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제천 엽연초하우스

‘연다’ ‘연주’ ‘망우초’ ‘상사초’. 모두 연초, 즉 담배를 이르는 말이다. 임진왜란 뒤 우리나라에 들어온 담배는 곧장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후기에는 어린아이와 어른, 신분 귀천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담배를 즐겼다. 손님이 오면 집주인은 차나 술 대신 담배를 대접할 정도여서 ‘연기로 마시는 차와 술’이라는 뜻으로 연다나 연주라고 이름 붙었다. 시름을 잊게 해줘 망우초, 중독성 있는 맛을 잊지 못하니 상사초라 불리기도 했다.

민중에 널리 퍼진 담배는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곧장 수탈 도구가 됐다. 일본은 담배 전매제를 도입하고 과도한 세금을 물렸다. 통치자금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특히 충북지역을 담배 최대 생산지로 키웠다. 그러면서 농민 반발을 통제하려고 관제 생산협동조합을 세웠다. 근대문화재로 남은 제천엽연초생산조합구사옥과 엽연초수납취급소가 그 흔적이다. 그 수탈의 흔적이 제천 ‘엽연초하우스’라는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 제천시 명동에 위치한 엽연초하우스 전경. 제천엽연초생산협동조합 사옥을 리모델링해 만들어졌다. ⓒ 엽연초하우스(위), 박성동(아래)

문화재가 있는 열린 게스트하우스

엽연초하우스는 1층에 카페가 딸린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다. 지난 2018년 제천시가 원도심인 명동에 도시재생활성화사업을 하면서 만들었다. 제천시는 낡은 제천엽연초생산협동조합 건물을 사들여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했다. 엽연초생산협동조합은 담배 원료인 엽연초, 즉 잎담배를 사들여 담배공장에 넘기는 일을 하던 곳이다. 

엽연초하우스는 단지 투숙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아니다. 시민에게 열린 문화 공간이다. 부지 안에는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문화재가 두 개 있다. 문화재가 차지하는 면적에 비하면 게스트하우스는 작은 일부로 느껴질 정도다. 게스트하우스를 바라보고 왼편에 ‘제천엽연초생산조합구사옥’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65호다. 1935년 세워졌다. 1977년 신사옥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계속 조합 사무실로 쓰였다. 지금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한 건물이 바로 신사옥이다. 제천에 엽연초 협동조합이 처음 만들어진 건 1918년이지만 당시 사옥으로 쓴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아치형으로 돌출된 정면 출입구, 아치형 창호에 사선으로 그어진 창살, 목조로 지어졌지만 시멘트로 거칠게 마감된 외관 등 구사옥은 근대 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사옥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겉에서만 구경하는 문화재가 아니다. 제천시는 구사옥 내부를 멀끔히 고쳐 전시관으로 쓰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전시 주제는 <다시 만난 제천>이다. 시민 기록자 23명이 주민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사진을 모아 원도심에 얽힌 추억을 풀어낸 전시다. 

▲ 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사옥 전면과 후면. 내부는 전시 공간과 작은 강연장이 있다. ⓒ 박성동

게스트하우스 뒤편에는 등록문화재 제273호 ‘엽연초수납취급소’가 있다. 구사옥보다 8년 뒤인 1943년 지어졌다. 엽연초를 사들이는 수납 업무가 늘자 구사옥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던 작은 창고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다. 수납취급소는 사들인 엽연초를 담배 공장에 넘기기 전까지 적절한 온도와 습도에서 27개월 동안 숙성시키는 곳이다. 엽연초 탈색을 막으려고 북쪽으로만 창을 냈고, 환기가 잘 되게 하려고 벽체 아래에 구멍을 뚫었다. 바닥에는 80센티미터 깊이로 구덩이를 길게 파 건조할 때는 모래와 물을 채워 넣어 습기를 보충했다. 

수납취급소는 건물 여러 동이 ‘ㄱ’자 모양으로 길게 연결된 구조다. 농민들이 엽연초를 수확해 수납취급소에 가지고 오면 건물 입구부터 가장 안쪽까지 하치, 배열, 감정, 보관을 순서대로 작업할 수 있게 만든 배치다. 지금도 계산실과 농민대기실은 제천시 도시재생지원센터, 하치장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현장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엽연초를 올려놓고 움직일 수 있게 원형 레일이 놓여 있는 감정실은 일반 시민에게 전시공간으로 개방돼 있다. 

▲ 엽연초수납장 내부. 국가등록문화재지만 공간을 활용해 사무공간과 전시장으로 쓰고 있다. ⓒ 박성동

식민 통치자금 확보 수단 엽연초

구사옥과 수납취급소가 훌륭한 시설을 갖췄지만, 농민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식민 통치에 자금이 필요했다. 담배에 세금이 물리는 편이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일제는 1910년 연초세를 도입했다. 엽연초 농가에 잎담배 생산과 판매에 따른 세금을 매긴 것이다. 4년 뒤에는 담배공장에도 제조세를 매겼다. 소비세도 추가했다. 1921년에는 아예 전매제를 실시했다. 담배 농사를 함부로 시작하거나 포기하지 못하게 허가제를 도입했다. 농민이 재배한 엽연초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없고 조선총독부 전매국에만 팔게 했다. 이익을 전매국이 독점했다. 

