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토크] 영화 <1917>

‘같은 사건을 다시 체험한다면, 동일한 메시지나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영화 <1917>을 보면서 든 의문이다. 현대 영화감독들은 논의 가치도 없다며 ‘노’라고 할 것이다. 영화에서 서사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감독의 가공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영상 서사를 ‘현실의 재구성’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그런데 개인 체험이 다른 사람에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전달하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을까? 칸트는 각 개인이 인식을 구성하면서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형식논리가 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간이 모두 같은 형식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같은 사건을 체험하면서 동일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 영화 <1917>은 작년 2월 19일 개봉했다. 샘 멘데스 감독이 1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출했다. © google

영화 <1917>은 이런 인식론적 의문을 실험한다. 실험의 가정은 ‘서사가 부족해도 같은 사건을 체험한다면, 동일한 메시지나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이다. 영화에서 서사라고 할 만한 것은 독일군에게 포위된 영국군을 지키려고 영국군 병사가 포위망을 뚫고 합류한 것밖에 없다. 감독은 관객에게 서사 대신 전쟁터를 꼼꼼하게 보여주며 체험시킨다. 이를 위해 감독은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을 활용한다. 컷을 자연스럽게 이어 영화 전체가 하나의 컷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몰입감을 극대화하면서 전쟁터로 관객의 목덜미를 끌고 들어간다.

‘죽음’의 땅

영화 스토리는 애린무어 장군(콜린 퍼스 분)의 명령에서 시작한다. 명령은 데번셔부대가 적군의 유인책에 말려들 위기에 처했으니, 직접 가서 이를 알리고 공격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통신망이 끊어진 상황에서 데번셔부대의 공격은 8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시간 안에 공격중지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 임무 성패는 길눈이 밝고 강한 의지를 가진 병사에 달렸다. 지도를 잘 볼 수 있고 친형이 데번셔부대 소속인 블레이크는 바로 임무를 자원한다, 나무에 기대 아무 생각 없이 있던 주인공 스코필드와 함께.

▲ 독일군 참호에서 막 탈출하고 난 뒤,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분)가 동행할 사람으로 자신을 꼽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 분)에게 짜증을 내고 있다. © <1917> 스틸 이미지

주인공 스코필드는 전우와 동행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블레이크와 같이 명령을 받았지만, 사명감은 약하다. 지휘부를 향한 불신도 있다. 스코필드는 독일군이 물러났다는 말만 믿고 앞서 나갔다가 죽은 영국군의 사례를 블레이크에게 말하며 명령 수행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나중에는 블레이크에게 “왜 하필 나를 선택했냐”고 원망한다. 스코필드가 계속 가야 하는 이유는 블레이크에게 느끼는 유대감뿐이다.

스코필드의 개인적 동기는 전반부 영상 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쟁 영화에서 특출한 영웅을 찾곤 하지만, 사실 전쟁 속 인간은 거창한 사명 때문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전우애 때문에, 때로는 분위기에 휩쓸려서다. 멋모르고 떠밀려 간 길 자체는 참혹하다. 영화는 이런 점을 포착했다.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 카메라의 산만한 이동을 통해 죽음이 널브러진 전쟁터 자체를 관찰하면서 체험하게 만든다.

장소에 관한 지각은 인물의 이동 방향과는 다르게 카메라 시선이 이동하면서 발생한다. 전반부에서는 인물이 수평으로 이동하면, 카메라 시선은 인물을 좇으면서도 수직으로 움직인다. 아래에서 앙각으로 도처에 죽음이 깔린 공간을 잡기도 하고 위에서 시체 구덩이 옆을 지나는 인물의 발만 좁게 잡기도 한다. 걸으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공간을 인지하는 인간의 시선처럼 움직인다. 인물의 움직임을 다양한 시선에서 좇는 카메라는 ‘전쟁터는 죽음의 터’라는 사실을 생생히 체험하게 만든다.

▲ 시체 가득한 웅덩이를 지나는 스코필드와 블레이크의 모습. © <1917> 스틸 이미지

이런 특성이 잘 나타나는 장면은 독일군 참호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웅덩이를 건널 때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는 물을 피해 웅덩이를 곡선으로 건넌다. 이 모습을 카메라는 웅덩이 위에서 수평으로 이동하며 잡는다. 곡선과 직선이 만들어낸 반원의 공간에 인물들의 모습과 함께 웅덩이에서 썩어가는 시체와 그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의 모습이 잡힌다. 인물의 행로를 단선적으로 따라가지 않아서 인물이 멀어진 공간에 죽음의 공포를 집어넣는 것이다. 전투 장면이 하나도 없는 전반부에서 감독은 이런 카메라 활용을 통해 관객들에게 본능적 긴장감을 제공한다.

