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상(上) 내가 겪은 트라우마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살아남은 10대 남학생이 지난 12월 4일 목숨을 끊었다. 참사 당일 친구 두 명을 잃은 그는 현장에서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학교에 복귀한 상황이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친구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악성 댓글이 트라우마를 더 악화시켰다고 그의 부모는 말했다.

트라우마로 고통받았던 희생자와 유가족, 구조자와 목격자들은 이제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참사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이들이 이제야 꺼낸 말을, 한국 사회는 귀담아들어야 한다. <단비뉴스>는 당시 현장을 기억하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만나, 그들의 트라우마를 들었다. 11월 5일부터 12월 30일까지 모두 10명을 만났고, 그 가운데 두 명을 서면과 대면으로 심층 인터뷰했다. 당시 참상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한국인과 외국인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보도한다. (편집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김지윤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김지윤 기자

12월 30일 오후 3시 10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민아(가명‧24) 씨는 국화꽃을 들었다. 그는 참사 희생자의 영정사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윽고 꽃을 놓았다. 민아 씨는 10‧29 이태원 참사 목격자다. ‘놀러 갔다 죽은 것 아니냐’는 손가락질에 상처받는 일을 그는 두려워한다. 이름과 신분을 드러내지 말라고 그는 <단비뉴스>에 요청했다. 합동분향소를 찾은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어떡해요. 얼굴 보니까 너무 슬퍼요.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사진 속 모습처럼 어딘가에서 평범하게 일상을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사진 속 인물들은 민아 씨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다. 죄책감에서 비롯한 트라우마에 민아 씨는 압도당했다. 다시는 이태원에 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꼬박 두 달이 지나서야 민아 씨는 죽은 이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나니 이제야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민아 씨는 기자와 함께 이태원을 걸으며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두 달 전 이태원역에서 녹사평역까지 도망치듯 걸었던 그 길을, 이제는 녹사평역에서 이태원역으로 향하며 걸었다. 

100m 떨어진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

지난해 10월 29일은 중간고사가 끝난 지 2~3일째 되던 날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민아 씨는 대학 생활의 절반을 비대면으로 보냈다. 시험이 끝났고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도 풀렸다. 그 기념으로 핼로윈을 즐겨보자고 친구들과 약속했다. 모임 장소는 서울 이태원의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있는 어느 술집이었다. 오후 7시에 만난 또래 친구 열댓 명은 술을 마시며 떠들었다. 술을 잘하지 못했던 민아 씨는 양주 반 잔에 물을 한가득 섞었다. 취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재밌는 핼로윈 복장을 한 사람들, 그들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술집에 가득했다. 누군가는 처음 만난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쌓인 피로를 풀기에 좋은 분위기라고 민아 씨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건 밤 11시쯤이었다. 담배를 피우려 술집 밖에 나갔다 들어온 친구 한 명이 “밖에서 불이 났다”고 말했다. 간호사와 의사를 찾는다고도 말했다. 민아 씨는 휴대폰을 켰다. 포털 뉴스를 살폈지만, 이태원에 화재가 났다는 기사는 없었다. 뒤이어 트위터에 접속해 ‘이태원’을 검색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의 사진과 영상이 트위터에 가득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쓰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인근에서 발생한 화재 때문이라면 당장 술집을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민아 씨는 생각했다. 

참사 당시 트위터에서 공유되던 사진. 트위터 갈무리​
참사 당시 트위터에서 공유되던 사진. 트위터 갈무리​

 

15분 후 민아 씨는 술집 입구로 나왔다. 트위터에서 본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술집 앞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평범한 옷차림의 시민 서너 명이 쓰러진 사람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화재가 났는데 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지?’ 민아 씨는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을 술집 안의 손님들은 여전히 몰랐다. 캣우먼 분장을 한 어느 여성은 술집 테이블에 올라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붉은색과 파란색 조명 아래서 즐거운 웃음소리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술집 밖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이곳을 떠나야 해. 살아서 나가야 해.’ 민아 씨는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민아 씨가 있던 가게는 해밀턴 호텔 옆 골목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래픽 김지윤
민아 씨가 있던 가게는 해밀턴 호텔 옆 골목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래픽 김지윤

술에 취한 친구를 데려가기 위해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를 불러 친구 자취방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찰이 이태원역 일대를 통제하던 상황이라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 밖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됐다. 경찰이 술집 앞 골목의 통행을 막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압사 사망자가 나온 해밀턴 호텔 옆 골목에서 민아 씨가 있던 술집은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경찰 통제가 시작되면서 널브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 자리는 피 묻은 냅킨으로 가득했다. 피를 닦을 거즈나 천이 없어 일반 시민들이 급한 대로 인근 식당 냅킨을 사용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지 폭 5.5m 정도의 바닥이 온통 빨간색이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본 건, 민아 씨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압사로 내장이 파열되어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며칠 뒤 언론 보도를 보고야 알게 됐다. 

