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탁월한 스토리텔러들

탁월한 스토리텔러들/이샘물, 박재영/이담북스/25,000원

인상 깊은 기사를 쓴 미국 기자들에겐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담북스
인상 깊은 기사를 쓴 미국 기자들에겐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담북스

한국 기자들은 ‘하루살이 생태계’에서 일한다. 공공기관, 국회의원, 시민단체가 자료를 발표하면 기자들은 쏟아지는 정보를 정리하여 기사로 옮긴다. 이 기사는 발표 당일을 넘기지 않고 세상에 나온다. 같은 자료를 보고 제한된 시간 안에 쓰는 ‘하루살이’ 기사는 누가 쓰든 차별점이 거의 없다.

한국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고 미국에서 현지 언론계를 연구한 두 저자는 이 관행에 질문을 던진다. 천편일률인 정보 정리 형식의 기사 말고, 다르게 쓸 수는 없을까? 언론계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언론계에 그 답이 있다. 미국 기자들은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정보를 전한다. 저자는 최근 20여 년 동안 미국 유력 언론사들이 세상에 내놓은 66건의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다.

기사의 구조를 설계하라

미국 기자들은 ‘야마’가 아니라 ‘앵글’로 기삿거리를 찾는다. 한국 언론에서 쓰는 은어인 ‘야마’는 뉴스 가치가 있는 정보를 뜻한다. 한국 기자들은 ‘야마’를 중심으로 육하원칙에 따른 핵심 정보를 전달한다. 반면 ‘앵글’은 그 정보에서 기자가 중점을 두고 강조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미국 기자들은 남다른 앵글을 찾는 데 주력한다.

화재 지역 주민 맥스 해리스는 사고 이전부터 위험성을 알고 방치한 오클랜드 주정부 대신 과실 책임이 있는 용의자로 기소됐다. 뉴욕타임즈 매거진 갈무리
화재 지역 주민 맥스 해리스는 사고 이전부터 위험성을 알고 방치한 오클랜드 주정부 대신 과실 책임이 있는 용의자로 기소됐다. 뉴욕타임즈 매거진 갈무리

<뉴욕타임즈 매거진>의 엘리자베스 웨일(Elizabeth Weil)이 2018년 보도한 기사는 새로운 앵글의 예시다. 36명이 사망한 화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뒤였다. 이미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많았다. 하지만 화재에 책임이 있다는 혐의로 기소된 2명의 용의자 가운데 1명인 맥스 해리스(Max Harris)를 조명한 기사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불이 났는지, 이들이 어떤 혐의로 기소됐는지가 ‘야마’라면 새롭게 보도할 정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일 기자는 새로운 앵글을 찾았다. 맥스 해리스라는 인물을 기사의 중심에 두고 화재를 새롭게 들여다본 것이다.

저자는 미국 기자들이 뉴스의 핵심을 잘 전달하면서도 특색 있는 요소를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색다른 앵글이 기사의 존재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사안을 다루는 수많은 기사가 있어도 초점을 다른 곳에 뒀다면 새로운 기사를 쓸 수 있다.

앵글이 기사의 시작점이라면, 스토리는 기사의 살이다. 인물을 중심에 세우고 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미국 기사는 독자의 공감을 얻어낸다. 한국 기사에서 인물은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것에 그치지만, 미국 기사에서는 인물이 스토리의 중심에 선다. 이를 위해 미국 기자들은 취재원의 삶에 밀착하면서 집요하게 관찰한다. 생생한 묘사로 스토리의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서다.

