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백 년’ 꿈꾸는 제천 대림문구사

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186-4번지에 대림문구사가 있다. 건물 지상층을 모두 사용하는 약 165㎡(50평) 규모의 문구사다. 문구류와 사무용품을 취급하고 컬러복사도 한다. 가운데 문 옆에 ‘백년가게’라고 적힌 표지가 붙어있다. 문구사에 방문하는 손님마다 ‘여기가 백 년이나 됐느냐’하며 신기해한다.

사실 ‘백년가게’는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가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인증한 업력 30년 이상의 가게다. 그러니까 백 년이 된 가게가 아니라 백 년을 바라보는 가게라는 말이다. 충북 제천에는 모두 10곳이 있다. 식당이 아닌 가게는 이곳 대림문구사가 유일하다.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백년가게’ 인증 표지. ⓒ 손민주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백년가게’ 인증 표지. ⓒ 손민주

39년 전 새 학기를 하루 앞둔 날, 1983년 3월 1일 제천 천남동 명동 로터리 인근에 대림문구사가 문을 열었다. 49㎡(15평)가 조금 넘는 규모였다. 엄기일(69) 사장은 낮에는 학생들에게 문구류를 팔고 밤에는 도매용 사무용품을 포장했다. 주변에 동명초등학교와 의림여자중학교를 포함해 4~5곳의 학교가 있었다. 덕분에 먹거리는 팔지 않았는데도 학생 손님이 많았다.

샤프연필과 영단어 암기장이 효자 상품

80년대 대림문구사는 학용품과 준비물을 사러 오는 학생들로 붐볐다. 공책이나 샤프연필 같은 필기구가 가장 잘나갔다. 문화연필사의 ‘뉴버튼 샤프펜슬’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뉴버튼 샤프펜슬’은 독특하게 샤프심을 나오게 하는 버튼이 샤프연필의 맨 위가 아닌 펜을 쥐는 하단에 있었다. 가격은 500원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가격과 같다. 개인용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신상 필기구는 가격 상관없이 인기가 좋았다.

영단어 암기장도 지금의 대림문구사를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1987년에는 5차 교육과정 개정으로 영어 교육이 문법 중심으로 개편됐다. 바뀐 교육과정에 맞춘 교과서와 영단어 암기장이 새로 나왔다. 이 암기장을 생산하는 공장이 전국에 몇 개 없었다. 수백만 원을 선금으로 줘도 일주일에 한 상자를 겨우 납품받았다. 엄 사장은 전 재산 100만 원을 갖고 대구로 갔다. 대구의 교과서 생산 업체 ‘청기사’의 사장에게 물건을 팔아달라고 사정했다. 젊은 사장의 정성에 감동한 청기사 사장은 매일 한 상자씩 영단어 암기장을 보내줬다. “매일 팔고 돈 부치고, 팔고 돈 부치고”를 반복한 덕에 개업 10년째인 1993년에 지금의 화산동 자리로 옮겨왔다.

1990년대 화산동으로 이사 온 대림문구사 전경. 지금은 식육식당이 있던 자리까지 확장했다. ⓒ 엄기일 제공
1990년대 화산동으로 이사 온 대림문구사 전경. 지금은 식육식당이 있던 자리까지 확장했다. ⓒ 엄기일 

“요즘은 애들 떠드는 소리를 듣기 어렵다”

여느 문구점처럼 ‘물건을 훔치는 녀석’도 있었다. 90년대 어느 날, 엄 사장은 한 초등학생이 지우개를 주머니에 넣고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는 걸 불러 세웠다. 덜미를 잡힌 학생은 같이 물건을 훔친 자기 친구들 이름까지 모두 불었다. 엄 사장은 현장에서 적발당한 학생에 밀고 당한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 타일렀다. 물건값은 학생들의 부모에게서 변상받았다. 왜 학생들을 호되게 혼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 사장은 “처벌을 받아서 학생이 나쁜 쪽으로 빠지면 마음이 굉장히 아플 것”이라며 “나도 자식을 키우는데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다”고 답했다.

요즘 물건 훔치는 사람은 없다. 정확히는 학생 손님이 거의 없다. 소매 매출도 확 줄었다. 최근 대림문구사 매출의 대부분은 기관에 물건을 납품하며 얻는다. 과거에는 필기구와 같은 문구류가 잘 나갔다면 요즘은 사무실 필수품인 A4 복사 용지가 매출 1위다.

대림문구사 내부 모습. ⓒ 손민주
대림문구사 내부 모습. ⓒ 손민주

제천시의 학령인구가 줄면서 학생 손님도 줄었다. 1998년 제천시 0~18세 인구는 4만 1,901명으로 전체 인구의 28%였으나 2020년에는 1만 9,455명으로 줄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4%로 절반이 됐다. 엄 사장은 “예전에는 7시 반만 되면 학생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며 요즘은 하루에 학생을 한 명도 보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학교의 디지털화도 변화를 이끌었다. 요즘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수업하고 컴퓨터로 숙제하는 게 익숙하다. 그나마 팔리는 문구류도 학생이 아닌 학교가 산다. 교육복지사업의 일환으로 학교가 학습준비물을 일괄 구매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도화지 한두 장을 고무줄로 돌돌 말아 사가던 학생이 이제는 거의 없다.

진열대에 놓인 크레파스와 문구세트. ⓒ 손민주
진열대에 놓인 크레파스와 문구세트. ⓒ 손민주

백 년을 바라보는 문구사

기자가 취재를 하러 간 날, 대림문구사에는 오랜 손님이 한 명 다녀갔다. 볼펜을 사러 온 강소정(49) 씨다. 소정 씨는 의림여자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대림문구사를 이용했다. 소정 씨는 “원래 명동 로터리에 있을 때도 주변 문구점 중에 물건이 가장 많았다”며 “옛날 생각이 나서 종종 들른다”고 말했다. 옛 손님의 방문은 오래된 가게 주인에게 가장 보람된 경험이다. 엄 사장은 “어릴 때 자주 오던 자매가 얼마 전에 대학생이 돼 가게에 왔었다”며 “그 꼬마들이 다 컸으니 나도 많이 늙었지”하며 웃었다.

4월 7일 대림문구사 계산대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장 엄기일 씨(왼쪽)와 20여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 손민주, 엄기일
4월 7일 대림문구사 계산대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장 엄기일 씨(왼쪽)와 20여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 손민주, 엄기일

엄 사장은 문구 일만 50년 했다. 다른 문구점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대림문구사를 열었다. 매일 수백 장의 종이를 세느라 손끝이 손마디보다 뭉툭해졌다. 언젠가 문구사를 떠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함께 일하는 두 딸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딸들은 손님들 사이에서 친절하다고 벌써 소문이 자자하다. 다만 복사용지를 배달하는 일만큼은 엄 사장이 힘이 닿는 데까지 하려고 한다. 그에게 대림문구사의 미래를 물었다. “세월이 흘러 가끔 찾아오면 늘 그 자리에 있는 추억 속 장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대림문구사가 진짜 백년가게가 되는 것이 엄 사장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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