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 이태원 참사] 하(下) 마음에 남은 사람들

상(上) : 내가 겪은 트라우마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이 지났다. 그 사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서울시와 유가족은 추모 공간 마련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추모는 왜 중요할까.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던 미리암 에스피몰라(17·Myriam Espimola) 씨는 <단비뉴스>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추모에 관해 이야기했다.

미리암 씨는 멕시코에서 지난해 5월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한국어를 배우고 쓰는 것에 흥미와 애정을 느끼고 있다. 현재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선재 기자
미리암 씨는 멕시코에서 지난해 5월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한국어를 배우고 쓰는 것에 흥미와 애정을 느끼고 있다. 현재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선재 기자

“떠난 사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평화롭게 떠날 수 있어요.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서 함께 살 겁니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나 그리움 같은 부정적 감정보다는 그 사람과 함께했던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것. 미리암 씨와 그의 고향인 멕시코에서 죽은 자들을 기리는 방법이다. 그 추모를 통해 우리를 먼저 떠나간 이들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한다고 멕시코 사람들은 믿는다.

고국 음식 그리워 자주 찾던 이태원, 그날은 달랐다.

핼러윈 분위기로 들썩이던 지난해 10월 29일은 멕시코 명절 ‘죽은 자들의 날’(Dia De Los Muertos) 기간이기도 했다. ‘죽은 자들의 날’은 매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죽은 친지와 가족을 기리는 큰 명절이다. 멕시코 사람들은 이 기간에 죽은 이들이 가족과 친지를 만나러 세상에 내려온다고 믿는다. 디즈니 영화 <코코>(Coco)를 떠올리면 쉽다. 멕시코 사람들은 ‘마리골드’(천수국의 한 종류)로 장식한 제단 위에 해골 조형물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죽은 자들을 기린다.

지난해 10월 29일 밤, 미리암 씨가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얼굴에는 죽은 자들의 날을 기념하는 분장이 그려져 있다.  미리암 에스피몰라 제공
지난해 10월 29일 밤, 미리암 씨가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얼굴에는 죽은 자들의 날을 기념하는 분장이 그려져 있다.  미리암 에스피몰라 제공

미리암 씨도 인천에서 멕시코 전통춤을 공연하며 명절을 기념했다. 그 후 저녁을 먹을 겸, 전통 분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겸 친구 한 명과 함께 이태원에 방문했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각, 이태원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멕시코 음식점 대신 편의점에서 냉동 피자를 먹고 세계 문화 음식 거리 건너편에 있는 퀴논 길에 갔다. 그곳에서 밤 10시까지 길가에 앉아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고 분장을 한 사람들도 구경했다.

보광로 9길 일대에 형성된 퀴논 길은 베트남 퀴논 시를 주제로 한 테마 거리이다. 길이 약 300미터(m) 폭 최대 10m에서 최소 4m 정도의 거리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점이 있다. 10월 29일, 퀴논 길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10월 29일 밤, 퀴논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캐서린(Katherine) 제공
10월 29일 밤, 퀴논 길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캐서린(Katherine) 제공

지난해 10월 29일 서울 종합 방재 센터로 접수된 최초 신고 시간은 밤 10시 15분이다. 밤 10시 18분에 종로소방서 소속 종로119안전센터에서 구급차가 출발했다. 구급차는 10시 42분에 현장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각 퀴논 길에 있던 미리암 씨는 서서히 커지는 구급차 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세 시간 동안 머물렀던 퀴논 길에서 이태원로 대로변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40m 길이의 좁고 가파른 계단 골목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태원로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골목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 스피커로 노래를 크게 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미리암 씨의 긴 곱슬머리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와중에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주한 멕시코인 여성단체 채팅방에서 ‘조심하라’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불길한 예감 속에서 미리암 씨는 총기 사고나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골목을 올라온 미리암 씨가 목격한 건 대로변에 눕혀져 방치된 사람들이었다. 그 옆에는 구급차와 구급대원들이 있었다. 경찰은 사람들이 도로에 진입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건너편 해밀턴 호텔 앞에서 윗옷이 벗겨진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한 흑인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는 한국인 남성과 여성이 서 있었다. 세 명 모두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미리암 씨는 망설임 없이 누워있던 여성에게 걸어갔다.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멕시코에서 간호 전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리암 씨는 정식 간호사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응급처치를 할 줄 알았다.

