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사맥(脈)] 타이틀42

지난 12월 20일 미국 텍사스주 엘페소의 국경 장벽 앞에 수백 명의 중남미 출신 이주자들이 운집했습니다. 이들은 몇 주 전부터 엘페소의 맞은편에 있는 멕시코의 도시 후아레스에 머물다 ‘타이틀42’가 폐기되는 21일을 하루 앞두고 국경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미국 땅에 들어가려고 모인 것입니다. 이들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타이틀42 종료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중남미 이주자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타이틀42는 어떤 제도일까요?

멕시코와 미국 국경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이주자들. 연합뉴스
멕시코와 미국 국경 앞에 줄지어 서 있는 이주자들. 연합뉴스

타이틀42(Title42)는 2020년 3월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가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내린 행정명령입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시행하는 공중보건법을 근거로 미국 국경을 무단으로 넘은 불법 입국자를 강제로 추방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을 담고 있죠.

타이틀42 실시 이전엔 미국에 망명을 신청한 이주자들이 이민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수년 동안 미국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이틀42가 본격적으로 적용된 이후, 불법 이주자들은 국경에서 즉시 추방되어 멕시코 등 본국에 송환됐습니다. CNN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이 정책에 따라 추방된 불법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가 200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타이틀42가 '보건 정책'의 탈을 쓴 ‘반이민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죠.

타이틀42는 본래 1944년 제정된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Service Act)을 뜻합니다. 미국의 연방법은 법 내용에 따라 54개의 ‘타이틀’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중 42번째인 타이틀42는 공중보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공중보건법 6A장 2절 265조에는 질병 전염 위험이 있는 나라로부터 사람이나 물품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연방정부가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로 이 조항을 이용해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이전까지 이 조항을 적용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이 조항을 만들기 한참 전인 1893년 미 의회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법안을 승인하고, 이를 딱 한 번 발동한 적이 있습니다. 수막염이 창궐하던 1929년 중국과 필리핀 출신 이주자들의 미국 입국을 막기 위해서였죠. 20세기 초에 잠시 적용됐다가 사라진 정책을 트럼프 전 대통령이 70년 만에 다시 꺼내 든 것입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타이틀42를 폐기하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완화되면서 이 정책을 유지할 명분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등 시민단체들은 타이틀42가 코로나19 상황 개선으로 수명을 다했고,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권리를 공격한다며 정책 종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미국 국경을 찾아오는 이주자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폭력이 만연한 국가에서 탈출한 이들입니다. 정식 이민 비자를 받을 조건이 못 되는 상황에서 월경을 시도하는 것이죠. 이 소송에 대해 워싱턴 연방법원은 지난 11월 타이틀42가 행정절차법에 위반된다며 12월 21일로 시행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타이틀42는 폐기 수순을 밟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 소속 19개 주 법무장관들이 대법원에 상고하며 상황은 다시 뒤집혔습니다. 이들은 타이틀42 정책이 종료되면 이민이 급증해 공공 서비스에 타격을 주는 등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전부터 공화당 정치인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느슨한 이민 정책을 비판해왔습니다. 무단 입국자가 증가해 몸살을 앓던 곳은 주로 미국 남부 지역인데, 상당수의 공화당 의원이 이 지역을 정치적 근거지로 삼고 있습니다. 공화당 소속 주지사들은 중남미 불법 입국자들을 버스에 태워 민주당 강세 지역인 뉴욕, 워싱턴 등으로 강제 이송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결국 지난 27일 연방대법원은 19개 주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대법관 9명 중 5명이  타이틀42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는데 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정책을 더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에만 적용되던 정책을 쿠바, 니콰라과, 아이티에도 적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 국가와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4개국 국민의 합법적 이민은 매달 3만 명까지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재선 출마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약점으로 꼽혔던 이민 정책을 정면 돌파하려 한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타이틀42 폐기를 기대하며 어렵게 미국 국경을 찾아온 중남미 출신 이주자들의 입국은 이제 힘들어졌습니다. 미 연방 대법원은 오는 2월부터 이 정책을 둘러싼 소송을 본격적으로 심의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종 결정이 예정된 6월까지 타이틀42 정책은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이주자들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이 주의 시사맥(脈), 타이틀42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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