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노동자 두 번 울리는 산재보험] ① 난관투성이 신청과 승인 과정

산업재해보상보험은 일터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병을 얻은 노동자가 제대로 치료받고 직장에 복귀하거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제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산재를 감추려는 기업과 까다로운 입증을 요구하는 근로복지공단에 맞서 피해 노동자가 보상을 받는 과정이 험난한 경우가 많다. 특히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직 등 사각지대의 불안정노동자들은 ‘높은 재해 위험’과 ‘낮은 산재 보호’라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단비뉴스> 특별취재팀은 이런 불안정노동자들의 현실을 현장취재를 통해 조명하고,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대안을 모색했다. 이 시리즈는 뉴스통신진흥회 주최 제 3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됐으며, <연합뉴스>에서 [구멍난 산재보험] 특집으로 4회에 걸쳐 보도됐다. (편집자)

② 사고 감추려 회유, 압박, 따돌림까지

③ 플랫폼 노동 사고 늘어도 보험은 배제


지난해 10월 9일 저녁 6시 30분쯤, 강원도 영월군 북면의 한 주택에서 이진철(50·가명) 씨가 어둠이 내린 거리로 나왔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얻은 그가 집 밖으로 나선 것은 사흘 만이었다. 검은색 야구모자를 쓰고 바닥을 바라보며 터덜터덜 약속장소로 걸어 온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황 증상이 심해 매주 한 번씩 병원에 갈 때 빼고 집에만 있어요. 사람들과 마주하는 게 힘들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인적 드문 길로만 걸어왔죠.”

이 씨는 지난 2013년 영월군 환경시설관리사업소에 입사해 무기계약 공무직으로 7년 동안 일했다. 그동안 상급자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고 지난해 8월 산업재해 요양급여를 신청한 뒤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7년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공황장애와 난청까지 

▲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이진철 씨. 직장 내 괴롭힘과 산재 신청과정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 윤재영

이 씨는 입사 직후부터 상급자인 정규직 7급 공무원 김성호(가명) 씨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 씨에 따르면 김 씨는 근무 중에 툭하면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걷지 말고 뛰어다니라’고 다그쳤다. 지난 2019년 11월에는 김 씨에게 멱살을 잡힌 채 강제로 구석진 장소로 끌려가고, ‘흉기로 찔러버리겠다’ 등의 폭언을 들었다. 이 씨는 퇴근 후나 쉬는 날에도 김 씨가 수시로 전화를 거는 통에 사우나탕에 들어갈 때도 전화기를 들고 가야 했다고 말했다. 새벽 근무 중에는 조금만 졸아도 경위서를 썼다. 심지어 김 씨는 이 씨가 새벽에 졸지 못하게 한다며 건물에 있는 사이렌을 10분마다 울리도록 예약을 해두기도 했다. 요란한 소리에 지속적으로 시달린 이 씨는 난청 진단까지 받았다. 어느 때인가부터 폭언을 듣고 부당 지시를 받으면 바지에 소변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증상까지 생겼다. 불면증으로 하루 두어 시간밖에 못 자는 날도 많았다. 

견디다 못한 이 씨는 김 씨가 자신을 끌고 가는 장면을 담은 폐쇄회로(CC)TV 영상을 휴대전화로 몰래 찍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산하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 민주연합노조는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행정사무보조원 등 자치단체·공단·공사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이 가입한 조합이다. 노조가 진상조사를 거쳐 영월군에 피해자 구제를 요구하고 군청 앞에서 천막농성과 집회까지 한 끝에, 이 씨는 지난해 6월 1년간의 병가와 병원비 지급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가해자 김 씨는 감봉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이 씨는 “지금도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꾸고,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 이진철 씨가 몰래 휴대폰으로 촬영한 폐쇄회로(CC)TV 영상 장면(왼쪽). 상급자 김 씨가 이 씨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는 모습이다. 오른쪽은 이 씨가 새벽 근무를 할 때 김 씨의 조작으로 10분마다 소리가 울리던 사이렌. 그 소리 때문에 이 씨는 난청 진단을 받았고, 이에 관한 산업재해도 신청했다. ⓒ 민노총 전국민주연합노동조합

진단도 입증도 노동자 책임... 피 말리는 산재 신청

이 씨가 2019년 11월 노조에 도움을 청한 후 질병 진단까지 받고도 곧바로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한 것은 ‘본인 입증 책임’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과 정신질환의 관련성을 증명할 자료를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5개월 동안 의사 소견서, 괴롭힘 피해 진술서, 동료 진술서, 가해자 진술서, 피해 구제에 관한 영월군과의 합의서를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이 씨에게는 피 말리는 시간이었다. 공황 증상 때문에 처음 병원에 간 날, 그는 진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7년간 겪은 괴롭힘을 의사에게 설명하기 힘들어 2시간 동안 눈물만 흘리다 돌아왔다.

