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사맥(脈)] 브리그레트

“오늘 밤 우리는 유럽연합을 떠납니다. 진정한 국가적 회복과 변화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영국 곳곳에 희망과 기회를 퍼뜨릴 것입니다.”

영국이 유럽연합을 공식 탈퇴하는 브렉시트(Brexit)를 한 시간 앞둔 2020년 1월 31일 오후 10시, 보리스 존슨 총리가 대국민 연설에서 한 말입니다. 당시 브렉시트를 주도한 보수당은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나면 각종 규제에서 벗어나 큰 경제적 이익을 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브렉시트가 발효된 지 3년이 흐른 지금, 영국 경제는 대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며 서민들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브렉시트를 후회하는 분위기를 뜻하는 ‘브리그레트(Bregret)’등의 신조어까지 등장했습니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57%의 영국인이 ‘유럽연합에 재가입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찬성표를 던졌던 51.9%보다 높은 비율입니다. 지난 7년간 어떤 일이 있었길래 영국인들의 마음이 바뀐 것일까요?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영국 시민들이 ‘우리만의 규칙’이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영국 시민들이 ‘우리만의 규칙’이라는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영국 내에서 브렉시트 회의론이 불거진 가장 큰 원인은 경기 악화입니다. 현재 영국의 경제 상황은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로 심상치 않습니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7월 10%를 넘어선 후 계속 두 자리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국 예산책임처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영국 국내총생산(GDP)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4분기 대비 0.2% 감소했습니다. 주요 7개국(G7) 중 팬데믹 이전보다 경제 규모가 쪼그라든 나라는 영국이 유일합니다. 올해 경제 전망도 낙관하기 어렵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발간한 세계전망보고서에서 G7 국가 가운데 영국 경제가 유일하게 역성장(-0.6%)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온갖 경제 제재를 받고있는 러시아(0.3%)보다도 낮은 성장률입니다.

한편에서는 이러한 경기침체가 브렉시트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경기가 나빠진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생한 에너지 위기, 그리고 리즈 트러스 전 총리의 대규모 감세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브렉시트가 물가, 투자, 무역 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영국이 유럽연합을 나가기로 한 결정이 ‘경제적 자해’였다고 비판했습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실시한 2016년 이후 파운드화의 가치는 달러 대비 19% 하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입품의 가격은 더 비싸지고 수출 경쟁력은 떨어져 무역 수지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특히 영국의 중소기업들과 유럽 기업들 간의 거래가 줄었다고 전했습니다. 영국의 중소기업들은 대개 유럽 단일시장에 물품을 판매하며 사업을 확장해왔는데, 브렉시트 이후 복잡해진 통관 절차로 인해 거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역 장벽을 피해 사업체를 아예 유럽 국가로 옮기는 영국 기업들도 늘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영국에서의 고용과 수입도 줄어들고 있죠.

산업 전반에 걸친 노동력 부족 현상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강화된 이민 규정 탓에 영국 경제 성장의 동력이었던 동유럽 출신 저임금 노동자들이 영국을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디언>은 지난달 유럽의 싱크탱크인 유럽개혁센터(CER)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브렉시트 이후 운수, 건설, 농업, 제조업, 도·소매, 서비스 등 저임금 분야 노동력 33만 명이 감소했다고 분석했습니다. 13만 명의 비유럽 출신 노동자들이 새로 유입됐지만, 떠나간 46만 명의 유럽 출신 노동자들을 대신하기는 역부족이었죠. 2015년 약 50%였던 영국 내 외국인 중 유럽인 비율은 지난해 6월 기준 약 20%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습니다.

노동 인력 감소에 따라 영국은 도시부터 농촌까지 곳곳에서 인력난을 겪고 있습니다. 영업을 쉬거나 문을 닫는 식당이 늘어나고, 청소부가 부족해 객실의 수를 줄이는 숙박업소도 생겼습니다. 구인난에 시달리다 못한 일부 식품기업이 정부에 일시적으로 재소자들을 고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2021년 하반기에는 연료나 식량을 유통할 트럭 운전기사가 부족해 주유 대란, 물류 대란이 발생했습니다.

<블룸버그통신>은 영국이 유럽을 떠나기로 결정한 2016년부터 현재까지 국내총생산(GDP)에서 연간 1000억 파운드(154조 14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반면 영국이 유럽 회원국으로 남았다면 현재보다 GDP가 4% 더 늘어났을 것이라고 예상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브리튼(Britain·영국)과 이탤리(Italy·이탈리아)의 합성어 ‘브리탤리(Britaly)’라는 신조어도 등장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영국의 상황이 이탈리아와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영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역풍이 두려워 브렉시트 이전으로 회복하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기를 꺼리는 문제를 뜻하는 ‘방 안의 코끼리’와 같은 이슈가 브렉시트입니다. 전문가들은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저질러 놓고 7년째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12년 동안 집권한 보수당은 데이비드 캐머런부터 리시 수낵까지 4명의 총리를 갈아치우면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지난 1일 10년 만의 최대 규모 파업을 맞았습니다. 교사와 공무원, 기관사 등 공공부문 노동자 최대 50만 명이 동시에 시위를 벌여 연 10%가 넘는 물가 상승률에 발맞춰 임금을 인상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섣부른 정치적 결정으로 위기에 빠진 영국은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요? 이 주의 시사맥(脈), 브리그레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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