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영화 '미키 17'

※영화 ‘미키 17’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일명 ‘봉박논쟁’은 내가 영화과 2학년 차에 접어들고, 영화 ‘기생충’이 개봉한 시점에 한창이었다. 당시의 ‘봉이냐 박이냐’하는 논쟁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잘 만드냐, 박찬욱 감독이 더 잘 만드냐’를 둘러싼 치기 어린 술자리 논쟁을 뜻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본인의 취향을 고백하는 자리에 불과했지만, 젊은 영화 꿈나무들 사이에선 꽤 열정적인 토론이 벌어지곤 했다. 한번은 분위기가 과열되자 선배들은 논쟁의 범위를 좁혀 같은 해에 개봉한 두 감독의 영화를 비교했다. 2003년도에 개봉했던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냐,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냐는 것이다.

나는 당시 대학교 2학년생에 불과했으므로, 또 부끄럽지만 두 영화 모두 보지 않았으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불똥은 애꿎은 곳에 튀는 법. 선배들 사이에서 답이 안 나자, 다들 후배인 나를 쳐다봤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 고백했다. ‘저는 두 영화를 모두 안 봤습니다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합니다’ 선배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21세기 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알리는 거룩한 작품들 앞에서 웬 사랑 영화 타령이냐는 면박을 주었다. 그 뒤로도 몇 번 이뤄졌던 ‘봉박논쟁’에 결국 나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6년 뒤인 올해 2월 28일 봉준호 감독은 사랑에 대한 통찰을 담은 작품을 들고 우리에게 왔다. 그것도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를 말이다.

그동안 봉준호 감독의 작품 속에서 큰 범위에서의 ‘사랑’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영화 ‘옥자’에는 동물과 시골 소녀 간 우정 내지는 사랑이, 영화 ‘마더’에는 뒤틀린 모성애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러브스토리’가 봉준호 감독 영화의 주요 주제였던 적은 없었다. 지난 1월 20일 있었던 ‘미키 17’ 기자 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25년 감독 일 최초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최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시나리오를 쓸 때 러브스토리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고, 그래서 예전 같았으면 그런 부분을 줄이거나 아예 회피하려 했겠지만, 이제는 거부 반응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봉박논쟁’ 때 영화학도로서 부끄럽기도 했고, 수업에 필요하기도 했기에 뒤늦게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여럿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제 그의 작품을 보며 공부하는 영화학도는 아니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그가 다루려는 이야기가 다양해진다는 건 여러모로 기쁜 소식이다.

영화 ‘미키 17’의 한국판 포스터.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미키 17’의 한국판 포스터.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 ‘미키 17’

영화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여덟 번째 장편영화이자, 세 번째 할리우드 SF 작품이다. 미키 17은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미키 반스라는 인간의 휴먼 프린팅이다. 17이란 숫자는 그가 열일곱 번째 프린트된 존재라는 의미다. 휴먼 프린팅. 직역하자면, 인간 출력이다. 앞서 프린트 되었던 미키들의 기억은 벽돌처럼 생긴 메모리에 업로드되고, 새로운 미키를 프린트할 때마다 이 메모리의 축적된 기억을 주입한다. 이론상 불사신에 가깝다. 죽어도 새로 프린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산된 미키는 방사선 피폭 실험에, 행성의 바이러스 위험도를 측정하기 위해, 배양육의 안전성을 검사하기 위해 이용된다. 이 세계관에선 미키처럼 외계 행성 생활에서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미리 노출시켜보는 생명체를 ‘익스펜더블’(Expendable·소모품)이라 부른다. 죽는 것이 미키들의 직업인 셈이다.

영화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에서 역사가인 미키 반스는 친구 베르토가 출전한 스포츠 경기에 배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돈을 빚지게 된다. 엄청난 빚을 감당하지 못한 미키는 결국 자신의 고향 행성 ‘미드가르드’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가 선택한 수단이 바로 개척지 니플하임 행성의 익스펜더블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선 원작의 설정이 많이 바뀌었다. 미키가 익스펜더블이 되기 전 직업도 역사가에서 마카롱 가게 창업자로, 출신 행성도 미드가르드에서 지구로, 친한 친구도 베르토에서 티모로 바뀌었다.

원작과 영화가 또 다른 점은 프린팅된 미키의 숫자다. 원작에선 미키 7과 미키 8이 주요 인물이라면, 영화에선 미키 17과 미키 18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왜 이리 많은 미키들이 생산됐는지 자연스레 이해되지만, 더 정확한 답변은 원작자 에드워드 애슈턴 작가와 봉준호 감독의 대담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7에서 17로 바꾼 것은 제가 가학적이어서 미키를 더 열 번 더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이 복제가 얼마나 반복적이고 일상적이며 평범한 과정이 되었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미키의 삶에 더 많은 더께를 입히고 싶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인간 미키 반스는 익스펜더블 지원과 동시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4년의 비행을 마친 우주선이 외계 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하고, 대기 중 바이러스 검사를 위해 미키들을 차례대로 행성에 투입한다. 이 과정에서 미키 12부터 미키 16까지 희생된다. 탄생과 죽음, 생산과 폐기의 이미지가 반복된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바이러스에 면역이 생기게 하는 백신을 개발하게 된다. 이후 프린트돼 니플하임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미키가 바로 미키 17이다.

