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내리자 썩은내가 났다. 낡은 버스 정류장엔 ‘성심원’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남았다. 경북 상주시 공검면, 성당 근처에 마을이 있다. 성당의 옛 이름과 같은 ‘성심마을’이다. 정류장 뒤쪽으로 작게 난 샛길을 따라 걸었다. 몇 시간 전까지 비가 온 탓에 밟히는 게 젖은 흙인지 가축의 분뇨인지 알 수 없었다. 악취가 있는 곳엔 날벌레가 모여들었다. 팔을 휘저으며 5분 정도 걸으니 회색 벽돌 건물이 나왔다. ‘의무실’ 이라 쓰인 나무 현판이 보였다.멀리서 보면 마을은 잿빛 동그라미였다. 앉은뱅이 건물들이 길 양옆을 따라 다닥다닥
얼마 전 남자친구가 취업을 했다. 건설현장에 필요한 장비를 납품하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는 매일 거래처의 현장으로 출근했다. 최근 그의 팔에는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작업 현장에서 일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개미에 물린 것 같은 자국 수십 개가 오른팔 군데군데로 퍼졌다. 병원을 두 곳이나 다녀왔지만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며 잘 먹고 잘 자라는 처방만을 받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현장에서는 꼭 공업용 마스크를 쓰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 면역력을 위해 주말에 몸보신 음식을 사주는 것뿐이었다. 일을 시작하자마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좀비 바이러스, 역병은 왜란에서 처음 등장한다. 당시 조선은 왜군과 잇단 싸움에서 패해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턱 밑까지 들어온 왜군을 이기려면 일당백을 할 수 있는 병사가 필요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에서 이겨야 했던 영의정 조학주는 그때 ‘생사초’를 생각한다. 생사초는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는 풀이다. 이 풀로 살린 사람들은 인육을 탐하는 괴물로 되살아난다. 조학주는 문둥병을 앓고 있는 수망촌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왜군에 대적할 계획을 세운다. 전쟁은 이겼으나, 죄 없는 수망촌 사람들은
이상한 나라, 노르웨이노르웨이에 도착해 가장 먼저 산 건 교통카드였다. 전날 공항에 내려 기숙사까지 가는 데 5만 원 가까이 썼다. 공항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데 3만 원,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 8000원, 역에서 기숙사까지 버스 한 번 타는 데 7000원이나 들었다. 대중교통 시설은 깨끗하고 안락했지만, 요금은 비싸도 너무 비쌌다. 날이 밝자마자 룸메이트가 알려준 정기 교통권을 구매하러 가까운 역으로 향했다. 정기 교통권은 세 종류가 있었다. 1일권은 만 오천 원, 일주일 권은 5만 원, 한 달 권은 7만 원이었다. 단기 여행자
[앵커]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원산지를 따지는 건 이제 기본이 됐죠.하지만 원산지 표기가 헷갈리게 돼 있어 혼란을 느낀다는 수요자들이 여전히 많습니다.자세한 내용, 유재인 기자가 알아봤습니다.[리포트]충북 제천시에 있는 한 대형마트입니다.식료품 원산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이 마트도 각 재료의 원산지를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놨습니다.수산물 코너, 논우렁살은 ‘국내산’, 만디(미더덕)는 ‘국산’ 이라고 표시돼 있습니다.하지만 국산과 국내산 같은 원산지 표시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소비자가 많습니
"인간에게는 네 번의 생이 있대요. 씨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을 주는 생, 물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들을 쓰는 생."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다. 네 번의 생 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생은 몇 번째일까? 늘 첫 번째 삶이길 바랐다. 입시와 취업 준비로 고단할 때는 이 고통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마당에 앉아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으로 눈사람을 만들 때는 이 행복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서. 요즘 이 삶이 첫 번째 삶이길 바라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두 죽음의 무게가 다른 것인가. 최근 안타깝게 숨진 두 청년에게 쏠린 사회적 관심이 대조적이다. 한강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실종돼 엿새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손정민 씨와 안전관리자 없는 평택항에서 일하다 무게 300킬로그램(kg)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이선호 씨. 전자는 ‘의대생 실종’ 보도를 시작으로 수많은 언론사가 ‘죽음을 둘러싼 의혹’ 등 후속기사를 쏟아냈다. 반면 후자는 사건발생 여러 주가 지나서야 일부 언론이 보도하기 시작했고, 기사량도 몇 분의 1에 불과하다. 2019년 <경향신문>은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
김기홍 씨는 기사에 자주 등장하던 사람이다. 2019년 <경향신문>이 다룬 성소수자 죽음 관련 기사에서 그는 죽은 동료를 애도하며 숫자로도 나타나지 않는 성소수자의 죽음이 기록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녹색당 비례대표로서 끝까지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투쟁할 것 같이 보이던 그였다. 변희수 하사는 수많은 카메라 앞에 나선 사람이다. 스스로 성전환 수술 사실을 대중 앞에 밝히며 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만큼 용기 있었고, 그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그랬던 그들이 왜 죽었을까?사회가 극단으로 갈수록 중간에
