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일기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의식을 치르는 것 마냥 경건한 자세로 방바닥에 앉았다. 빨간색 녹음 버튼과 옆에 있는 재생 버튼을 누른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하얀색 카세트테이프의 두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는 게 보인다. 흑갈색 셀로판지를 기다랗게 이어 붙인 것 같은 테이프 줄이 빠르게 지나간다. 3분 30초. 카세트 플레이어로 나오는 god 오빠들의 ‘하늘색 풍선’을 따라 부르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초등학교 내내 같은 반인 B에게 줄 생일 선물이다. 6학년이 돼서도 god 해바라기다.
지난달 21일 오전 11시쯤 충북 청주시 성화동 구룡공원. 평일 오전인데도 빨강, 노랑 등 원색 등산복을 입고 산보하는 주민들로 활기가 넘쳤다. 이곳은 반경 3킬로미터(km) 내에 85만 청주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30여만명이 살아 ‘도심 공원’이라 할 수 있는데, 보기엔 영락없는 동네 뒷산이다. 제법 가파른 등산로를 10분 정도 올랐을 때, 두 나무 사이에 줄로 연결한 노란색 현수막이 길을 딱 가로막았다. 빨간 글씨로 ‘등산로 폐쇄 안내문’이라고 적혀 있다.“구룡공원 소유자들은 지난 35년간 공원으로 묶여 재산권 행사를 제대로
지난달 27일 오후 4시 서울 서초구 서리풀근린공원. 유선 이어폰을 끼고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걷는 60대 남성과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30대 여성 등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저물어가는 볕을 즐기고 있었다. 서초동과 방배동 일대 고층아파트 사이에 자리한 이 공원의 산책로 중간쯤에서 주민들은 길 한쪽을 가로막은 연두색 철조망과 빨간 글씨 경고문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곧 발걸음을 옮겼다.“그 동안 주민들께서 등산 및 산책로로 이용하신 당해 임야는 개인의 사유지이며, 사유재산 관리를 위해 출입구를 폐쇄하오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
<키워드 하나, 분노>갑작스런 분노란 없다2019년 대한민국이 분노하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의혹으로 청년들이 분노했고, 사법개혁 파동을 바라보며 국민들이 분노했다. 대규모 서초동 촛불시위를 보고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시위 인파가 몰렸다며 놀라워했다. 잘못 봤다. 갑작스런 분노란 없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시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건 아니다. 당시 평민은 정치에서 배제되고, 세금에 억눌렸다. 불평등한 시기를 지나온 분노의 폭발이었다. 서초동 촛불은 우리 사회에 쌓이고 쌓인 화가 역치를 넘어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살인마였다. 여덟 명이 그로 인해 죽었다며 항간에서 떠들어댔다. 잠시 그의 과거를 살펴보자.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영재’였다. 진짜 이름이 영재란 말은 아니다. 구구단을 유치원생이 줄줄 외우고, 2차방정식을 초등학생이 척척 풀어대니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확실히 남들과 달랐다. 성인이 되어 그는 자율주행차 상용화를 가로막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이제 전세계 도로에는 자율주행차만 돌아다닌다. 그의 프로그램이 적용되지 않은 자율주행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자율주행차의 아버지’가 되었다.자율주행차의
나는 불가촉천민이었네. 스마트폰이 없어 사회 접촉을 할 수 없는 자 말일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나였지. 허허 너무 놀라는군.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냐고 말하지 말게나. 우리 부모는 가난했지.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나무껍질을 뜯어다 먹어야 할 형편이었으니까. 그 흔한 스마트폰도 사주지 못했지. 지문 인증할 스마트폰이 없으니 출생신고도 하지 못했다네. 기록에 나는 없는 사람이었지. 이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뒷골목을 청소하는 일뿐이었네.운명의 시간은 그날이었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가 쏟아졌지. 그런 날이면
지난 27일 오전 11시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협재해수욕장. 구멍이 숭숭 뚫린 까만색 화산암과 보드라운 모래가 이어진 백사장 끝에서 옥색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여행객들, 모래장난이 한창인 꼬마들,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카우보이 모자의 남자까지, 모두 ‘맑고 깨끗한 바다’와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허리를 굽혀 해안을 찬찬히 살피자 이질적인 물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폭죽 껍데기, 부러진 셀카봉, 빈 컵라면 용기, 더러운 스티로폼 조각, 바위 사이에 낀 낚싯줄...해변에서 도보 3분
신의 계시다. 이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현 정권의 상징과도 같던 내가 딸 입시 때문에, 5촌 조카 사모펀드 때문에, 동생 부채 때문에 흔들렸다. 바로 이때 ‘지니’가 나를 찾아왔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개혁을 완수하라는 신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시대의 정의를 외쳤던 나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나의 진정성이 신에게도 통했나 보다. 지니에게 빌 세 가지 소원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 써야겠다. “사람들의 분노를 없애줘.”