직장에서 병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동료 진술서가 필요했지만, 가해자 김 씨와 계속 일해야 하는 동료들은 모두 거절했다. 지난해 3월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는 동료 20여 명이 이 씨가 CCTV 영상을 갖고 외부의 도움을 찾으러 다닌 것을 거론하며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일부 동료는 따로 이 씨에게 전화를 걸어 ‘김 씨와 계속 직장에서 봐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이 씨는 일을 그만둔 옛 동료에게만 겨우 진술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씨가 전국민주연합노조 강원지부의 도움을 받아 ‘직장 내 괴롭힘이 맞다’는 영월군의 인정과 치료비 지급, 병가 제공 등의 약속을 받아 내는 데 5개월이나 걸렸다. 영월군 측은 <단비뉴스> 전화 통화에서 “합의할 때 피해자가 요구하는 것을 최대한 수용했다”며 “가해자를 징계하고, 공무직 근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공무원 복지팀을 신설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씨의 고행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집한 입증 자료를 근거로 지난해 8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지난해 11월에야 이 씨가 일하던 현장을 조사했다.

이 씨는 “산재 승인까지 최소 8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다”며 “당장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살고 싶지만, 심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못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씨 같은 무기계약직을 포함, 직장 내 발언권이 약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하청노동자, 플랫폼노동자 등 불안정노동자들은 일하다 다치거나 질병을 얻었을 때 산재를 신청하고 승인받는 과정에서 정규직보다 훨씬 큰 어려움과 설움을 겪는다. 

‘헬스장 출입’ ‘연장 근무’ 이유로 산재 부인   

“첫째, 일하다가 다칠 수 없는 신체 부위다. 사내 헬스장에 출입하더니 운동하다 다쳤을지도 모른다. 둘째, 아프다는 사람이 쉬지 않고 일했다. 셋째, 연장근무를 스스로 많이 했다.”

대형제철소인 A사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정민수(28·가명) 씨가 지난해 4월 산재를 신청한 뒤 통보받은 회사의 ‘산재 불인정 사유’다. 그는 6년 동안 작업장에서 70~100킬로그램(kg)에 달하는 철스크랩(철강부산물)을 옮기는 일을 반복하다 허벅지 부근 고관절 근육이 찢어졌다. 의사 소견서를 근거로 산재를 신청하자 근로복지공단은 회사가 위 이유를 들어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

정 씨는 “회사가 말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사내 헬스장에 간 것은 코로나19 확산이 본격화하기 전, 러닝머신을 30분 정도 사용한 게 전부였다고 한다. 연장근무를 많이 한 것은 매달 70~90만 원 정도 더 벌어야 부모 용돈을 보내는 등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3월부터 걷기가 힘들 정도로 허리와 고관절이 아파도 진통제를 먹으며 계속 출근했다.

근로복지공단은 회사의 산재 불인정 이유를 전달하면서, 본인 입증 책임에 따라 재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서류를 제출하라고 정 씨에게 요구했다. 그는 신청인 의견서, 건강보험내역 10년 치, 근로 확인 서류, 진단서 등을 7시간 동안 준비했다. 100kg 정도 되는 철스크랩을 옮기는 작업 재연 영상과 사진 5개도 함께 제출했다.

반면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작업 영상을 정 씨의 업무 환경이라며 제출했다. 영상에 담긴 작업은 정 씨가 몇 년 전에 잠깐 해본 적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지난해 7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출석해 전문가 10여 명의 송곳 질문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산재 승인이 난 것은 신청 후 약 4개월 만이었다.

▲ 한 사업주가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한 보험가입자 의견서. 소속 근로자가 평소 볼링, 탁구, 등산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점을 들어 업무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 윤재영

이 제철소의 비정규직지회가 입수한 일부 사업주들의 산재보험가입자 의견서를 보면 기업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직원들의 업무관련성을 부인하려 한다. B 업체는 직원의 근골격계 질병에 관해 “평소 볼링, 탁구, 등산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점을 보았을 때 다소 업무와 무관한 원인으로 발생되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C 업체는 근골격계 질병에 관해 “(과거) 6년간 운동선수로 생활하였고 운동으로 대학진학까지 제안받을 정도였다”며 재해자가 입사할 때 중고교 시절 럭비 선수 활동 경험을 적은 자기소개서를 첨부했다. 업무가 아닌 개인적 운동으로 질병이 생겼을 것이란 뜻이다.