술집 안에 갇혀 민아 씨와 친구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즐겁게 떠들 수 없었다. “무슨 일이지?” “죽은 사람들은 어떡해?” 상황을 추측하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바깥 상황을 파악한 어떤 이들은 누군가와 심각하게 통화했다. 새벽 1시50분께 경찰의 통제가 풀렸다. 3시간 동안 불안에 떨었던 민아 씨는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택시 어플에서 가장 비싼 값을 지불하는 옵션을 선택하고 나서야 녹사평역 쪽에서 택시가 잡혔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 깨끗해진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피 묻은 냅킨은 사라지고 검은 바닥만 보였다.

민아 씨가 친구들과 머물렀던 술집 앞 골목의 폭은 5.5m 정도다. 참사 당시 이 골목은 피 묻은 냅킨으로 가득했다. 김지윤 기자
민아 씨가 친구들과 머물렀던 술집 앞 골목의 폭은 5.5m 정도다. 참사 당시 이 골목은 피 묻은 냅킨으로 가득했다. 김지윤 기자

경찰은 이태원역 쪽으로 가는 방향을 통제하고 있었다. 반대편 골목으로 걸어 큰길로 나왔다. 그곳엔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십 대의 구급차가 도로 위에 있었다. 차와 차 틈을 비집고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실려 갔다. 인도 옆에는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머리끝까지 파란 천으로 덮여있었다. 천 밖으로 삐져나온 팔과 다리가 보였다. 마네킹 같았다. 사람 피부색이 그렇게까지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민아 씨는 처음 알았다. 눈길을 돌려 경찰이 안내해주는 방향에 따라 걸으려 애썼다. 하지만 걸어가는 내내 파란 천으로 덮인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친구와 함께 10여 분을 걸어 녹사평역에 도착했다. 택시에 오른 뒤에야 민아 씨는 트위터에 다시 접속했다. ‘#이태원압사’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여러 글이 있었다. 그제야 민아 씨는 사람들을 쓰러트린 게 화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1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내가 안전하게 놀고 있을 때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끔찍했다.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이 민아 씨를 감쌌다. 택시 안에서 민아 씨는 다시는 이태원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 도착해 기절하듯 잠들었다.

민아 씨는 이태원 역 근처의 술집에서 녹사평역까지 10분 정도 걸어서 현장을 빠져 나왔다.  그래픽 김지윤
민아 씨는 이태원 역 근처의 술집에서 녹사평역까지 10분 정도 걸어서 현장을 빠져 나왔다. 그래픽 김지윤

트라우마의 시작

10월 30일 아침이 되자, 민아 씨는 인천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부모님과 점심을 먹으며 간밤에 있던 사고에 관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남 일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슬픈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계속 눈물이 났다. 나중에 상담 과정에서 그 눈물이 불안감과 공포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게에 갇혀 있던 상황, 널브러져 있던 사람, 마네킹 같았던 시체 등이 떠올랐다. 적나라한 현장을 목격할 당시에 외면했던 감정이 뒤늦게 몰려왔다. 트라우마의 시작이었다.

이틀 내내 집에만 머물렀다. 집에 있는 동안 종종 눈물이 나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가끔 가족과 대화하며 웃기도 했다. 그렇게 다 치러낸 것으로 여겼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참사 발생 사흘 뒤인 11월 1일, 집을 나섰다.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아 씨는 이내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 식도가 좁아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불안한 감정이 커지면서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왔다. 공황장애 증상이었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며 민아 씨는 버텼다. 입을 다물고 딸꾹질하듯 끅끅거리며 숨을 참았다. 견딜 수가 없어 사람들을 비집고 빈자리에 앉았다. 의식을 잃듯 잠에 들었다 깨며 힘겹게 학교에 도착했다. 

강의실에 도착해서도 증상이 계속됐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많은 사람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강의실 밖으로 나가 숨을 고르고 다시 들어오면, 교수가 며칠 전의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했다. ‘이태원’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다시 과호흡이 왔다. 학교를 벗어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숨을 헐떡였다. 머리에 쥐가 나고 목부터 머리까지 퍼뜩 서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민아 씨는 부모님께 상태를 말씀드렸다. 슬프지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난다고. 너무 힘들다고. 

이튿날인 11월 2일, 민아 씨의 상황을 알게 된 같은 학과 동기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재난심리상담을 지원해주고 있다고 알려줬다. 곧바로 민아 씨는 대한적십자사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받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이라고 상담사는 말해줬다. 당시 현장에서 억누른 감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제야 민아 씨는 본인이 원래 쉽게 우는 성격이라는 걸, 그런데도 술집에서 녹사평역까지 걸어가며 시신을 보는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어요.”

