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유재인 기자

웬만하면 공중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2016년 서울 강남역 부근 공중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후부터다. 페미사이드, 즉 ‘여성이란 이유로 죽임을 당하는 일’이 내게도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날 이후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범죄였다. 가해자는 공중화장실에 숨어서, 먼저 들어온 여섯 명의 남성을 그냥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자 칼로 찔렀다. 그는 평소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 죽이고 싶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경찰에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 저변에 존재하는 여성혐오를 드러냄과 동시에, 특히 젊은 여성들이 어두운 거리에서, 으슥한 공간에서 느끼는 현실적 공포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페미사이드를 목격한 젊은 여성의 두려움  

여성혐오뿐 아니라 이주민, 장애인, 노인,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와 차별이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틀딱충’ ‘김치녀’ ‘짱깨’ 등 노골적인 혐오표현이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중국 동포와 특정 종교집단, 성 소수자 등이 번갈아 가혹한 혐오의 돌팔매를 맞았다. 혐오는 ‘표현’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에 방치해선 안 된다. <말이 칼이 될 때>의 저자 홍성수 교수는 ‘혐오의 피라미드’로 그 구조를 설명한다.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 위치한 혐오는 조금 더 위에 있는 차별로 이어지고, 이 차별은 다시 폭력과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까지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혐오의 피라미드에 따르면 편견과 혐오표현은 집단학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 말이 칼이 될 때

2차 대전 당시 독일 등 유럽의 상황은 혐오가 제노사이드로까지 이어진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사회의 뿌리 깊은 유대인 혐오와 당시의 극심한 경제난은 ‘약자의 약자를 향한 공격’을 낳았다. 히틀러라는 선동가는 그 상황을 이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하려 했고, 유대인을 포함한 수많은 소수자가 ‘인종 청소’를 당했다. 

한국에서 혐오가 확산하는 배경에도 심해지는 불평등과 경제난이 있다. 가뜩이나 먹고살기가 힘든 현실에서, 정부가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에 관한 혜택을 늘리면 그에 해당하지 않는 자신은 손해라는 막연한 피해의식이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급속히 팽창하는 온라인 공간은 혐오표현 확산의 고속도로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혐오표현을 접하고 있다. 경제 상황은 불투명하고, 온라인 정보 유통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코로나로 인한 불안감이 타인을 향한 혐오로 쉽게 번지는 이 시기에, 혐오표현을 규제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꼭 필요하다.

시민 누구나, 언젠가 보호받을 수 있는 법 

장혜영 정의당 국회의원이 지난 6월 대표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성별, 인종, 장애, 연령, 결혼, 성 정체성 등 23가지 이유로 고용,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 교육, 행정의 4가지 영역에서 사람을 차별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법이다. 이 법은 그 자체로 혐오가 무엇이며 왜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행위인지 알려 주는 기준이 된다. 현재 남녀차별금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있지만 이런 개별적 차별금지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을 폭넓게 보호할 근거가 된다. 그래서 각자 하나쯤은 ‘소수자성’을 지닌, 적어도 언젠가는 노인이 되게 마련인 시민 모두가 ‘나를 보호해 줄 수도 있는 법’이라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 지난 6월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 KBS

일각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성 소수자를 배척하는 보수 기독교계의 반발이 특히 거세다. 그러나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위협하면서까지 혐오를 표현할 권리는 어떤 민주 사회에서도 보장되지 않는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코로나 상황에서 추방의 공포에 떨었던 중국 동포들, 원치 않는 ‘커밍아웃(성 정체성 노출)’의 위협 속에 모욕과 멸시를 받았던 성 소수자들의 고통이 누군가에게 다시 반복될 것이다. 법 제정과 함께 차별·혐오를 줄이는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이 땅의 약자들은 일상에서 거듭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할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 나도 죽음의 공포 없이 공중화장실에 가고 싶다.


편집 : 김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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