▲ 한 제철소 하청기업 노조 사무실 책상에 산재 피해자들의 신청 자료를 모아 놓은 서류철이 쌓여 있다. ‘본인 입증 책임’에 따라 산재 피해자들은 업무 관련성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모아야 한다. ⓒ 윤재영

절차 까다롭고 오래 걸려 산재 보상 포기도

산재 피해자는 산재를 승인받기까지 크게 세 가지 난관을 넘어야 한다. 첫째는 업무와 재해의 인과성을 입증할 자료를 수집하는 어려움이다. 이런 자료는 주로 회사가 갖고 있기 때문에 수집하기가 어렵다. 두 번째는 수많은 서류를 작성하고 근로복지공단의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산재가 최종 인정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버티는 것이다. 산재 피해자가 이런 난관을 돌파하는 것은 또 한 번 산재를 당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이 2019년 9월 국회 토론회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산재 요양부터 신청까지 절차상 어려움을 느꼈느냐’는 질문에 재해자 약 52%가 ‘매우 그렇다’, 약 30%는 ‘그렇다’고 답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약 5%에 불과했다.

‘산재 가능 여부에 관해 불확실성을 느꼈느냐’는 질문에는 약 49%가 ‘매우 그렇다’, 약 26%가 ‘그렇다’고 답하는 등 전체의 75%가 산재 인정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약 9%에 그쳤다. 산재 신청 방법을 잘 몰라서 어려웠냐는 질문에는 약 38%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이 2019년 산재를 신청한 사람 18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대다수가 까다로운 절차와 결과의 불확실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이러한 어려움은 산재 피해자가 산재 보험료 수급을 포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19년 10월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산재 피해자들이 요양급여 등을 신청하지 않는 이유와 관련해 ‘인정이 안 될 것 같아서’와 ‘산재처리 절차가 까다로워서’라는 응답이 약 33%나 됐다. 이밖에 ‘산재 신청으로 인해 회사가 받을 불이익과 정부 규제의 부담 때문’이 약 35%, ‘본인과 안전관리자 등이 인사 불이익을 받을까 봐’가 약 39%, ‘회사가 공상처리를 종용해서’라는 응답이 약 13%였다.

동료 위해 입증 자료 수집하다 벌금형도 

산재는 크게 사고와 질병 두 가지로 나뉜다. 사고가 나면 일하다가 다친 것이 비교적 명확해 산재를 신청하기 쉽다. 하지만 질병은 산재 피해자가 산재 신청부터 승인까지 최대 8단계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질병 중 신청 사례가 가장 많은 근골격계 질병을 예로 들면 ① 병원 진단을 받고 원무과에서 산재 신청 ② 근로복지공단이 해당 사건 보험 가입자(사업주)에게 관련 의견을 10일 안에 제출하라고 통보 ③ 산재 피해자에게 서류 10장 분량의 주관식 질문 작성 요청 ④ 근로복지공단 직원의 재해 현장 조사 ⑤ 근로복지공단이 자문의와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소견 받아 재해 조사 완료 ⑥ 권역별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승인 여부 심의 ⑦ 상병에 관한 논란이 생기면 상병 소위원회 개최 ⑧ 마지막으로 업무상질병판정위에서 다시 산재 심의 등 절차를 거친다.

각 단계마다 재해자가 제출한 자료는 산재를 판단하는 주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산재 피해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모습을 사진, 영상으로 촬영해 제출할 때가 많다. 이때 사업장 내 촬영을 꺼리는 사업주와 마찰을 빚기도 한다. 금속노조 D기업 비정규지회 서현수(29) 노동안전보건부장은 근골격계질병 산재 입증 자료 수집을 어려워하는 조합원을 대신해 작업 영상을 촬영하러 항만 원료 부두에 들어갔다가 건조물침입죄로 벌금형을 받았다. 초소 근무자에게 노조 직책과 영상 촬영 목적을 밝히고 출입 절차를 문의한 뒤 들어갔는데도 건조물 침입으로 신고된 것이다. 