미키 17이 작업 도중 외계 행성의 크레바스에 갇히자, 개척단 본부는 외계행성의 극악무도한 원주민 ‘크리퍼’가 미키 17을 해칠 것으로 생각하고 서둘러 미키 18을 프린팅한다. 하지만 크리퍼는 오히려 미키 17을 구해주고, 살아남은 미키 17과 급히 투입된 미키 18은 조우하게 된다. 둘의 성격이 완전히 반대인데, 미키 17은 다소 순종적이고 소심하고 찌질하다. 반면 미키 18은 과격하고 공격적이고 충동적이다. 이 두 미키의 성격 차가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플롯을 이끌어간다. 미키 17과 18의 1인 2역을 매끄럽게 소화해 내는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를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많은 디테일이 변화했지만, 두 익스펜더블이 동시에 존재하는 ‘멀티플’이라는 설정, 그리고 후술할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영화와 소설 모두 ‘죽어야 할 미키 N이 새로 탄생한 미키 N+1을 마주한다면?’라는 질문을 던진다. 미키 N만 살아있을 때는 전임 미키들의 기억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미키지만, 미키 N+1이 등장하게 된다면 둘은 독립적인 객체가 된다. ‘만약 둘 중 하나가 죽어 새로 프린팅된 미키는 누구를 잇게 되는 것일까’라는 물음도 생기게 된다.

복제인간과 휴먼 프린팅

SF 영화에서 ‘복제인간’은 단골 소재였다. 블레이드 러너(1982), 아일랜드(2005), 더 문(2009)이 대표적이다. ‘레플리컨트’, ‘클론’ 등, 복제된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는 달라도 이 영화들은 모두 복제 인간을 소재로 한다. 이번 작품에서 휴먼 프린팅으로 탄생한 존재, ‘익스펜더블’은 앞선 영화들의 개념과 어떤 점이 다를까?

익스펜더블은 사이클러와 휴먼 프린터를 통해 탄생한다. 사이클러는 유기체를 원자 단위로 쪼갠 다음 재조립하는 장치를 말하는데, 각종 폐기물과 배설물 심지어 먼저 프린트되었던 익스펜더블의 시체까지 이 장치에 들어가게 된다. 미키들도 여러 번 사이클러에 들어갔다가 프린터를 통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나 ‘아일랜드’는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 실제로 이 둘이 만나지는 않지만, 원형의 인간이 따로 존재하고 레플리컨트를 없애려 한다는 설정 속에서 영화가 진행된다. 아일랜드에서는 인간과 복제인간이 실제로 만나게 되고, 둘 중 하나는 죽게 된다. 이 영화들은 원형의 인간과 복제된 존재 사이의 대립 구도를 통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영화 ‘미키 17’의 설정은 ‘더 문’에 가깝다. 영화 ‘더 문’은 달에서 에너지를 채취하는, 수명이 정해진 복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죽어야 했지만,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죽지 않은 복제인간과 다음 순번 복제인간 사이의 이야기다. 미키 17도 원래는 죽어야 할 운명이지만 살아 돌아온다는 점에서, 또 차례로 프린팅된 존재들이 서로 만난다는 점에서 영화 ‘더 문’과 비슷하다.

큰 틀에서 ‘더 문’의 복제인간과 휴먼 프린팅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키 17’의 메시지는 조금 더 노골적이다. 그것은 익스펜더블의 소모적인 성격으로부터 나타난다. 앞서 소개한 영화에서 복제인간들은 자신들을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는 이들이 진짜가 아님을 깨달았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미키는 이미 자신이 프린트된 존재라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쓰임이 어떤 것인지도 안다. 진짜 인간을 대신해 위험한 일을 하다가 소모되는 것. 예고편에는 미키의 손이 잘려 나가 우주를 떠도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어지는 컷은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손’이 잘림으로써 은유되는 익스펜더블의 위험한 ‘노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사람들은 눈앞의 음식을 먹어 치운다. 휴먼 프린팅이라는 소재는 우리 사회의 만연하지만 무감각하게 이뤄지는 ‘위험의 외주화’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미키 18과 미키 17. 그 뒤로 크리퍼들이 있다.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미키 18과 미키 17. 그 뒤로 크리퍼들이 있다.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독특한 캐릭터 독재자 부부

영화에는 독재자 부부가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무대인 외계행성 니플하임의 개척자이자 사령관인 케네스 마샬은 지구에서 실패한 정치인이다. 두 번의 선거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그가 지구를 떠나 개척지에서 이루고자 하려는 목표는 ‘자연 번식 프로그램’이다. 쉽게 말해 니플하임을 인간들의 번식을 통해 번성한 공동체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거창한 목표에 걸맞지 않게 그는 어리숙함과 우유부단함이 공존하는 캐릭터로 묘사되는데,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 마샬의 부인인 ‘일파’이다. 마샬이 머뭇거릴 때마다 일파는 자판기처럼 즉시 답을 내놓는다. 흡사 마샬을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일파’는 원작 소설에선 없던 캐릭터였다.

