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교양특강] 김호기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기성 정치 엘리트를 공격하며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인이 세계적으로 득세하고 있다. 이들은 ‘가짜뉴스’로 불리는 허위조작정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급진적 포퓰리즘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요인으로 꼽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7년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3.6%가 ‘가짜뉴스로 한국 사회의 분열이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기(62)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2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인문사회교양특강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포퓰리즘과 탈진실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포퓰리즘과 탈진실 시대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연한 그는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해법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지난 4월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South Korea’s Democracy in Crisis)를 영문판으로 편찬하는 등 정치사회학자로서 활발한 연구·저술을 하고 있으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했다. 

진보의 시대, 보수의 시대에 이어진 ‘포퓰리즘의 시대’ 

김호기 교수가 충북 제천시 세명대학교 학술관에서 ‘포퓰리즘과 탈진실 시대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윤준호
김호기 교수가 충북 제천시 세명대학교 학술관에서 ‘포퓰리즘과 탈진실 시대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윤준호

김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말을 빌려 “(1930년대) 대공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가 진보의 시대, 1970년대 중반부터 2008년까지가 보수의 시대였다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는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말했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 프랑스의 ‘국민연합당’(과거 국민전선),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이탈리아의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등이 대표적 예라고 그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21세기 포퓰리즘이 ‘인기 영합주의’라는 전통적 의미의 포퓰리즘과 다른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첫째, 이념 구도를 망라해 존재한다. 트럼프 현상은 우파, 샌더스 현상은 좌파의 성격을 띤다. 프랑스 국민연합당과 독일의 AfD가 극우라면 스페인의 포데모스와 그리스 ‘시리자’(SYRIZA)는 좌파다.

둘째로 엘리트 대 국민의 대립을 부각한다. 포퓰리스트는 기득권 엘리트에 맞서 국민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내건다. 김 교수는 “이 두 번째 특성이 21세기 포퓰리즘의 성공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국민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국민 주권을 지키겠다는 포퓰리스트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엘리트의 기득권을 강화한다’며 미국의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선동했다.  

셋째로 포퓰리스트는 정치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포퓰리스트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만을 진정한 국민으로 여기며 편을 가른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은 가짜 국민으로 치부하며 국민 안에 균열과 적대를 만들고 이를 활용한다. 이민자·난민·무슬림은 포퓰리스트의 단골 희생양이다. 독일의 AfD는 난민·무슬림을 적대시하는 정서를 등에 업고 2017년 총선에서 연방의회에 94명을 입성시켰다. 

소셜미디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추기는 ‘탈진실’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을 말한다. 김 교수는 소셜미디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이 탈진실 시대의 도래와 지속에 배경이 됐다고 진단했다.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개인주의적 경향’과 ‘외로워서 붙들고 있으려는 공동체주의적 경향’이 동시에 나타나는 소셜미디어는 과거 신문과 방송으로 한정됐던 공론장을 무한 팽창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조인데, ‘너도 옳고 나도 옳고, 우리 모두 각자가 옳다’는 극단적 다원주의를 불렀다. 

김 교수는 탈진실의 경향으로 사실과 주장, 정보와 오락, 진실과 허위가 혼재되고 결합해 공론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탈진실은 전통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도 이어진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2017년 설문에서 ‘뉴스 매체가 정치적 사안을 공정하게 보도하는지’ 묻는 항목에 한국인의 27%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김 교수는 “건강한 공론장 없이 건강한 민주주의는 없다”며 “가짜뉴스에 맞서는 제도 개혁과 일상적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이 김호기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날 현장과 줌 화상회의 등을 통해 40여 명의 청중이 참여했다. ⓒ 윤준호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이 김호기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날 현장과 줌 화상회의 등을 통해 40여 명의 청중이 참여했다. ⓒ 윤준호

파시즘·공산주의에 이어 직면한 대결  

김 교수는 민주주의를 “사회구성원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현실적으로 가장 유능하고 바람직한 제도”라며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라고 규정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 대결했고, 냉전 시기엔 공산주의와 대결했으며 지금은 포퓰리즘과 대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동의한다’(agree to disagree)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의 말이 민주주의의 정수라며, 정치적 다원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이 포퓰리즘이 비판받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민주주의가 맞닥뜨린 세 번째 모멘트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선 정치세력 간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당은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는 집단이지만 동시에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걸 제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제도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법과 정치가 구별되는 건 이 둘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협치와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헌법재판소로 가는 한국에서 정치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이뤄지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포퓰리즘이 발흥하게 된 배경인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가 적극적인 고용과 조세·복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연에 이어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질의 답변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과 온라인으로 참여한 청강생들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 윤준호
강연에 이어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질의 답변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생들과 온라인으로 참여한 청강생들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 윤준호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신유미(25·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씨는 포퓰리즘을 꼭 부정적으로 봐야 하는지 물었다. 김 교수는 “권력과 자본을 독차지한 엘리트에게 노동자 계급이 대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포퓰리즘에 긍정적 요소가 있을 수도 있다”며 “그러나 (자기들만이 진정한 국민이라고 보는) 반다원주의적, 적대적 성격은 공존을 모색하는 민주주의에 위험한 정치이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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