세율은 점점 높아졌다. 반면 전매국은 담배 농가에 제대로 엽연초 가격을 쳐주지 않았다. 등급에 따라 돈을 지급해야 했는데, 대체로 품질을 높게 쳐주지 않았다. 심한 경우 수매가가 시가의 10%밖에 되지 않기도 했다. 농민들은 매년 11월 엽연초 농사를 마치면 손에 돈을 쥐지 못했다. 1920년대 엽연초 전매로 조선총독부가 거둔 자금은 전체 재정의 20%를 차지했다. 

▲ 오른쪽 파란 지붕이 리모델링 전 제천엽연초생산협동조합 신사옥. 엽연초수납장이 신사옥 뒤편으로 길게 ‘ㄱ’자 모양으로 늘어서 있다. ⓒ 문화체육관광부

농민들은 동시에 담배 농사를 손에서 놓는 비경작운동이나 금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일제는 관제 농민조직을 만들어 이런 반발도 통제했다. 엽연초생산조합이었다. 특히 일본은 자국 수출상품인 황색종 엽연초를 우리나라 땅에서 재배해 생산량을 늘리려고 일찍부터 충북지역을 공략했다.

전매국은 1912년 충주 농민 200여 명에게 농사에 필요한 기구를 무상으로 주고 보조금도 지원해 황색종 엽연초 15핵타르를 농사짓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충북지역 전체에 엽연초 생산협동조합이 들어섰고, 충북에서의 담배 농사 주종은 황색종이 됐다. 제천도 영월엽과 청주엽을 재배하다 주요 품종이 황색종으로 바뀌었다. 충북지역은 일제강점기 담배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이 됐다. 해방되면서 엽연초생산협동조합은 담배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로 바뀌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엽연초하우스에 자리를 내준 생산조합은 제천시 봉양읍으로 옮겨갔다. 

손님에게 담배 아닌 문화 권하는 곳

게스트하우스 옆에는 KT&G 제천지사가 있지만 엽연초하우스와 구사옥, 수납취급소는 더는 담배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곳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쉼과 문화를 권한다. 제천시로부터 엽연초하우스 운영을 위탁받은 ‘천사랑여행사’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이윤을 거의 남기지 않고 여행상품을 판매해 2019년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았다. 제천 토박이인 사장 천명주 씨는 엽연초하우스도 단순한 영업장으로 운영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엽연초하우스를 원도심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문화재 역사투어였다. 여행업인 본업을 살렸다. 투숙객이 두 명만 모이면 20분 동안 엽연초하우스를 돌며 담배의 전래부터 시작해 엽연초수납취급소가 지어진 배경까지 문화재 역사투어를 진행한다. 요금은 음료를 포함해 5000원이다. 수익을 위한 일이 아니다. 

▲ 문화재 역사투어를 진행하고 있는 천명주 사장. 협동조합 구사옥 뒤편에 해방 이후 사용된 현대식 계측장치가 있다. 녹색 판 위에 올라서면 무게가 표시된다. ⓒ 박성동

엽연초하우스는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객실은 2인실이 2개, 4인실이 6개로 모두 8개가 있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영업을 시작했는데도 주말에는 거의 만실이다. 주로 타지에서 온 가족 단위 여행객이 찾는다. 하지만 원도심 속 문화 공간이 되기에는 부족했다. 

“워낙 유동 인구가 없어서요.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은 해요. 많이 팔 땐 카페에서 하루에 100잔씩도 팔거든요. 그런데 입소문 때문에 차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주민들이 걸어 다니다가 언제든 들르는 활발한 공간은 아직 아닌 것 같아요.”

▲ 엽연초하우스 카페. ‘한방 엽연차’를 팔고 있다. 복령과 인삼, 건지황 등을 넣은 한방차다. ⓒ 박성동

천 사장은 게스트하우스 맞은편 길 건너 복어집을 가리키며 “저 집도 빈집이 된 지 4-5년은 됐는데 새 점포가 들어서질 않는다”고 말했다. 원도심이 침체한 상황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직접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로 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지난해 주민을 위한 문화공연도 다섯 차례 진행했다. 공연자를 섭외할 뿐 공연비를 챙겨주거나 주민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직접 오지 못하는 주민도 있을 것 같아 매번 유튜브로 공연을 중계했다. 

천 사장은 생산조합 구사옥을 북카페로 만들고 수시로 문화행사를 여는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코로나19와 추웠던 겨울 탓에 관리가 어려워 그간 구사옥 출입문도 자주 열어놓지 못했다. 따뜻해지면 정원에 장미도 잔뜩 심어볼 생각이다. 엽연초하우스가 엽연초 수납장에서 문화 수납장이 되길 기대한다. 


편집: 박성동 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