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미치코 가쿠타니 지음/돌베개/13,000원

2021년 1월 6일, 미국 의사당이 점령당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배하자 부정선거라고 주장했다. 그날 오전 백악관 앞에서 “죽도록 싸우라”며 지지자를 선동했다. 지지자들은 연방의회 의사당 창문을 깨고 난입했다. 상원의장석을 점령하고 무장 난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경찰을 포함해 5명이 사망했다. 이들의 의회 폭동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협당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의회폭동이 일어나기 3년 전, 민주주의를 향한 공격을 예견한 책이 발간됐다. 일본계 미국인 비평가 미치코 가쿠타니가 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표지. 돌베개 누리집 갈무리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표지. 돌베개 누리집 갈무리

책의 원제는 ‘진실의 죽음: 트럼프 시대의 거짓말에 대한 고찰’(The Death of Truth: Notes on Falsehood in the Age of Trump)이다.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이 위협받으면 민주주의 역시 위험에 빠진다고 말한다. 특히 트럼프 시대에 진실에 대한 공격이 극대화됐다. 일상적으로 허위조작정보를 퍼뜨리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선동 도구로 사용하며 사람들의 공포와 공격성을 조장하는 트럼프의 면모 때문이다. 저자는 트럼프 시대를 진실보다 감정이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한다. 그리고 진실이 공격당하는 현실의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분석한다. 일상에 스며든 포스트모더니즘, 우파 포퓰리스트들의 선동, 그리고 디지털 환경이다.

미치코 가쿠타니는 <뉴욕타임스>에서 문학과 서평을 담당하는 기자로 35년 동안 일했다. 1998년에는 비평 분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정작 자신은 책을 쓰지 않았는데, <뉴욕타임스>를 퇴직하던 무렵에야 이 책을 발간했다.

자기 정당화의 도구가 된 포스트모더니즘

가쿠타니는 거대 서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현상에 일조했다고 분석했다. 원래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거부하는 저항적 사조였다. 이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에 저항하는 도구가 되었고, 개인의 개성과 독창성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또한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다양한 위치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기술하면서 진실을 풍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실을 객관적 실체가 아닌 서로 다른 관점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진실은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였다고 저자는 비판했다.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전용’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대안 사실’(alternative fact)이라는 용어다. 원래는 실체적 진실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서로 경합하는 사실을 지칭하는 법률 용어였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고문이던 캘리앤 콘웨이가 사실이 아닌 내용을 ‘대안 사실’이라고 표현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잘못된 사실 또는 거짓을 틀렸다고 정정하는 게 아니라 대안 ‘사실’이라고 표현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진실을 주관적 개념으로 다루면서,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주장에 사회적 권위를 싣는 일도 발생했다. 예컨대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거나, 기후위기를 단지 하나의 입장으로 다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가쿠타니는 트럼프의 거짓말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하나의 지표일 뿐이라고 말한다. 트럼프는 일상적으로 미국의 언론, 사법제도, 정보기관, 선거제도, 공무원을 공격한다. 실증적인 지표를 증거로 정책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기분에 따라 결정한다. 책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분석가들에게 “과학 기반” “증거 기반”이라는 말의 사용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문가들은 정부 자문위원회에서 밀려났다.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적인 제도는 하나씩 망가졌다.

'CNN'은 한 광고에서 사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떤 사람들이 이걸 바나나라고 주장해도 이것은 사과’라고 말한다. 사실을 다루는 언론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유튜브 채널 ‘광고의 모든 것’ 갈무리
'CNN'은 한 광고에서 사과 사진을 보여주면서 ‘어떤 사람들이 이걸 바나나라고 주장해도 이것은 사과’라고 말한다. 사실을 다루는 언론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유튜브 채널 ‘광고의 모든 것’ 갈무리

만들어지거나 숨겨지는 현실

진실을 상대적 개념으로 치부하는 상황에서는 독재자가 힘을 얻기 쉬워진다고 가쿠타니는 지적했다. 유권자의 두려움과 분노를 자극해서 손쉽게 거짓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가짜뉴스를 활용해 미국을 ‘범죄로 휘청거리는 나라’로 묘사했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미국의 범죄율은 1991년 최고치에 이른 뒤, 현재는 그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또한 트럼프는 이민자가 미국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2000년 이후 노벨상을 받은 미국인 78명 가운데 31명이 이민자였고, 첨단 기술 기업 설립을 도운 사람의 60%가 이민자와 그 자녀들이었다.

가쿠타니는 또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저 희생자를 찾는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의 편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문제의 원인을 돌려서 오히려 자신들의 세를 키운다는 것이다. 그 주장의 위세는 처음엔 미미해 보이지만, 자극적인 언어를 통해 천천히 “사람들의 살과 피에 스며든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불안하거나 사회에 균열이 생겼을 때 이들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들의 선동이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소득불평등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를 자극했고, 이후 미국에서 이민자에 대한 혐오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논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

포퓰리스트의 선동은 디지털 환경에서 날개를 달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세계를 연결한 인터넷은 허위조작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는 통로가 됐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보고 여러 번 공유되는 게시물이 가치를 얻는다. 그리고 조회 수는 감정 영역을 자극할수록 높아진다. 게시물이 선정적이고 기괴하며 공포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등의 원초적인 감정에 기댈수록 널리 퍼진다는 것이다. 결국 디지털 환경에서 독재자들은 분노를 ‘활용’해서 힘을 얻는다고 가쿠타니는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알고리즘 문제 역시 지적한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선택한 것을 통해 관심사를 알아내고, 그와 관련한 정보만 계속 노출시킨다. 자신과 반대되는 생각을 접할 기회는 없고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디지털 환경에서는 뉴스 역시도 “극렬한 공화당 지지자부터 가장 극렬한 민주당 지지자까지 적절한 시청자에게 딱 맞춘 사이트와 발행물이 제공”되고 있다고 한탄한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사회의 분열이 “깊고 단순”해지는 데 있다. 디지털 환경, 그리고 그 기본 원칙인 알고리즘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논쟁하는 능력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진실은 민주주의의 주춧돌

허위조작정보는 비판적 사고능력도 소진시킨다. 수많은 거짓말에 노출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피곤해지고, 결국 그런 거짓말에 무뎌진다. 정치인의 거짓말이 반복될수록 시민들은 정치에 대한 기대를 잃고, 정치를 체념하거나 냉소한다. 결국 진실이 위협받는 시대에 사람들은 사회적 저항을 멈추고 개인 생활에만 천착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쿠타니는 트럼프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실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공동의 토대 위에서 논쟁하는 게 필요한데, 그러한 공동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 그리고 그런 진실을 전파하는 제도다. 진실의 힘이 굳건할수록 사회적 기준에 따라 정책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공무원 후보자를 평가하며, 선출직 공무원이 국민에 대해 책임지게 만들 수 있다.

책의 첫 장에는 “어디서든 뉴스를 알리려 애쓰는 저널리스트들을 위해”라는 문구가 있다. 가쿠타니는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현시대에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언론은 진실에 다가가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진실의 가치를 믿고 진실을 알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가치를 되살릴 힘은 언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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