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딱 알맞게 좋은’ 제천 자크르마을

비탈길 높은 곳에 오르자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집들이 언덕에 옹기종기 들어선 모습이 동화 속 장면 같았다. 귀촌인만으로 이뤄진 ‘자크르마을’이다.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에 있는 이 마을의 집은 모두 10채.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초소형 목조주택이다. 작은 집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품앗이로 집을 짓고, 함께 산다.

거실과 주방이 6평, 침실로 쓰는 다락이 2평이다. 하지만 뜻이 맞는 이웃과 함께 사니 별로 좁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도시에서처럼 벌집 같은 집 한 칸에 갇힌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에도 이런 철학을 담았다. 국어학자 최기호 교수가 쓴 ‘사전에 없는 토박이말 2400’에는 ‘자크르하다’는 표현을 ‘딱 알맞게 좋다’는 뜻으로 소개하고 있다. 작기는 해도 욕심을 덜고 이웃과 어울려 지내면 사람이 살기에 본래 적절한 크기라는 것이다.

작은 집들이 이웃하고 있는 자크르마을 전경. 정승현 기자
작은 집들이 이웃하고 있는 자크르마을 전경. 정승현 기자

자크르마을은 귀촌 공동체 실험

귀촌인 마을이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은퇴한 부부만 사는 건 아니다. 자크르마을에는 독신 여성 가구도 4가구나 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마을에 들어가는 게 아니니, 여자 혼자 살기에 부담이 크지 않다. 아직 퇴직하지 않고 일주일의 반만 다녀가는 입주자도 있다. 구성원이 다양한 만큼 주민 연령대도 40대부터 60대까지로 비교적 젊다. 고향도 다른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자크르협동조합의 조합원이라는 것이다.

자크르협동조합은 제천시 덕산면에 있는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를 다닌 졸업생들이 설립한 단체다. 아예 마을을 함께 지으려고 지난해 1월 출범했다. 하지만 건축 일을 해본 사람은 거의 없다. 건축학교에서는 6평짜리 작은 목조주택 한 채 짓는 법을 7박 8일 동안 익히는데, 공구를 처음 잡아보는 일반인이 교육 대상이다. 취미로 목공을 배우고 싶어서 건축학교를 찾기도 하지만 대개 귀촌해 집을 직접 지으려 수강한다. 교육을 마친 뒤에는 내 집 마련이 꿈 같은 시대에 작은 집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문이 된다.

건축학교 실습장. 매월 1회 10여 명에게 7박 8일 동안 작은 집 건축을 교육한다. 정승현 기자
건축학교 실습장. 매월 1회 10여 명에게 7박 8일 동안 작은 집 건축을 교육한다. 정승현 기자

2015년부터 7년 동안 건축학교를 거쳐 간 700여 명 가운데 실제로 수십 명이 전국 각지에 자기 집을 지었다. 작은 집을 짓거나 배운 기술을 응용해 조금 더 크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동문이 모여 사는 곳은 자크르마을밖에 없다. 마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주도한 사람은 건축학교 교장인 문건호 씨다.

“각자 집 짓는 법만 배우고 흩어지는 게 아쉬웠어요. 모여서 새로운 주거환경을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농촌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빈집은 고치지도 못하고 낡은 채로 버려지고, 거대한 비용을 들여서 타운하우스 만들기도 어려울 테고요. 이러다간 텅 비고 아무것도 안 남겠다 싶었어요.”

문 교장은 “귀촌한 공동체의 성공 사례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계속 귀촌해 오겠다 싶었다”며 “그러려면 누군가는 노하우와 기술을 쌓아나가야 하는데 그게 우리 협동조합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1호 마을인 자크르마을에 이어 비슷한 귀촌 공동체를 계속 만들겠다는 것이다. 

건축학교 졸업생 150여 명이 조합에 참여했다. 마을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조합에 가입해 집 짓는 데 봉사하겠다며 동문들이 나섰다. 문건호 교장은 건축학교에서 10분 거리에 터를 잡았다. 지난해 8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집 10채를 짓는 동안 입주 예정자는 물론 조합원 수십 명이 일손을 보태려 짬을 내 다녀갔다.