▲ 서현수 부장은 조합원을 대신해 산재 입증 영상을 촬영하고자 신분을 밝히고 항만 원료 부두에 들어갔다가 건조물침입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다. ⓒ 윤재영
▲ 서현수 부장이 건조물침입죄로 받은 약식 명령 ⓒ 윤상은

박다혜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는 “현행법상 산재 입증 책임이 재해자에게 있어 자료 수집 등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법에는 ‘사업주가 협조해야 한다’는 규정만 있어 활용하기 어렵다”며 “사업주가 구체적으로 자료를 제공하고 증거 사진 촬영 시 사업장 출입을 허용하는 식의 의무까지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업무상 재해 신청 시 재해 입증에 필요한 자료를 사업주로부터 쉽게 제공받고 공인노무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도록 세부적 규정을 담은 산업재해보상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까다로운 심사 기준, 뇌심혈관 질병 산재 승인율 40%  

산재 피해자는 서류 파일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자료를 작성해 근로복지공단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제철소 하청업체에서 전기 정비 일을 하는 최정환(34·가명) 씨는 지난 2019년 5월 200kg 압력으로 누르는 프레스에 허리가 눌리는 사고를 당한 뒤 20개월 동안 요양 중이다. 사고와 관련한 산재 요양 기간은 한 달이었지만, 사고 트라우마로 적응 장애를 얻어 재요양 신청과 승인을 반복하며 1년 넘게 쉬고 있다. 그는 “산재 재요양을 위해 의사에게 아픈 기억을 꺼내 트라우마 증상을 반복해서 말하느라 힘들다”며 “정밀 검사와 치료가 필요한데도 병원에서는 공단이 진료비 과다 청구로 볼 거라고 꺼리고, 공단은 신청한 요양 기간을 다 축소해서 승인한다”고 말했다.

▲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산재 피해자 최정환 씨. 그는 전날 밤에도 트라우마 때문에 잠을 잘 못잤다며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 윤재영

최 씨에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요양 심사 기준은 너무 까다로웠다. 공단은 줄곧 최 씨가 신청한 요양 기간의 절반 정도만 인정했다.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주치의는 8주간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공단은 4주간 입원에 필요한 지원만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퇴원 뒤에 트라우마에 시달리자 정신과를 찾아가 자비 70만 원을 들여 적응 장애를 진단받았다. 주치의가 요양에 필요하다고 소견을 밝힌 기간은 184일이었지만, 공단은 절반 수준인 85일만 승인했다.

그래도 최 씨는 일단 산재 승인을 받았으니 다행인 셈이다.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보면 올해 9월 기준으로 뇌심혈관 질병 산재 승인율은 38.9%에 불과했다. 정신질병은 65.6%, 직업성 암은 71.1%, 근골격계는 69%였다.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했다 10명 중 많게는 6명, 적게는 3명이 불승인돼, 치료 등의 지원을 못 받았다는 얘기다. 

승인 기다리는 긴 시간 생계 위해 대출 의존 

산재 피해자는 마지막 난관으로 긴 시간 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산재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질병은 사고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난 2019년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보면 사고로 산재를 신청하고 결과를 통보받기까지 평균 17일이 걸린 반면, 직업성 암은 330일이나걸렸다. 정신질병은 181.8일, 근골격계는 116.4일, 뇌심혈관계는 105.6일이 걸렸다.

▲ 근로복지공단이 발표한 2020년 9월 기준 질병 유형별 산재 신청 건수와 승인 건수, 승인율 ⓒ 고용노동부 e-고용지표

산재 피해자는 일을 못하고 치료하며 산재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수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산재를 승인받은 뒤 휴업급여를 보상받는다고 해도 평균임금의 70%만 받기 때문에 다치기 전보다 수입이 준다. 그래서 대다수 산재 피해자들은 적금이나 보험을 해지하고, 대출을 받는다. 최정환 씨도 1년 동안 4번에 걸쳐 2천만 원을 대출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근로복지공단의 복잡한 산재 승인 절차와 느린 행정 속도를 비판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2019년 8월 산재요양 처리기간 단축을 주제로 한 국회 토론회에서 지연 이유를 ‘현장 조사와 자료 수집 등에 많은 시간이 걸리고, 산재 신청 및 질병판정위원회 심의 건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근로복지공단은 재해 조사를 하기에 앞서 산업재해보상보험 시행규칙 제20조에 따라 보험가입자인 사업주에게 해당 근로자의 산재 신청 사실을 알린다. 사업주는 10일 이내에 관련한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금속노동조합은 “근로복지공단 일선 지사에서 사주에게 한 달 이상 기간을 주며 의견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주가 의견을 제출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산재 승인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데, 사업주 의견 제출 기한을 과도하게 늘려준다는 것이다.

