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생애’

▲ 유재인 기자

"인간에게는 네 번의 생이 있대요. 씨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을 주는 생, 물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들을 쓰는 생."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대사다. 네 번의 생 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생은 몇 번째일까? 늘 첫 번째 삶이길 바랐다. 입시와 취업 준비로 고단할 때는 이 고통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마당에 앉아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으로 눈사람을 만들 때는 이 행복을 다시금 느끼고 싶어서. 요즘 이 삶이 첫 번째 삶이길 바라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다음 생에는 내가 그들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 건강검진에서 중병이 발견돼 입원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주 가끔 할아버지 댁에 찾아갈 때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안색을 보고도 연세 탓이려니 했다. 늘 내가 도착하기 15분쯤 전에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기다리던 할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도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걸 보고도 몰랐다. 몇 년 전까지 몸에 잘 맞던 바지가 벨트를 끝까지 매도 흘러내릴 정도로 마른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조금만 일찍 알아챘더라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을 텐데… 후회의 연속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은 있는데, 조부모날은 왜 없지 하는 생각도 문득 해본다. 

▲ 가정의 달 5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달이다. ⓒ Pixabay

아프다는 걸 알기 직전에 할아버지는 영상통화 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집에 혼자 두면 불안하다는 거였다. "먼저 이 노란 거, 카카오톡을 들어가세요." 큰 소리로 느릿느릿, 두어 번 설명했다. 세 번째 가르칠 때는 속으로 조금 답답했다. 네 번째 시도 끝에 할아버지는 성공했다. 할머니 얼굴이 할아버지 휴대폰 화면에 뜨자 신기함 반, 반가움 반 표정으로 '여보세요' 하는 모습에 죄송해졌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소리가 휴대전화에서 나는지 그냥 들리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분이 영상통화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뿌듯했다. 

차근차근, 하나씩 더 알려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앱으로 배달 음식 주문하는 법, 패스트푸드점 무인 기계 사용하는 법, 입금할 때 은행 창구를 이용하지 않고 현금지급기를 사용하면 된다는 것.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하나하나 전수하고 싶었다. 얼마 전 나온, '키오스크(무인판매기) 앞에서 20분 간 서있던 엄마가 울었다'는 기사가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는 되지 않길 바랐다. 어쩌면 내가 미루고 미루는 동안,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속으로 여러 번 울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할아버지가 입원하고 나서야 들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어릴 적 뜻도 모르고 흥얼거린 노래가 내 상황이 됐다. 가족들끼리 대형 마트에 가면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쇼핑이 끝날 즈음 나타나던 할아버지. 그때마다 할아버지 양 손에는 손주들이 좋아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중국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만리장성을 걸어 올라가기 싫은 내 곁에 함께 있어주던 할아버지. 우리는 다른 가족들이 만리장성에 올라간 사이 따뜻한 어묵을 먹으며 쉬고 있었다. 나는 이제서야 할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을 더듬으려 애쓰고 있다. 

삶이 아름다운 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은,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큰 슬픔이다. 그 슬픔을 느껴야 하는 게 순리라면 세 번의 생이 더 남아 있으면 좋겠다. 내 생이 첫 번째이길 바라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생도 첫 번째였으면 좋겠다. 다음 생에는, 그 다음 생에는 후회가 조금은 덜 남길 바란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임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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