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기사 내용을 그대로 녹음한 음성파일입니다.

독서가 하고 싶어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 시각장애인이다. 비시각장애인이 읽는 시각적 글은 먹으로 쓴 글이라 하여 ‘묵자’(墨字)라고 한다. 우리가 읽는 일반도서인 묵자는 시각장애인에게 책 역할을 못한다. 대신 시각장애인은 ‘점자’(鮎字)로 세상을 읽는다. 점자는 손가락으로 더듬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시각장애인용 문자다. 작고 둥근 6개의 점이 모여 한 칸이 된다. 6개의 점은 세로 3점, 가로 2점으로 구성돼 있다. 어떤 점을 돌출시키는지에 따라 63개의 다른 점형이 생기며, 이 점형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글을 점자로 쓸 경우 각각의 자음과 모음을 풀어쓴다. 예를 들어, ‘책’이라는 단어는 ‘ㅊ’ ‘ㅐ’ ‘ㄱ’과 같이 풀어서 쓴다. 임효진 기자
한글을 점자로 쓸 경우 각각의 자음과 모음을 풀어쓴다. 예를 들어, ‘책’이라는 단어는 ‘ㅊ’ ‘ㅐ’ ‘ㄱ’과 같이 풀어서 쓴다. 임효진 기자

시각장애인을 위해 각종 도서를 점자로 고친 책을 ‘점자도서’라 하고, 묵자도서를 점자도서로 바꾸는 일을 ‘점역’이라고 하며, 점역하는 이를 ‘점역교정사’라 부른다. 점역교정사는 시각장애인과 세상을 잇는 사람이다.

점역교정사가 점자책을 만드는 과정은 번역과 닮았다. 글을 단순히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묵자의 체계로 된 책을 점자의 체계로 자연스럽게 녹이는 작업이 점역이다. 한 권의 책을 창조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를 점자에 녹이는 일

국토지리정보원이 기획·발행한 점자 지도책을 차상현 세종점자도서관 점역교정사가 소개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국토지리정보원이 기획·발행한 점자 지도책을 차상현 세종점자도서관 점역교정사가 소개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차상현(40) 세종점자도서관 점역교정사는 1급 점역교정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아무한테나 주는 자격증이 아니다. 국어와 영어는 기본이고, 수학, 과학, 음악, 일본어, 컴퓨터 등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과 각 점자규정을 완벽히 숙지하고 있다는 검증을 거쳐야 점역교정사 자격증을 받는다. 1~3급으로 구분된 자격증 가운데 1급을 받으려면, 국어를 포함해 세 과목에서 능숙한 점역교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1급 점역교정사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2020년 기준으로 전국에 940명이다.

차 점역교정사는 국어, 영어, 수학 분야의 책을 점역한다. 특히 수학책의 점역은 쉽지 않다. 국어와 영어책은 점역 프로그램을 통해 1차 번역이 가능하지만, 수학이나 음악 관련 책은 사람이 직접 묵자를 점자로 표기하는 수작업으로 점역한다. 게다가 수학은 표와 그래프를 시각장애인을 위해 말로 풀고 이를 다시 점자로 표기해야 하므로 수학 전반에 대한 전문지식이 꼭 필요하다. 수학 관련 책에 표가 있으면 정말 어려운 작업이 시작된다. 행과 열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표 한 칸에 여러 줄의 글이 들어가면, 점자로 표현하는 게 어려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표의 내용을 시각장애인들에게 전달하려고 그는 머리를 쥐어짠다. 

그 일을 10년째 하고 있는 차 점역교정사는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좋은 눈의 시력이 0.02 이하에 속하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6살 이후 시력을 잃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부산에 살면서 맹학교를 다녔다. 그에게 점자는 세상을 보는 도구였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면서 점역교정사의 길로 들어선 것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점역 서비스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점역교정사라는 직업도 생소한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점역교정사가 전국에 100명이 채 안 됐다. 차 점역교정사의 대학 공부도 쉽지 않았다. 근방에 점자도서관이 있었지만, 점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았다. 강의 내용을 녹음해 두세 차례 반복해 들었다. 지인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많다. 시각장애인들이 비시각장애인 위주로 짜인 교육과정을 따라갈 때 흔히 겪는 일이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학교재가 없으니, 대학 수업을 따라가려면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해야 한다.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점역교정사 시험대비 교육을 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누리집 갈무리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점역교정사 시험대비 교육을 하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 누리집 갈무리

점자를 만지며 다듬는 점역교정

그 노고를 젊은 시각장애인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차 점역교정사는 점역과 교정에 공을 들인다. 일반 활자 매체를 점자로 번역하는 사람을 점역사라고 하고, 번역된 점자가 제대로 됐는지 검수하는 사람을 교정사라고 하는데, 그는 점역과 교정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주로 맡는 일은 교정이다. 문서의 텍스트를 인식하는 OCR(Optical Character Reader) 프로그램을 이용해 글자를 추출하고, 이를 또다른 점역프로그램으로 점자로 바꿔내면, 이때부터 차 점역교정사의 일이 시작된다. 

