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언론사 CEO 신년사’ ➃ 경향신문

‘진실 읽기’는 시대정신

올해는 <경향신문>이 창간 7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경향>은 여러분과 함께 ‘진실을 읽다’라는 비전을 갖고 활동해왔습니다. 진실이 모여 세상이 조금 더 따듯하게 변한다는 신념 하나로, <경향>은 사실 너머에 있는 진실을 추구해왔습니다. 더 많은 사실을 수집하고, 모은 사실을 뒤집어보며 조금 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난 75년간 격동의 시대를 견디며 폐간과 속간을 반복하는 고난에 맞닥뜨렸지만, <경향>은 우직함으로 진실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광복 직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현실에서, <경향>은 중도신문으로서 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의 미래를 고민했습니다. <경향>의 정신은 자유당 독재를 막고 4.19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 실태를 보도해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소수자를 향한 차별, 극심한 빈부격차, 환경 파괴 등 수많은 문제 속에서 사람들은 아파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가치는 세상이 아플 때 더 소중합니다. 아파하는 사람들이 잊히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경향>이 그동안 지켜왔고 지켜나갈 ‘진실’입니다. TV와 신문에 매일 똑같이 ‘사람이 없는’ 뉴스만 나오는 요즘, <경향>의 ‘진실을 읽다’는 정신은 여전히 유효한 시대정신입니다.

▲ <경향신문>은 2021년을 맞아 ‘흑백 민주주의’ 기획을 시작했다. 다양한 색깔의 목소리가 있지만 정치권과 공론장에는 양극단의 목소리만 울리는 사회에서 경향은 목소리가 작은 시민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조명 속에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리는 상황을 꼬집는다. ⓒ pixabay

우리가 현장에서 찾아낸 진실

2020년은 모든 국민이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해 생긴 우울감과 경기 악화가 불러온 불안감이 낳은 ‘코로나 블루’가 일반화했습니다. 만남이 금지되고, 거리두기가 미덕이 된 ‘뉴노멀’의 시대입니다. 지난 한 해, 여러분 역시 현장 취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발 빠르게 현장에 나가 사람들을 직접 인터뷰하기 어려워졌고, 취재 당사자인 자신도 학교나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는 아이를 두고 출근해야 하는 고민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진실은 현장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이 현장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현장에서 사건을 만났고, 삶을 기록했습니다. ‘짧은 숨의 기록’ 기획도 그중 하나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배냇저고리 한 번 입지 못한 영아들 이야기는 보도되기 전까지는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을 아파하고 그 아픔을 담은 <경향>의 보도로 영아 유기 문제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진실’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경향>이 주목한 노동자의 아픔 시리즈도 우리가 현장에서 발견한 진실이었습니다. <경향>은 지난 2019년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라는 기사에 이어 2020년 ‘녹아내리는 노동’ 기획을 내보냈습니다. 배달 노동자, 플랫폼 가상 노동자, N개의 직업을 갖는 직장인 등 ‘일’의 테두리가 모호해지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의 이면에 가려진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두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직접 찾아낸 진실들입니다. 성과도 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K자 양극화’는 부와 노동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할 것이고, 올해 현장의 눈물과 고통 좌절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경향>은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 서울시 공영장례 전용 빈소에 무연고 아기의 ‘성명(불상)’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화 옆에는 술 대신 바나나 우유가 놓였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는 20일마다 한 명씩 아기가 숨졌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학대와 유기로 한강 고수부지, 등산로, 헌 옷 수거함 등에서 죽어갔다. <경향신문>은 지난 8월 ‘짧은 숨의 기록’을 통해 영아 학대와 사망에 관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경향신문>

현상과 사실 너머에서 진실 발견하기

<경향>이 지향하는 진실 읽기는 현상과 사실 너머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현장과 삶의 이면을 읽어내야 합니다. 가려져 있는 현상의 본질을 통찰해야 합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를 드러냈습니다. 지난 5월, 이태원 클럽에서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성 소수자에 관한 혐오와 차별적 표현들이 온라인을 통해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블랙수면방’등 성 소수자 집단을 향한 부정적 일반화는 언론을 타고 확산했습니다. <경향>은 당시 혐오를 최대한 배제하고 감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정보만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 이태원 클럽 발 코로나 확산 전후로 ‘성소수자, 혐오에 맞선다’는 기획 기사를 내보내며 원치 않게 성 정체성이 드러나는 ‘아웃팅’을 당하고 있던 성소수자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모두를 포용하는 세상을 지향하는 <경향>의 진실 탐구는 결코 소수자를 향해 칼을 겨누지 않습니다. 외려 소수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인권 신장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진실입니다.