급하게 다가가 보니 누워있던 여성은 의식이 있었고, 옆에 서 있던 남성과 여성도 친구였다.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나 싶어 심박 수를 쟀다. 목에 손가락을 대자,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묻는 말에 잘 대답하지 못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대로면 그가 정신을 잃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의학적으로 옳은 방법은 아니지만, 급한 대로 가지고 있던 향수를 헝겊에 묻혀 냄새를 맡게 했다. 그는 힘없이 팔을 휘적거렸다. 그를 안정시키려고 껴안았다. “함께 있어요, 괜찮아요”(I’m here with you, it’s okay)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 구급대원이 여성을 간이침대에 눕혀 데리고 갔고, 여성의 친구들도 함께 따라갔다. 미리암 씨는 그 후로 조금 더 이태원로에 있다가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명동을 거쳐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였다.

‘나였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괴로워

많은 사상자 중에서도 하필 외국인 부상자가 눈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에게 참사는 그저 남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참사 이후의 밤마다 미리암 씨는 ‘나였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외국인 희생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수업에도 가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미리암 씨는 최선을 다해 일상을 회복하려 했다. 다니고 있던 한성대학교 어학당 수업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홀로 있는 밤에는 트라우마가 찾아왔다. 언제든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찾아왔다.

어학당에서 한 차례 상담을 받았고,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추천받았지만 낯선 사람에게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고 불편했다. 차라리 멕시코에 있는 어머니 혹은 한국에 있는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에게 이야기하는 게 편했다. 울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국어로 속내를 털어놓고 나서야 조금씩 나아졌다. 그리고 가슴 속에 감정을 묻어 두었다.

참사 이후 이태원에는 다시 가보지 못했다. 가서 추모 편지를 남기고 싶었지만, 현장을 다시 보기가 두려웠다. 한 번 감정을 꺼내면 일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신 그는 방안에 마련해 놓은 작은 추모 공간에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카드를 작성해 붙였다.

미리암 씨의 방 한쪽에는 작은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이 있다. 벽에 붙어있는 카드는 이태원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붙여놓았다. 옆에 놓인 꽃은 ‘마리골드’다.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미리암 에스피몰라 제공
미리암 씨의 방 한쪽에는 작은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아래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이 있다. 벽에 붙어있는 카드는 이태원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붙여놓았다. 옆에 놓인 꽃은 ‘마리골드’다.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미리암 에스피몰라 제공

아직 남겨진 상처를 극복하긴 쉽지 않다.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30~40분이면 이태원에 갈 수 있지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을 들을 때면 화가 난다. 아직 한국어가 완벽하진 않아서 복잡한 상황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고 있다고 미리암 씨는 말했다. 그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을 마음에 간직할 때, 비로소 상처를 치유하는 추모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살아남은 10대 남학생이 지난 12월 4일 목숨을 끊었다. 참사 당일 친구 두 명을 잃은 그는 현장에서 구조되어 치료를 받고 학교에 복귀한 상황이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며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친구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는 결국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악성 댓글이 트라우마를 더 악화시켰다고 그의 부모는 말했다.

트라우마로 고통받았던 희생자와 유가족, 구조자와 목격자들은 이제야 목소리를 내고 있다. 참사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이들이 이제야 꺼낸 말을, 한국 사회는 귀담아들어야 한다. <단비뉴스>는 당시 현장을 기억하는 한국인과 외국인을 만나, 그들의 트라우마를 들었다. 11월 5일부터 12월 30일까지 모두 10명을 만났고, 그 가운데 두 명을 서면과 대면으로 심층 인터뷰했다. 당시 참상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한국인과 외국인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보도한다. (편집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