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제천시 남천동 LP바 ‘딜런’

충북 제천시 의병대로 골목, 어스름한 붉은 빛이 캄캄한 거리 한편을 물들인다. 지난달 27일에 <단비뉴스>가 이 거리를 찾았다. 술집이 있기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작은 사거리의 모서리에 가게가 하나 있다. 검은 외벽에 평화를 상징하는 마크가 그려져 있다. 남천동 골목에 있는 LP바 ‘딜런’(DYLAN)이다. 이날 가게를 찾은 손님 김 모씨의 감상을 빌리면, 딜런은 이 골목에 ‘느닷없이 아름답게’ 존재한다. 가수 밥 딜런(Bob Dylan)의 초상과 그의 가사가 유리창에 걸려 있다. 나무로 된 작은 문을 열면 틈새로 음악이 흘러온다.

▲ 제천 남천동 의병대로에 위치한 LP바 ‘딜런’ 전경. © 현경아

김성상(55) 씨는 3년째 이 자리에서 딜런을 운영하고 있다. 가게 이름이 딜런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밥 딜런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던 시절, 밥 딜런의 호주 라이브 영상을 1년 내내 돌려봤다고 한다. 그의 노래는 큰 위로였다.

밥 딜런은 1941년에 태어나 1962년에 데뷔한 팝 가수다. 음유시인, 노벨문학상 같은 말들이 그를 수식한다. 그러나 딜런에서는 그런 수식어가 중요하지 않다. 가만히 앉아 들으면 된다. 김 씨는 매일 작은 바 구석에 둔 턴테이블 앞에 앉아 조명을 밝힌다. 그날의 음악을 골라 올린다. 바늘을 돌아가는 LP 위에 얹는다.

딜런의 메뉴는 단출하다. 한 병에 4000원 하는 두 종류의 국산 맥주와 직접 구워 손으로 뜯는 먹태다. 음식이 아쉽다면, 그날 김 씨나 손님이 고르는 음악으로 채우면 된다. 정해둔 플레이리스트는 따로 없다. 손님이 신청하는 노래를 틀기도 하고, 모두가 좋아할 법한 노래를 들을 수도 있다. 비틀즈(The Beatles), 퀸(Queen), 김광석, 이문세의 옛 음반이 종종 돌아간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의 노래

김 씨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을 낡은 LP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주방을 둘러싼 나무 찬장에 김 씨가 젊었을 적부터 모은 LP가 있다. 그의 옛 시절 이야기와 함께 스피커에서 밥 딜런의 ‘Can’t help falling in love’가 흘렀다.

단양 출신인 김 씨는 스무 살에 서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새로운 문물을 접했다. 락밴드 ‘퀸’과 ‘스콜피언스’(Scolpions)의 음악을 LP로 처음 들었다. 이내 소란한 록 음악의 선율을 깊이 사랑하게 됐다. 그 후 용돈을 받으면 서울에 가서 LP를 샀다. 거리마다 음악을 틀어두는 음반 가게를 지나다, 마음에 들어오는 노래가 있으면 이름을 묻고 바로 샀다. 그렇게 지금까지 모은 LP는 클래식, 20세기 대중가요, 팝 등 대략 1만 장 정도다.

김 씨는 때로 바에서 손님과 음악 이야기를 길게 나누기도 한다. 지난달 28일에 <단비뉴스>가 만난, 제천 화산동에 사는 심재인(51) 씨가 딜런을 꾸준히 찾는 이유다.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장님은 2~30분 동안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라고 심 씨가 말했다. 심 씨는 3년 전부터 지인의 소개로 딜런을 알게 됐다.

▲ 김성상 씨가 턴테이블 앞에 앉아 LP를 교체하고 있다. 김 씨 주변으로 평생 모아온 1만여 장의 음반이 꽂혀 있다. © 현경아

그는 딜런에서 알게 된 가장 기억에 남는 가수로 방의경을 꼽았다. 방의경은 1970년대에 활동하던 국내 첫 여성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음반 <내 노래모음>은 ‘데모하는 학생들이 부른다’는 이유로 발매 일주일 만에 판매가 금지됐다. 김성상 씨가 시중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옛 시절 음반을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파도 바람 구름 철길 친구’라는 제목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좋은 음악, 좋은 사람