▲ 지난해 5월, 이태원 발 코로나 재확산으로 성소수자 혐오가 퍼지자 일부 언론은 ‘블랙수면방’ 보도 등으로 혐오 확산에 앞장섰다. <경향>은 ‘성소수자, 혐오에 맞선다’ 등의 기획 보도를 통해 ‘혐오 보도를 보도’ 함으로써 성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 애썼다. ⓒ <경향신문>

성과도 있었지만 반성도 필요합니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접근했지만,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우리 방식이 최선이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돌아보면, 진실을 드러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바이러스에 따른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고, 매체를 연결해 세상에 실어 날랐습니다. 조회 수를 위한 자극적인 헤드라인, 언론사 간 속보 경쟁 속 빈번했던 오보, 일부 선정적 언행만을 베껴 쓴 따옴표 저널리즘까지.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이 중요하지만, 진실을 향하는 수단과 방법도 정도를 지켜야 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우리가 그 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진실 읽기’는 사람과 생명을 향해야

건강한 언론이 건강한 세상을 만듭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우리에겐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국가는 왜 필요한가요? 정치는 누구를 향해야 하나요? 언론은, 신문은 왜 존재하나요?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진실 읽기 역시 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확산은 잊고 있던 세상의 변화와 변화의 과정 속에 숨겨져 있던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한꺼번에 드러냈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기술 변화들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악화한 경제 상황이 부와 노동의 불평등을 더욱 심화했습니다.

지난 1월, 아카데미 4관왕을 석권한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빈부격차의 가혹한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K자 양극화’로 상징되는 불평등 현상이 본격화할 올해, 우리는 생존의 위기에 처한 힘없고 가난한 이들,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생계를 넘어 생존을 걱정하는 전통시장 상인들, 무료급식소를 이용하지 못해 끼니를 잇지 못하는 노숙인들은 바로 우리 이웃입니다. 재해재난 시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실은 약자의 대변인인 언론으로서, 약자의 작은 목소리를 크게 전달하는 확성기의 역할입니다.

▲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대다수 사설 노숙인 급식소가 문을 닫자 노숙인들은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경향>이 전해야 할 ‘K자 양극화’시대의 진실은 이들의 삶을 가감 없이 기록하고 전하는 일이다. ⓒ KBS

두 번째는 ‘생명과 함께’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코로나로 우리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산업시설들이 멈추자 대기 질은 좋아지는 ‘코로나의 역설’을 실감하며, 인간이 지구 환경에 끼쳤던 악영향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편리함을 앞세워 많은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TV 속에서 녹아내리는 빙하의 광경은 익숙해졌고, 경제 발전을 위해 도시마다 짙게 깔린 스모그는 용인됐으며, 미세 먼지에는 일회용 마스크를 쓰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전염병은 결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인간 활동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자,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 동물들은 인간 근처로 오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박쥐 등 야생 동물들의 몸에 붙어 있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생태계의 ‘계(系)’는 ‘이어지다’, ‘묶다’는 뜻입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을, 어느 한 부분이 사라지면 전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앎은 행동을 수반해야 합니다. 늦었지만 올해부터라도 우리는 그동안 제쳐 두었던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며 주변의 모든 생명과 함께해야 합니다. 편리함의 역설에서 벗어나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행동부터 시작합시다. 궁극적으로는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K 양극화’ 이겨내고 따뜻한 세상 만듭시다

사랑하는 <경향신문> 가족 여러분, 2021년 신축년 새해입니다. <경향>은 올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 더 따듯한 삶의 현장이 되도록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어려운 시기지만 현장으로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진실을 기록하십시오. 끊임없이 현실 너머 진실에 다가가는 여러분의 노고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지난 한 해 여러분이 <경향>을 통해 일궈낸 모든 성과에 감사드리며, <경향>은 올해도 여러분이 직업인으로서 수행하는 모든 활동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신년 첫 주제는 ‘언론사 CEO 신년사’로, 청년기자가 언론사 CEO가 되어 시대정신과 언론의 역할을 제시한다. 지난해 우리를 덮친 코로나는 지구와 생명, 노동과 부의 불평등, 사회적 약자의 고통 문제 등 사회와 인간을 근본에서 돌아보게 했다. 세상에는 여전히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언론은 정파주의에 빠져있다. 뉴노멀이 화두로 떠오른 2021년, 지난해에 이어 언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묻는다. (편집자)

편집 :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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