울’을 끌어안고 아이에게 불러주었던 자장가 ‘섬집아기’를 불러준다.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언제나 겨울’은 상점에서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여성은 살 돈이 없다. 여성은 ‘언제나 겨울’을 훔쳤다. 출처 창비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언제나 겨울’은 상점에서 살 수 있지만, 가난한 여성은 살 돈이 없다. 여성은 ‘언제나 겨울’을 훔쳤다. 출처 창비

안녕달 작가는 <눈, 물>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가난한 자의 고통과 눈물을 그려냈다. 만연한 소비가 이루어지는 화려한 도시와 화려한 도시에 속하지 못하는 여자를 극명하게 비교한다. ‘모두 가질 수 있어요’라는 문구로 도배된 도시는 “늦기 전에” 성장, 교육, 결혼, 투자 등을 강조했다. ‘꿈의 캐슬’ 청약 당첨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하였다. 아이의 생존을 위해 “늦기 전에” 돈을 벌어야 했던 여자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경계 바깥에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나에게는 눈아이와 여자는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아동을 키우는 엄마로 보이기도 하고, 아이를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미혼모나 편부모 가정으로 보이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다정하고 따뜻한 초록과 온기가 여자와 아이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남들처럼 살아가기 어려운 가정의 현실을 표현한 것 같았다.

<눈, 물>은 경계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리얼하게 그려내 보여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가감없이 그려냈다. 새벽에는 우유 배달을 하고, 밤에는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지, 그들도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는지를 여자와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삶의 무게는 모두에게 동등하지 않다.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얻기 위해서는 매일 같은 투쟁을 해야 했고, 장애인들의 학습권을 얻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해야 했다. <눈, 물>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언제나 겨울’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눈물겨운 모습을 따뜻하면서도, 가슴 저리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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