미국 기자들이 스토리를 찾는 이유는 독자에게 핵심 정보를 더 잘 전달하는 데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스토리는 독자를 기사 속으로 끌어오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메시지가 함축된 구체적 인물의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기사의 주제를 이해한다. 저자는 “성폭행 피해는 소수의 일이지만 제도의 허점이라는 의미는 보편적”이라고 적었다. 성폭행 피해자의 생생한 스토리를 읽은 사람들은 제도의 허점이 얼마나 문제인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앵글, 스토리 다음으로 중요한 기사의 요소는 구조다. 미국 기자들은 기초 취재 직후부터 기사의 구조를 짠다. 전달하려는 주제, 주제를 보여주는 장면, 장면의 배경을 설명하는 근거를 잘 조합해 배치한다. 특정 상황에 집중하는 ‘줌 인’(zoom in), 전체 상황을 보여주는 ‘줌 아웃’(zoom out)을 반복하고, 독자를 애태우면서 핵심 정보를 나중에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기사 구조 설계는 독자로 하여금 기사를 끝까지 읽도록 끌고 가는 바탕이 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이러한 극적 효과를 궁리한다고 해서, 사실을 함부로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 언론에는 엄격한 보도 윤리 기준이 있다. “최대한 정보를 공개한다”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취재와 보도의 모든 단계에 적용된다. 언론은 취재원과 독자에게 최대한 정보를 공개한다. 언론의 신뢰성과 진실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ABC 뉴스 기자 2명은 생고기를 비위생적으로 보관·유통한다는 제보를 받고 대형마트 라이언 푸드 지점 3군데에 위장 취업했다. ABC 뉴스 유튜브 영상 갈무리
ABC 뉴스 기자 2명은 생고기를 비위생적으로 보관·유통한다는 제보를 받고 대형마트 라이언 푸드 지점 3군데에 위장 취업했다. ABC 뉴스 유튜브 영상 갈무리

저자는 1992년 비리 취재를 위해 허위정보를 기재하고 위장 취업한 <ABC 뉴스> 기자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한 사례를 소개한다. 이 사건 이후 대부분의 미국 기자들은 취재할 때 신분을 숨기지 않는다. 기사가 독자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취재 방식도 진실해야 한다는 원칙이 미국 언론계 전반에 퍼졌다.

기자 신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만큼, 취재원에게도 엄격하다. 미국 기자들은 취재원의 말만으로 기사를 쓰지 않는다. 공문서와 제3자를 통한 교차 검증은 기본이다. 저자는 “언제든지 취재원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다”는 백악관 출입 기자의 말을 인용한다. 한국 언론계에서는 취재원과 끈끈한 관계를 권장하지만, 미국 기자들은 사적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취재하지 않고 취재원의 사적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저자는 미국 언론계에 취재원과 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 기자들은 대중에게도 최대한 정보를 공개한다. 취재원의 실명은 대중에게 반드시 공개해야 하는 정보다. 대중은 기사에 드러난 취재원의 정보를 근거로 그의 말을 믿을지를 결정한다. 미국 언론은 대중이 보도의 신뢰성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기사는 독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미국 기사의 출발점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기사를 수정했다는 구체적인 기록도 기사를 볼 때마다 함께 확인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한다. 적극적인 정정이 신뢰도를 높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뉴욕타임즈는 아니지만

뉴스 유통 채널이 다변화하면서 뉴미디어가 등장했다. 앵글, 스토리, 그리고 기사 구조 설계의 과정은 뉴미디어에도 적용된다. UC버클리 저널리즘 부설 고급 미디어 연구소는 멀티미디어 기사를 제작할 때 스토리보드를 활용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교육한다. 영화 제작을 준비하듯이 장면과 설명을 구성하고, 각각을 분리해서 어떤 미디어로 전달할지 정한다. 미디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사를 보도하는 것이 기사 설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미국 기자들은 이제 어떤 미디어를 써야 더 생생하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원칙은 더 중요해졌다. 멀티미디어 환경에서 기자들은 이전보다 더 다양한 사람과 일한다. 디자이너, 데이터 분석가, 영상 전문가, 그래픽 전문가 등과 협업해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저자는 “혼자서 정보를 갖고 있지 말라”는 데이터 저널리스트 하셀 팔라스(Hassel Fallas)의 조언을 인용해 협업의 핵심이 정보의 투명한 공유라고 설명한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아직 한국 언론계에서는 체계적인 설계와 스토리텔링 기법에 관해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인력 부족과 재정난에 시달리는 국내 언론사가 미국 대형 언론사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미국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분석하고 설명한 이 책은 새로운 취재와 보도를 원하는 한국의 모든 기자들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시도할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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