유명한 착시현상 그림이죠.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이 보이기도 하고 큰 매부리코를 가진 노파가 보이기도 합니다. 시각이 그림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것이죠. 눈길을 바꾸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전혀 다른 그림으로 장면이 전환됩니다.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어렵고 힘든, 버겁고 불편한 상황이 있을 때, 그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새로운 해결책이 나타나기도 해요. [몸 한끼, 맘 한끼] 다섯 번째 시간에는 ‘해독: 그릇 비우기
경쟁자를 뜻하는 ‘라이벌’(rival)은 강을 뜻하는 라틴어 ‘리부스’(rivus)에서 나왔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관계란 뜻이다. 국경도 대개 강을 경계로 삼았다. 라이벌은 물을 더 끌어오기 위해 경쟁하지만, 홍수 같은 위기 때는 협력하는 사이다. 같은 강을 공유하니 공생할 수밖에 없다. 대립하더라도 공멸할 수 있기에 강에 독을 푸는 극단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발전하는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라이벌 관계다. 지킬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는 상대적인 운동성을
유명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관찰 예능도, 먹방 예능도 아니다. 시골 할머니들의 한글학교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가 됐다. 5월 19일 방송을 시작해 6월 9일 종영한 MBC 파일럿 예능 <가시나들> 이야기다.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문해학교’는 주로 다큐멘터리 소재였다. 2017년 방영된 SBS 스페셜 <할매 詩트콤: 시가 뭐고?>는 한글을 배워 시를 쓰는 할머니들 이야기였다. MBC <가시나들> 원작도 올 2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이다.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소재를 예능 프로그램에 도입해 ‘따
국내 최초 상고시대 판타지 드라마가 등장했다. 지난달 1일 방송을 시작한 tvN의 ‘아스달 연대기’다. 제작비 540억 원, 초호화 캐스팅으로 방송 전부터 입소문을 탔다. 첫 방송 후 표절 논란, 제작진 노동 착취 의혹 등이 일었지만, 닐슨코리아 시청률 7.2%를 기록하며 1부를 마무리했다. ‘아스달’은 태고의 땅 ‘아스’에서 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영웅들, 화합과 통합, 사랑을 이야기한다. 가상의 대륙 아스에는 꿈을 만나지 못한 ‘사람’ 종족, 사람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닌
“부인은 남편을 하녀들 쫓아다니는 난봉꾼이라 부르는데, 그녀도 가마꾼들 뒤를 맨날 쫓아다니네.” 프랑스의 로마 사학자 제롬 카르코피노가 쓴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Rome a l’apogee de l’Empire: la vie quotidienne, 우물이 있는 집, 류재화 옮김) 209쪽에 나오는 글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향락에 빠진 로마의 일상을 떠올려 준다. 카르코피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덧붙인다. “묘지 뒤편 고샅길마다 ‘암컷 늑대’들의 매춘이 성행했다.” 마을 골목에서 여인들 매춘이 흔했다는 얘기다.버닝썬 사태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왕권을 의회권력 아래 둔 현대 민주주의의 요람, 영국이 흔들린다.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다수가 찬성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때문이다. 국민투표 당시 51.9%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다. 유럽연합 잔류를 주장한 나머지 48.1%의 의견은 묻혔다. 아직도 여론은 분열된 상태고, 브렉시트 협상은 난항을 겪는다. 브렉시트 혼선의 책임을 지고 테리사 메이 총리는 사임을 발표했다. 다수결로 결의한 사안이 사회 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더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왜 그럴까? 다수결의 원칙이 힘을 얻기
“쨍쨍쨍.” 꽹과리 소리가 정조 임금의 행차를 막았다. 막아선 이는 서른다섯 살 흑산도 주민 김이수. 당시 흑산도 백성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닥나무를 공납으로 내야 했다. 김이수는 가혹한 세금에 나주·전주 감영을 방문해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돌아온 것은 보복뿐이었다. 결국 그는 한양으로 가서 임금 행차에 꽹과리를 두들기는 ‘격쟁’(擊錚)을 감행했다. 그가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정조는 좌의정을 불러 진상조사와 해결책 마련을 명했고, 흑산도의 닥나무 공납은 폐지됐다.민주공화국인 지금은 꽹과리를 두들기지 않
지난 3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선거제 개혁 단일안’에 합의했다. 여야 5당 원내대표가 논의를 시작한 지 석 달 만이었다.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개편안은 의원 정수를 300석(지역구 225석, 비례대표 75석)으로 유지하면서, 연동형·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형태다. 입법은 패스트트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오신환 사보임 파동’ 등 선거제도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으로 입법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언론의 관점에 따라 수용자들의 해석과 이해는 달라진
그날 나는 672번 버스를 타고 있었다. 서울 신촌에서 방화동 가는 버스다. 중간고사 때문에 전날 중앙도서관에서 밤을 샜다. 사람 없는 아침 버스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버스기사님 머리 위에 달린 조그마한 모니터에서 그 소식이 흘러 나왔다. 거대한 선체가 바다 한가운데 기울어진 채 잠겨 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밑에 흘러나온 ‘전원 구조’라는 글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날들 중 하루라고 생각했다.4월 16일. 이날은 더 이상 평범한 날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