소득주도성장은 실패하지 않았다. 2021년 최저임금이 8720원으로 결정되자, 역대 최저 인상률이라며 소득주도성장 실패론에 불이 붙었다. 소비로 경제의 선순환을 이루려는 정책은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 경기가 침체하고 불평등이 심화한 지난 2~3년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다만 이 정책을 계속 끌고 가려면 큰 수정이 필요하다.소득주도성장은 ‘아래로부터의 성장’을 지향한다. 가계소득을 늘려 소비를 진작하면 소비가 기업 매출을 확대하고 이는 다시 가계소득으로 순환한다는
어색하고 어눌한 말투,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 지나친 공손함. 카페를 들어서며 만난 아르바이트생의 첫인상이었다. 음료를 주문하자 그는 더듬거리며 다시 주문을 확인했다.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 때는 양을 한 번에 맞추지 못하고 두어 번 더 반복했다. 하나의 음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의 동선은 비효율적이었다. 커피를 내리고, 우유 거품을 만들고, 과자를 꺼내는 과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나온 음료수는? 맛있었다. 여느 카페에서 파는 음료와 다르지 않았다. 카페 로고가 그려진 검은색 앞치마를 입은 그의 이름은 최원재
생명의 계절, 봄봄을 깨우는 건 봄비다. 봄비는 언 땅을 녹인다. 대지는 겨울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땅이 살아나면, 뭇 생명이 기지개를 켠다. 봄비는 생명의 뿌리에 생기를 불어넣어 대지를 뚫게 하고, 말라붙은 풀잎과 나뭇가지에 스며들어 회색 몸통을 싱싱한 연두색으로 물들인다. 봄비가 스며든 꽃과 나무는 저마다 꽃을 품은 귀여운 봉오리들을 세상에 내보낸다. 노란색 꽃이 핀 애기똥풀로 소꿉놀이를 하고, 철쭉 꽃잎 꿀을 빨아먹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앙상하던 벚나무에 작은 봉오리들이 올라오면 가슴이 설렜다. 손꼽아
영화 ‘레미제라블’의 노래 중 ‘적과 흑’(Red and Black)이라는 노래가 있다. 남자 주인공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후 붕 뜬 마음으로 혁명을 앞둔 친구들을 찾아온다. 혁명 대장 앙졸라와 마리우스의 서로 다른 상황이 색으로 대비돼 노래로 만들어진다. 앙졸라는 ‘붉은 색은 민중의 분노, 검은 색은 우리가 겪은 과거의 시간’이라고 하는 반면, 마리우스는 ‘붉은 색은 불타는 나의 마음, 검은 색은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노래 속 붉은 색과 검은 색처럼 앙졸라와 마리우스의 상황도 대의와 개인의 욕망으로
코로나가 바꾼 일상 풍경들이동이 조심스러운 요즘이다. 학기중일 때에는 주중에 제천에 있고 주말에 서울로 갔다. 지난해 11월 어느 금요일, 가족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엄마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며 손소독제부터 내밀었다. 신발도 벗기 전이었다. 엄마가 건넨 플라스틱 소독제 통을 손바닥에 두드렸다. 미끄덩거리는 액체가 나오면서 씁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흘러내리는 소독제의 물성도, 과학실에서나 날 법한 알콜 냄새도 너무나 익숙하다. 끈적거리는 두 손과 손에서 나는 화학약품 냄새가 불쾌했지만 소
서울 한강 하류의 선유도는 산이 섬이 됐고, 강 건너편 난지도는 모래섬이 산이 됐다. 인간사회의 문명화는 자연파괴라는 대가를 치르며 이뤄져왔다. 한강 하류의 명승이었던 해발 80m 선유봉은 일제 강점기 여의도 개발을 하면서 평평한 섬으로 전락한 반면, 난지도는 서울이 급속히 커지면서 야트막한 모래섬에서 해발 98m 쓰레기 산으로 솟아올랐다. 인간의 뒤늦은 반성과 자각으로 파괴된 자연을 복원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선유도는 ‘물과 생명’을 테마로 한 공원으로 재생했고, 난지도는 물질문명의 발전이 가져올 후유증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생태공원
지난해 12월 10일 아침, 신문을 펼쳐든 A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날 저녁 뉴스를 통해 ‘공정경제 3법’이 국회를 통과한 사실을 접했는데, 신문에는 ‘기업규제 3법’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자신이 모르는 ‘기업규제 3법’이 어제 국회를 통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지만, 아무리 봐도 방송에서 봤던 ‘공정경제 3법’과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 언론 소비자 어느 누구든 A씨가 될 수 있다. 두 방송 뉴스를 볼 경우, 두 개의 신문을 볼 경우도 A씨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실제로
‘진실 읽기’는 시대정신올해는 <경향신문>이 창간 7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경향>은 여러분과 함께 ‘진실을 읽다’라는 비전을 갖고 활동해왔습니다. 진실이 모여 세상이 조금 더 따듯하게 변한다는 신념 하나로, <경향>은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을 추구해왔습니다. 더 많은 사실을 수집하고, 모은 사실을 뒤집어보며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지난 75년간 격동의 시대를 견디며 폐간과 속간을 반복하는 고난에 맞닥뜨렸지만, <경향>은 우직함으로 진실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광복 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현실에
웬만하면 공중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2016년 서울 강남역 부근 공중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후부터다. 페미사이드, 즉 ‘여성이란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내게도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날 이후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범죄였다. 가해자는 공중화장실에 숨어서, 먼저 들어온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자 칼로 찔렀다. 그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 죽이고 싶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경찰에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저변에 존재하는 여성혐오를 드러냄과 동시에, 특히 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