재해 조사를 마치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재해자가 일하다가 병을 얻은 것인지 심사한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해 1월 내놓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2019년도 심의 현황’을 보면 심의 결정 소요 기간은 평균 39.9일이었다. 2018년 29.4일에 비해 10.5일 증가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제8조는 ‘20일 이내에 심사하고, 부득이한 경우 최대 10일을 연장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늦어도 30일 안에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정해야 하는데 지난해에는 10일 가까이 늦어진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지연 이유를 판정 건수 증가로 설명했다. 2019년 판정 건수는 1만4206건으로 2018년 1만6건보다 약 40% 늘었다. 질병판정위원은 변호사, 공인노무사,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산업재해보상보험 관련 업무에 5년 이상 종사한 사람 등으로 180명이다. 한 번 위원회가 열리면 9명의 위원이 참석해야 하는데, 판정 건수가 늘어 시간이 더 소요됐다는 것이다. 국회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 2019년 국정감사에서 근로복지공단에 심사 과정 단축 방안을 마련하도록 요구했다. 

‘당연 승인’ 절차 있어도 실효 없어 

근골격계 등 업무상 질병은 원칙적으로 일정 요건을 갖추면 산재로 인정된다. 근로복지공단은 2017년 9월부터 업무상 질병을 입증하는 재해자 부담을 덜기 위해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고, 2019년 7월부터 회전근개파열 등 6대 다빈도 근골격계 질환에 적용했다. 작업 기간, 유해환경 노출량 등에 대한 인정 기준을 충족하고 반증이 없을 때 산업재해를 승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 자료를 보면 2020년 1월부터 10월까지 근골격계질병 산재 승인 기간은 평균 120.5일에 달한다. 추정의 원칙 도입 전인 2016년은 76.5일, 2017년은 84.3일 등이었는데, 도입 후 오히려 처리 기간이 늘었다. 실질적인 절차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추정의 원칙 실효성을 높여 근골격계질병 처리 과정만 간소화해도 전반적인 산재 처리 기간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2016년 이후 산재 신청된 근골격계 질병 관련 건수와 승인 여부 판정까지 걸린 기간. 2019년의 평균 기간이 2016년에 비해 2배 수준이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절차는 간소하게, 승인은 신속하게, 과정은 합당하게 

산재보험은 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받으며, 빠르게 일터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다. 그러나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단비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산재 승인 절차가 복잡하고, 승인까지 기간이 오래 걸리는 등 재해자 중심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1~2시간 정도 진행하는 재해 현장 조사를 보면 공정한지 의문”이라며 “노동자들이 매일 다른 일을 할 때도 있고, 오전과 오후 업무가 다를 수 있는데 현장 조사가 이를 정밀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일례로 급식 조리사는 보통 오전에 식재료 전 처리를 한 뒤 음식을 조리한다. 오후에는 배식과 정리를 한다. 이 경우 오전 업무가 더 힘들고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이 현장조사를 나온 시간이 배식 시간이라면 작업 내용 중 가장 부담이 안 되는 상황만 보고 간다는 것이다. 현 사무국장은 “재해자가 현장 조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때도 많고, 사업주와 마주치기 힘들어서 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며 “재해와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산재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까지 과도하게 반복되는 상병 판단 절차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질병을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대 5번에 걸쳐 10명 넘는 전문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먼저 재해자가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바탕으로 주치의에게 소견서를 받아 산재를 신청한다. 근로복지공단은 해당 지사의 자문의 소견을 의뢰한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넘어가면 판정 위원인 전문의 9명이 상병을 심사한다. 만약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지 않으면 상병 소위원회에서 병명을 검토한다. 그 뒤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산재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현 사무국장은 “정밀 진단을 해서 전문의가 확진한 병을 과도하게 반복 검토하는 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재 승인 절차가 줄어들면 기간도 짧아져요. 지금은 노동자들이 산재 보상을 받으려고 몇 개월 동안 일을 쉬고 자비로 치료하며 기다리고 있어요. 몇 개월 동안 수입이 하나도 없는데 나가는 돈은 크니까 적금을 깨고, 보험을 취소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고,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죠. 혹시라도 승인받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하고요. 일하다가 다치고 병든 것도 억울한데, 노동을 해서 다시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산재 보상을 신청했을 때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해 주고, 치료에 전념하게 해줘야 사회 보험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편집 : 김정민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