김 씨는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과 어울리는 일을 하고 싶었다. 20살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자주 가던 단양 막걸리집 ‘석연’ 덕이다. 지금은 사라져 기억에만 남은 노포는 당시에도 70세는 되었을 인심 좋은 할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묵은지와 두부를 저렴한 값에 팔았다. 두부 한 모 값이 1500원이라면 할머니는 오백 원만 남겼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잖은 젊은이들도 많이 찾았다. 김 씨는 가게를 찾던 젊은 손님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정정한 사장님의 삶을 쭉 부러워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군대를 다녀왔다. 25살에 아버지가 시멘트 회사나 군청 취업을 권했다. 하지만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보통의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서울로 도망을 갔다. 그러다 28살에 마음에 그리던 가게를 차리게 됐다. 가게 이름은 ‘스모크’였다. 장사가 안 돼 골머리를 앓던 레스토랑 사장이 6개월 뒤에 갚는 조건으로 가게 한편을 내어줬다. 주머니에 있던 만 원만 받았다.

“저는 장사가 안 될수록 사람을 더 구해요. 월급을 못 주면 다른 데서 벌어서라도 월급을 줘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든 장사를 해 줘요.”

김 씨는 첫 가게, 스모크에서 만난 옛 직원 ‘금자 씨’ 이야기를 꺼냈다. 한참 장사가 되지 않을 때 일을 구하러 찾아온 사람이었다. 아르바이트마저 구하지 못해 펑펑 울던 금자 씨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가게의 일원이 된 금자 씨 월급을 주려면 낮에는 일을 하러 가야 했다. 어디 가시냐고 묻는 금자 씨에겐 월급 벌러 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여느 날처럼 일하고 돌아온 가게에는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금자 씨가 가족들을 데려와 테이블 14개를 가득 채웠다. 금자 씨 가족들을 타고, 금세 입소문이 났다. 금자 씨 덕에 빚을 갚았다. 김성상 씨는 그 후에도 장사를 하면 항상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 기억으로 김성상 씨는 삶을 대하는 그만의 철학을 세웠다. 큰돈을 만질 생각은 없다. 비싸고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 돈을 벌고 싶지 않다. 먹고 살 만큼 벌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되었다. 좋은 음악, 좋은 사람과 마시는 술이 그의 철학이다. 한자리에서 버틸 수 없을 만큼 장사가 안 되면 가게를 접었다.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산불 끄는 일이나 철거 일을 하기도 했다. 사정이 괜찮아지면 다시 가게를 차렸다.

김 씨는 그동안 스모크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네 번 꾸렸고, 지인에게서 넘겨받은 펜션을 2년 넘게 운영하기도 했다. 펜션을 그만둔 뒤 딜런을 차렸다. 펜션까지 치면 지금의 딜런은 김 씨의 여섯 번째 가게다. 인테리어는 항상 그가 직접 한다. 그래야 금방 포기하지 않고 버틴다는 이유에서다. 가지런한 글씨로 쓴 붉은 간판, 자개 테이블도 직접 만들었다.

▲ 마주 앉은 손님과 대화하고 있는 김성상 씨. © 최은솔

딸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딜런에도 어김없이 코로나19 여파가 덮쳤다. 그간 가게 문은 열었지만 사실상 휴업 상태였다. 가게를 유지할 돈이 없을 때는 20여 년가량 해 온 지붕 철거 일을 했다. 대신 작년 8월에는 재즈를 하는 지인과 뮤지션 ‘귓속우주’의 공연을 작게 열었다. 팬데믹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데다, 가게 공간이 좁아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김 씨는 지금도 동사무소에서 3주가량 하는 단기 일거리를 받고 있다. 낮 동안 일하고 퇴근하면 딜런으로 다시 출근한다. 손님으로 붐비건 한적하건 그런 대로 자리를 지킨다.

김 씨는 LP를 모으기 시작한 가장 큰 동기가 딸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딸은 BTS는 잘 알겠지만 밥 딜런이나 방의경은 알기 어려운 스물 셋 젊은 청년이다. 딸이 문득 그 시절의 음악을 사랑하게 된다면, 다시 찾지 못하는 LP의 옛 감성을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절마다 유행하는 노래를 간직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씨는 “(이 LP는) 내 것이 아니라 네 것”이라고 딸에게 항상 말한다.

세상은 항상 변한다. 요즘 나오는 음악은 흐르지 않는 딜런 안에서는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춰버린 듯하다. 김 씨는 매일 작은 바 구석에 앉아 누렇게 낡은 스탠드 불을 밝힌다. 지난 시절의 음악이 턴테이블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돈다.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편집: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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