‘삶’의 의지

후반부는 스코필드가 이동 차량에서 내리면서 시작한다. 전반부에서 길을 걸어가는 동기가 블레이크의 사명감에 있었다면, 후반부는 블레이크의 사명을 이은 주인공 스코필드가 홀로 가는 길이다. 블레이크의 죽음은 스코필드의 약한 사명감을 강한 의지로 바꾼다. 이후 나타나는 플롯은 평범한데,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유대인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엑소더스 후반 플롯을 변주 없이 사용한다. 가겠다는 의지를 방해하는 적군, 강을 건너고 나서야 약속의 땅에 가는 것마저 그렇다.

▲ 스코필드가 계단으로 올라가 독일군 저격병에게 대응사격을 하고 있다. © <1917> 스틸 이미지

특기할 점은 평범한 플롯에도 주인공이 가는 길을 역동적으로 만든 영상구성 방식이다. 스코필드가 가는 길에는 고난과 극복이 교차로 드러난다. 그 교차는 스코필드가 수직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주로 드러난다. 끊어진 다리를 건너면서 저격을 받자 빠르게 계단 아래로 몸을 숨기는 장면, 저격병을 죽이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서 대응사격 하는 장면, 적군에 쫓기며 지하실로 몸을 숨기는 장면,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 과정에서 인물이 받은 고난이 부각되고, 1,600여 명 데번셔부대원을 살리고자 하는 인물의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후반부에서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 시선은 전반부와 차이를 보인다. 카메라와 인물 이동 경로를 다르게 만들어 전쟁터라는 공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는 카메라 렌즈가 인물에 밀착해 이동한다. 공간의 특성을 보여줄 때는 인물과 멀어지지만, 그 외에는 스코필드의 시선에 일치시킨다. 이런 시선은 고난을 더욱더 위태로워 보이게 만들고, 인물의 감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긴장감을 강화한다.

그리고 전쟁

<1917> 미장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미지가 있다. 불과 물이다. 삶과 죽음의 교차는  불과 물로 나타낸다. 흥미로운 것은 불과 물을 단일한 이미지로 사용하는 다른 영화와 달리, 불에도 물에도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불은 죽음 이미지로 사용된다. 건물을 통째로 태우는 불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불안감이 주황색이라는 불의 톤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특히 불타는 건물 옆에서 나타난 독일군은 불에 불안과 죽음이라는 감정을 직접 전이하는데, 이런 이미지 전이는 적이 쏘아 올린 조명탄의 주황색과 맞닿아 공포를 느끼게 한다.

▲ 통째로 불타는 건물 옆에 독일군 병사가 서있다. © <1917> 스틸 이미지
▲ 스코필드가 독일군을 피해 들어간 민가에는 작은 촛불이 켜져 있다. © <1917> 스틸 이미지

통제된 공간에서 빛나는 주황색은 안락함과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저녁에 적군에 쫓기다가 우연히 들어간 민가에서 스코필드는 홀로 갓난아이를 키우는 프랑스 여인을 만난다. 스코필드는 여인이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는 말에 자기 비상식량과 우유를 내놓는다. 머리를 다친 스코필드는 그곳에서 여인에게 치료를 받는데 그 공간을 밝히는 것이 촛불이다. 앞선 불과 색은 같지만, 여기서 불의 의미는 다르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촛불이 타는 시간을 '삶과 꿈이 결합하는 시간'으로 봤듯, 이곳에서 촛불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 삶의 시간이 된다.

▲ 강물 위로 체리 꽃잎처럼 하얀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 <1917> 스틸 이미지
▲ 스코필드와 나무에 막혀 강물을 따라 흐르지 못하는 독일군 시체. © <1917> 스틸 이미지

물에도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잔잔한 물속에서 잠깐 기절했을 때, 스코필드가 목적지로 흘러가면서 그의 몸 위로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앞서 베어진 체리 나무를 통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블레이크가 “체리가 썩으면 더 크게 자랄 것”이라고 말한 체리 나무의 꽃잎과 흡사하다. 이때 물에는 치유와 생명의 상징이 부각된다. 그러나 거센 강물이나 쓰러진 나무에 걸려있는 독일군 시체에서는 죽음이 나타난다. 불에도 물에도 삶과 죽음이 다 있다.

이 영화에서만 유독 물과 불이 각각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되는 의미를 모두 획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고 의문이 풀렸다. 데번셔부대를 찾아 지휘관인 매캔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을 찾으러 가는 길, 전투 개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스코필드는 참호에서 나와 전쟁터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그가 지나는 땅에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풀이 싱그럽게 자라 있어 회색 참호와 대비된다. 그 푸른 초원 위로 포탄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하얀 웅덩이가 생긴다.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전쟁의 모습이다. 전쟁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희석한다.

영화 <1917>은 마치 게임처럼 관객의 시각을 빼앗는다. 한 인물을 따라가면서도 다양한 프레임 구성을 통해 공간 자체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영화가 아니라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관객이 체험하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전쟁의 실상과 함께 동료를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주는 휴머니즘이다. 앞에서 <1917>은 ‘서사가 부족해도 같은 사건을 체험한다면, 동일한 메시지나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가정을 실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실험은 성공한 것 같다.


편집 : 신현우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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