문건호 교장도 서울에서 온 귀촌인이다. 2012년 자녀를 제천시 덕산면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에 보내면서 정착했다. 정승현 기자
문건호 교장도 서울에서 온 귀촌인이다. 2012년 자녀를 제천시 덕산면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에 보내면서 정착했다. 정승현 기자

‘어디에 사느냐’만큼 중요한 ‘누구와 사느냐’

자크르마을 주민들도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사는 즐거움을 중요하게 생각해 입주했다. 51살인 이은경 씨는 온라인으로 농산품 유통업 등을 하고 있어 비교적 쉽게 귀촌을 선택했다. 건축학교는 2017년 수료했다. 협동조합 설립 소식을 듣고 금방 합류를 결정했다. 마을을 짓는 데 어느 정도나 참여할지는 자율이지만 무려 석 달 동안이나 힘을 보탰다. 그만큼 뿌듯하고 애착도 크다. 작은 집에 대한 뜻을 함께하는 이웃과 산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서울에서 살았는데 20살이 될 때부터 귀농을 꿈꿨어요.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어서요. 2009년에 경기도 화성시에 귀촌했는데 텃세를 많이 느꼈어요. 6년만 있었어요. 외지인으로서는 억울할 테지만 생각해보면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죠. 어디서 살 것인지 못지않게 누구와 살 건지도 중요하다고 느끼게 됐어요.”

이미 귀촌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이웃과 관계는 그만큼 소중하다. 그는 “48평 집에서도 살아봤는데 작은 집이 물론 불편하겠지만 도시에 사는 불편함을 생각하면 상쇄되는 것 같다”며 “주변에서 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느냐고 묻는데 오히려 더 부유해졌다”고 말했다.

자크르마을에는 주민이 어울릴 공간도 만들 예정이다. 문건호 교장은 “건축학교에서 만드는 10평 정도 건물이면 마을 카페나 식당, 쉼터나 업무공간으로 제격”이라며 “공동체 가치를 키우면서 재미를 추구하는 마을을 만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의 개인적인 바람은 소형 목조건물에 어울리는 마을 공용 사우나까지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공동공간도 주민과 함께 지을 예정이다. 어떤 공간이 필요할지, 어디에 놓을지도 함께 정해야 한다.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사무실에 있는 업무 현황. 학교 운영과 자크르마을, 협동조합 업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정승현 기자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사무실에 있는 업무 현황. 학교 운영과 자크르마을, 협동조합 업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정승현 기자

짓기도, 고치기도 직접 해야

경기도 부천시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59살 김강봉 씨는 2년 전 건축학교에 다녔다. 아직은 자크르마을과 사업장을 왔다 갔다 하지만 5년 안에는 완전히 은퇴할 생각으로 일찌감치 입주했다. 면적만 따지면 고시원과 비슷하지만 아내와 함께 지내기에 나쁘지 않다. 간소한 삶을 추구해서 짐이 적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의 집 안은 꽤 넓어 보였다. 거실은 두 층에 걸쳐 천장이 높게 뚫린 복층 구조로 답답함을 줄여줬다. 그는 “집은 좁더라도 테라스 창만 열면 거실만 한 데크가 연결돼 있고 마당이 있으니까 좁다는 생각은 안 든다”고 말했다.

목조 건축물은 지을 때 환경 부담이 적은 것도 장점이다. 일반적인 건물은 콘크리트가 굳은 뒤 해체해 버려야 하는 거푸집 등 폐기물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목조 건축은 콘크리트의 주재료인 시멘트도 거의 사용하지 않아 건축 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도 거의 없다. 시멘트는 석회석을 채굴한 뒤 시멘트 제조 공장에서 섭씨 1500도로 가열해 만들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크고 이산화탄소 발생량도 많다. 몇 사람이 함께 들어 올릴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나무를 쓰면 대형 건설장비도 동원할 필요가 없다.