이태원역에 놓인 추모 글귀를 바라보는 민아 씨. 민아 씨는 피해자나 목격자 모임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윤 기자
이태원역에 놓인 추모 글귀를 바라보는 민아 씨. 민아 씨는 피해자나 목격자 모임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윤 기자

이후 민아 씨는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대략 3주 동안 총 4번 대면 상담을 받았다. 상담은 쉽지 않았다. 겪었던 일을 다시 마주하고, 외면했던 감정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래서 상담만 다녀오면 모든 것이 휘몰아쳤다. 두 번째 상담 후에는 머리가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뇌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몸이 너무 가려워 긁기 시작했다. 피부를 손으로 꼬집고 눌렀다. 우울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갯벌에 발이 빠지면 끝도 없이 빠지는 것처럼 우울한 기분이 계속됐다. 상담을 받는 날이 되면 증상은 더 심해졌다. 하루는 너무 괴로워 상담을 가지 못했다.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인 민아 씨에게도 트라우마는 무서웠다. 외부 요인에 의해 정신이 상처받은 것을 트라우마라 한다. 소화불량, 두통, 구토, 배탈 같은 신체적 반응부터 무관심, 무감정, 격정적 감정 변화 같은 정신적 반응을 동반한다. 사람마다 증상이 천차만별로 나타나지만, 의지로 조절할 수 없다.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요인을 마주하면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일상을 잘 보내고 있다가도 갑작스럽게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

민아 씨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요소는 그날 가게에서 들은 노래, 이태원이라는 단어, 구급차와 구급차 소리 등이다. 해당 요소에 노출되면, 손이 떨리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신체적 반응이 나타났다. 민아 씨는 그날 입은 옷을 버리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날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을 건네는데, 트라우마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트라우마는 몸이 반응해요. 조절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요.” 

상담을 받으면서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피해자나 목격자 모임, 집단 상담이 있었다면 더 빨리 괜찮아졌을 것 같다고 민아 씨는 말했다. 얼마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중학생 생존자 소식이 더 슬프게 와 닿았던 이유다. “혼자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아이 곁에 저라도 있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예요.”

상담을 받은 지 3주차에 접어들 무렵부터 민아 씨는 많이 좋아졌다. 상담사가 놀랄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빨랐다. 이대로라면 평화로운 일상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회복의 원동력이 됐다. 과호흡이 오고 공황장애가 와도 민아 씨는 악착같이 학교에 갔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수업을 들으면서 일상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불면증이 심해지면 미친 듯이 밖을 돌아다니다가 기절할 정도의 몸 상태를 만들었다. 상황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민아 씨가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지하철에 탈 때 함께 손을 잡아주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는 함께 밖에서 시간을 보내줬다. 

덕분에 두 달이 지난 지금은 악몽을 꾸지 않는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죽거나,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꿨다. 그래서 한동안 부모님과 함께 잤다. “이제는 다시 혼자 자요.” 민아 씨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슬퍼요. 이제야”

압사 사고가 발생했던 골목의 벽에 붙여진 추모 글을 민아 씨가 읽고 있다. 김지윤 기자
압사 사고가 발생했던 골목의 벽에 붙여진 추모 글을 민아 씨가 읽고 있다. 김지윤 기자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자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생겼다. “이제야 추모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요. 슬프다는 감정이 들고, 그 감정을 감당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민아 씨는 이태원을 다시 찾았다. 절대 이태원에 오지 않을 거라 다짐한 지 두 달 만이었다. 

녹사평역 합동분향소에서 추모한 민아 씨는 기자와 함께 해밀턴 호텔 옆 참사 현장도 방문했다. 머물렀던 술집에서부터 녹사평역으로 빠져나왔던 골목까지, 그날의 동선을 하나씩 되짚어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차분히 설명했다. 인근 카페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마친 민아 씨는 이태원역으로 향했다. 10월 29일 참사 당시에는 경찰의 통제로 갈 수 없었던 지하철역이었다. 헤어지면서 그는 미소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지하철을 타도 너무 괜찮아요.”

지난해 11월과 12월 이태원 추모 현장. 김지윤
지난해 11월과 12월 이태원 추모 현장. 김지윤

하(下)편에는 참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구조한 어느 외국인의 이야기를 담는다.

 

※ 트라우마를 겪었으나 상담을 받지 못한 경우, 참사를 겪은 사람과의 소통이 필요한 경우 기자의 카카오톡 아이디 @lelemon30으로 연락주시면 민아 씨와의 연결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