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김정민 기자

아테네는 추첨제를 통해 공무를 집행할 사람을 평등하게 선택했고 우리나라 녹색당도 이를 본받아 대의원 선출에 추첨제를 도입했다. 추첨이 공정을 담보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버나드 마넹은 저서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보다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표를 행사한다는 뛰어난 성찰을 보여줬다. 근대 사회의 대중은 가장 뛰어난 엘리트를 지도자로 뽑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고, 능력에 따라 역할을 다르게 분배하는 것을 공정한 일로 감지한 듯했다. 주류 인간 사회는 평등과 공정을 분리했다.

민주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는 누구이고, 어떻게 결정되는가? 미국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우리 엘리트층은 혈통이나 재산 등을 기반으로 한 과거 엘리트들과 달리 노력을 통해 엘리트의 위치를 성취한다’고 썼다. 그는 또 ‘이 나라는 평등한 곳은 아닐지 모르지만, 공정한 기회는 가질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한국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오래전부터 ‘능력주의’ 신화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우리나라 엘리트의 특권은 신분이 아닌 ‘시험’에 의해 정당화한다. 문화연구자 엄기호는 ‘한 번의 시험이 평생을 좌우하고 그것이 신분처럼 고정된다’며 시험이 권리의 안과 밖을 갈랐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는 절대적인 권리가 생겼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며 ‘문제는 ‘공정’이 결과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능력주의와 결합한 한국에서의 공정 담론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된 점’을 비판했다.

의대생들이 두 번의 구제 기회를 날려버리고도 여전히 국시 재응시 기회를 요구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태도다. 자신들이 학벌의 최정상을 차지한 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믿음, 치열한 노력을 통해 얻은 불평등한 특권이 정당한 보상이라는 능력주의 신화에 기반한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민주사회의 옥상옥에 존재하며 위화감을 조성하게 만들었다. 염치나 부끄러움이라고는 찾기 어렵다. 결국 정부가 그들에게 재응시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은 역시 엘리트인 정책당국자들이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 노력을 통한 성취가 엄청난 보상을 정당화하는 사회에서는 시험의 합격 여부가 권리의 안과 밖을 가르기도 한다. ⓒ Pixabay

능력주의 사회에서 대중을 분노케 하는 핵심어는 평등이 아니라 공정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조국을 용납하지 못한 이유도 딸의 석연찮은 입시 문제가 ‘공정’의 감각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특권을 요구하는 의대생들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더 크게 분노한 것도 시험만이 공정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 시내 4년제 사립대를 나왔다. 이른바 ‘인서울’을 한 셈이다. 부모는 자산가는 아니었지만 둘째딸을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독려할 만큼은 형편이 됐다. 혼자서는 하루 2시간도 공부하지 못하던 나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1년 내내 12시간 이상 앉아서 공부했다. 부모가 보낸 학원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가혹한 입시계획을 짜 주고 내 등뒤에 CCTV를 달아 놓고 내가 성취감을 느끼도록 격려하고 고무했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을 통해 보상이 주어지리라 당연히 기대했고, 그게 특권이라고는 인식하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도 실패하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각별한 ‘노력’을 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나를 억지로 12시간씩 앉혀 놓은 학원과 학원비를 내준 부모가 아니면 서울 문턱도 밟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의 재력이 나의 학벌을 결정지은 셈이다. 이쯤 되면 내가 조국의 딸 조민 양과 뭐가 크게 다른지 헷갈린다.

특권층은 대부분 본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입시에 성공했다는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은 학창시절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남보다 노력했기에 더 나은 삶을 살 권리를 획득했다고 여긴다. 학업성취를 노력을 통한 공정한 보상으로 느끼는 사회일수록 비정규직이나 하청노동자를 대하는 태도는 차갑고 차별적이다. 비슷한 계급끼리 경쟁해서 성취한 것들임에도 처음부터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하고 깔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계층 이동을 허용하는 개방적 사회에서 불평등은 왜 더 심해질까? 2010년대 중반부터 생긴 ‘노오력’이라는 밈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 때문에 생긴 조롱이자 조소다. 미국의 민족지학 연구자 셰이머스 라만 칸은 <특권>이란 책을 통해 학교에서 아무리 더 잘해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보다, 흑인은 백인보다, 엘리트 학교 학생들은 비엘리트 학교 학생들보다 수입이 적은 현실을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부가 아니라 노력이요, 혈통이 아니라 재능이라고 주장할 때 엘리트들은 허구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 우월한 소수가 평범한 다수보다 훨씬 더 큰 보상과 혜택을 누리는 것이 '공정'하게 취급되는 공동체는 불평등이 일상화한 사회이며 능력주의 논리가 극대화한 곳이다. ⓒ Pixabay

노력에 따라 보상을 받는 체제는 공정 신화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끈질긴 노력과 도전을 통해 무언가를 이룩하는 결말은 언제나 감동서사로 포장된다. 그러나 내가 산업재해 이슈를 취재하면서 만난 배달라이더는 미성년자였고 빗길에 미끄러져 목숨이 위험한 사고를 수없이 겪었다. 현대제철이나 대우조선 노동자들도 불길 앞에 화상을 입고 때로는 프레스에 짓눌리며 목숨을 걸고 일한다. 휴게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온종일 일하면서도 부족한 권리에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사람들은 시기를 놓치면 소용없다고 비웃는다. ‘학창시절에 노력했어야지’ 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학창시절에 ‘노력’할 특권이 있었나? 

식물인간 상태로 초호화급 병실에서 6년이나 죽음을 유예받은 재벌 회장의 사망은 큼지막한 부고기사로 대서특필되지만 삶을 연장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동하다 죽어간 이름없는 이들의 부고는 지면을 짧게 스칠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 재능 없는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을 노력하지 않아 낙오된 자들로 치부하면 삶의 논리는 간단해진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지 않는 사회.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거비와 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사회. 평범하게 살고자 아등바등해야 하는 사회에서 합계출산율이 1명 아래인 것은 능력주의 논리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인 재생산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환경적 요소가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이 사회는 결과적으로 불평등하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편집 :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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