자크르마을 주택에 쓰인 이런 ‘경량목구조’는 영미권에서는 보편화해 있다. 규격화된 나무 재료를 블록처럼 필요한 만큼 사서 쓰면 되고, 초보자도 안전하게 따라 하며 지을 수 있는 건축법도 나와 있다. 조각 전공자인 문건호 교장이 인테리어 사업을 하다 작은 집 건축에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집에 생긴 하자를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도 그 안에 사는 사람 몫이다. ‘주택관리’를 모르고 살아온 귀촌인들에게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손수 지었으니 직접 고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게 자크르마을의 규칙이다. 실제로 작은 집 건축이 집을 만드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분리된 탓에 집값이 자꾸만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아직 보수할 곳이 꽤 있다. 지난 여름에는 장마 때문에 몇몇 집 다락으로 물이 새어 들어와 주민들이 한참 불편을 겪기도 했다. 지붕 모서리를 따라 배수로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거나 지붕 안쪽에 넣은 목재판이 마감되지 않고 조금 노출돼 물기가 스며들어 생긴 문제일 수도 있다.

입주민 김강봉 씨. 다락에서도 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천장이 높다. 정승현 기자
입주민 김강봉 씨. 다락에서도 머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천장이 높다. 정승현 기자

‘그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 위한 귀촌

마을 집 짓기 품앗이에 참여한 협동조합원은 전세금 6천만 원만 내면 자크르마을에 입주할 수 있다. 임대자는 건축학교 법인이다. 계약 기간은 3년이지만 사실 평생 살아도 된다. 계약은 조건 없이 자동으로 연장되고 임대료 상승도 없다.

굳이 전세 모양새를 갖춘 건 자크르마을이 귀촌을 경험하는 ‘베이스캠프’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입주민은 얼마든지 다시 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동이 오히려 장려된다. 문건호 교장은 “자크르마을이 그저 정주하는 곳이 아니라 활력 있는 마을, 생산하는 곳이 되는 게 바람”이라며 “외부인과 왕래가 잦으면 글쓰기든 약초 키우기든 주민이 강의를 열어서 생업을 하거나 기념품 가게를 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교장은 자크르마을에 청년 귀촌인을 끌어들일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지금은 신선한 공간이지만 퇴직자만 입주해 10년, 20년이 지나면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곳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퀴 달린 집’이다. “집이 대지에 종속될 필요는 없잖아요. 차로 바퀴 달린 집을 끌고 가서 마음에 드는 곳에 사는 거예요. 땅값은 비용에서 빠지니까 청년들이 살기 좋겠죠.” 당장 이달부터 바퀴 달린 집을 만들고 머물다 갈 수 있는 터를 자크르마을에 만들 예정이다.

2020년 6월 방송된 tvN ‘바퀴달린집’ 포스터. 방송에 나온 바퀴 달린 집을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에서 만들었다.
2020년 6월 방송된 tvN ‘바퀴달린집’ 포스터. 방송에 나온 바퀴 달린 집을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에서 만들었다.

문 교장은 자크르마을이 커지더라도 ‘그들만의 공동체’가 되는 건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 주민과 소통하는 게 중요해요. 너무 많은 가구가 한 곳에 몰리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작은 마을을 여러 개 만들어야죠.” 당분간을 자크르마을에 입주민을 더 받을 테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마을은 주변으로 좀 떨어진 곳에 만들어서 더 넓은 지역 사회에 활력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자크르마을은 벌써 마을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민 이은경 씨의 말이다.

“여기는 수곡리이고 길 건너 앞마을이 적곡리인데 교류가 생기고 있는 편이에요. 마을잔치가 있을 때 저희를 부르기도 했고요. 저희가 집을 고쳐드리는 봉사를 해드리기도 했죠. 처음엔 저희 마을 생기는 데 반대하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좋아하는 분위기예요. ‘젊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 보기 좋다’고요. 우리가 점점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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