점역프로그램이 만들어낸 점자를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말이 되게’ 다듬고 고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같은 모양의 점자여도 앞뒤 문맥에 따라 숫자가 되기도 하고 알파벳이 되기도 한다. 규정을 지키면서 문맥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문법에 맞는지,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는지, 문장이 매끄러운지, 오탈자는 없는지 등도 살핀다. 외국 도서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원래 뜻을 살리되 더 아름다운 한국어를 고민하는 전문번역가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용 점자정보단말기인 ‘한소네’를 사용한다. 점자로 찍힌 글을 읽는 디스플레이 장치, 그리고 이를 다시 점자로 교정하여 입력할 수 있는 키보드가 있는 기계다. 차 점역교정사는 빠른 손놀림으로 32칸의 점자 디스플레이를 훑으며, 6개의 키보드를 두들겨 점자를 고치고 다듬는다.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시각장애인용 점자정보단말기인 ‘한소네’로 점자를 교정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시각장애인용 점자정보단말기인 ‘한소네’로 점자를 교정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점자를 교정하는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32칸의 점자 디스플레이를 훑으며, 키보드로 문장을 고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점자를 교정하는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32칸의 점자 디스플레이를 훑으며, 키보드로 문장을 고치고 있다. 임효진 기자

그는 한 달에 약 10권 정도의 책을 점역한다. 주로 세종점자도서관이 자체 기획한 도서를 점역하는 한편, 외부에서 의뢰가 들어오는 시험지나 공문서의 점역도 한다. 최근에는 세종시에서 먹고 놀며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을 소개하는 책자를 점역했다.

11월4일은 한글점자 만들어진 날

점역에 대한 ‘외부 의뢰’의 주인공은 점자도서관 이용자들이다. 한 사람이라도 어느 책의 점역을 원하면, 점역교정사가 나선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 학생을 위한 교과서, 수험생을 위한 수험서, 교양을 위한 문학 등 점역 요청이 들어오는 책의 분야는 다양하다. 얼마 전에는 대전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어머니가 학생을 위한 참고서 제작을 의뢰했다. 초등학생을 위한 참고서에는 그림이 많았다. 표나 그림과 같은 시각자료를 점자로만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럴 때마다 차 점역교정사의 능력이 발휘된다. 어떻게 점역해야 시각장애인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책을 곧잘 점역하는 그에게도 큰 도전이 있다.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그림 점자를 만드는 것이다. 눈으로 강아지를 직접 봤던 사람은 점자를 만져 강아지 모양을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강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손으로 강아지를 만진 경험이 있더라도 입체적으로 촉각한 대상과 종이의 평면에 점자로 표현한 방식이 달라, 그 모습을 전달하기 어렵다. 이렇듯 아동·청소년 도서의 점역에는 점자 지식을 넘어 창의적 방식이 필요하다. 그들을 위해 어떤 촉각 방식을 도입할 것인지, 차 점역교정사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세종점자도서관에서 만든 '밤하늘의 작은 별자리 동물원 황도 12궁' 점자책을 소개하기 위해 제목을 확인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차상현 점역교정사가 세종점자도서관에서 만든 '밤하늘의 작은 별자리 동물원 황도 12궁' 점자책을 소개하기 위해 제목을 확인하고 있다. 임효진 기자
촉각도서 '밤하늘의 작은 별자리 동물원 황도 12궁' 중에 쌍둥이자리. 까만 점과 선들이 볼록하게 나와 있어 촉각으로 별자리 모양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임효진 기자
촉각도서 '밤하늘의 작은 별자리 동물원 황도 12궁' 중에 쌍둥이자리. 까만 점과 선들이 볼록하게 나와 있어 촉각으로 별자리 모양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임효진 기자

차 점역교정사는 별, 은하, 그리고 은하계를 다루는 책을 점역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비시각장애인이) 블랙홀 사진을 보면서 나에게 설명을 해줬는데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졌다. 그것을 촉각으로 표시해서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시각장애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차 점역교정사의 우주는 아직 넓지 않다. 장애인복지법 제22조 5항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시각장애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점자도서와 음성도서 등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법에 명시된 대로 각 시·도마다 점자도서관이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반대다. 2016년 44곳이었던 국내 시각장애인도서관은 2020년 기준 30곳으로 줄었다. 그나마 절반이 넘는 16곳은 서울에 있고, 나머지도 주로 대도시에 있다. 

오는 11월 4일은 점자의 날이다. 한글 체계를 점자로 옮긴 ‘훈맹정음’이 만들어진 날을 기념하여 제정됐다. 한글점자가 만들어진 지 96년이 됐어도 점자도서관이 오히려 줄어드는 세상에서 차 점역교정사는 묵묵히 점역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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