마샬 부부를 보고 있으면 루마니아의 유명한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부가 떠오른다. 루마니아 초대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집권 기간 내내 극단적인 출산 강제 정책을 펼쳤다. 부부의 성관계 횟수를 정해놓았고, 출산하지 않는 커플에게 세금을 걷는, 이른바 ‘금욕세’를 도입했다. 월경 경찰이란 것도 있었는데, 이들은 가임기 여성들을 대상으로 월경 검사를 했다. 마샬도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영화 후반부의 중요한 장치이기도 한, ‘우주 체위 매뉴얼’을 부하들에게 보급해 성행위를 장려한다. 또 미키 17과 함께 정찰 나갔던 여성 요원 하나가 죽자, 마샬은 소중한 가임기 여성 한 명이 죽었다며 미키 17을 윽박지른다. 마샬 부부는 동료 요원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는 카이라는 캐릭터를 호화로운 저녁 식사에 불러서 종족 번식에 완벽한 신체 조건을 갖추었다며 임신을 종용하기까지 한다. 마샬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그저 출산의 도구로 바라본다.

일파는 사사건건 마샬을 지배하려 한다. 이 부부를 하나의 생명체라고 가정한다면, 일파가 본체 같다는 인상까지 준다. 영화에서 그녀는 음식을 찍어 먹는 ‘소스’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요원들에게 배급되는 식사량마저 철저히 통제할 정도로 니플하임 개척단의 상황이 열악하게 그려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스에 집착하는 캐릭터는 독재자 부부의 사치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봉준호 감독의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엘레나 차우셰스쿠도 굉장히 사치스러운 인물이었다.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사회.’ 봉준호 감독이 극악무도하고 사치스러운 독재자 부부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인간보다 인간 같은 외계 생명체

크리퍼는 모계 중심 사회의 니플하임 원주민이다. 생김새는 곰벌레와 지네의 중간 정도라 할 수 있다. 크리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세차용 워시미트를 닮기도 했다. 그만큼 첫인상이 그리 좋은 생명체는 아니다. 마샬의 아내, 일파는 이 크리퍼가 ‘소름 끼친다’(Creep)며 이름을 크리퍼로 짓자고 마샬에게 제안한다. 마샬은 일파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해 니플하임의 원주민을 크리퍼로 부르겠다고 선언한다. 니플하임의 원주민이 크리퍼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영화감독의 수많은 일 중 하나는 관객이 도저히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은 캐릭터에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영화에선 크리퍼가 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심지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크리퍼는 영화에서 인간과 대척점을 이루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의 외피만 하고 있다고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의 전반부, 인간들은 크리퍼가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리퍼는 이들 입장에서는 외계에서 온 침략자인 미키 17을 구해주고 홀연히 떠난다. 여기서부터 크리퍼에 대한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난 미키 17이 ‘마마 크리퍼’(모든 크리퍼들의 어머니)를 만나 그때 자신을 왜 살렸느냐고 묻자, 마마 크리퍼는 “그럼 죽여?”라고 반문한다. 이 단순한 물음과 답 속에 영화가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미키는 죽기 위해 살아가는 익스펜더블인데, 끔찍하게 생긴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가 오히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가치를 보여준 셈이다. 영화 속 크리퍼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인간만이 가진 속성이라고 생각해 온 우리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조각낸다. 인간인 마샬 부부가 크리퍼를 억압하려 하고 심지어 같은 종인 인간들마저 도구 취급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과연 인간성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영화가 선택한 인간성의 근원

태어나면서부터 대체될 운명인 익스펜더블, 인간을 장기 말처럼 대하는 독재자. 이같이 암울한 상황에서 과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다.

‘나샤’는 미키의 연인이다. 연약한 미키 17과 다르게 매우 강한 여성이다. 신체적 능력은 물론 말재주도 엄청나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캐릭터다. 17 이전의 미키들이 죽어갈 때 그들을 돌봐주었고, 17이 등장한 이후에는 다른 요원들의 괴롭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존재다. 항상 미키의 주위를 맴돌며 멀리서 그를 살피고 미키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과학자들에게 이성을 잃고 대항하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 소설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에게 소설 ‘미키 7’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리고 그 장면을 영화에 꼭 넣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애슈턴은 소설의 챕터 ‘19장’을 골랐다. 19장은 외계 미생물에 감염된 미키가 바이오 체임버라는 공간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보호복을 입은 나샤가 체임버안으로 들어와 그를 안아 주었을 때 미키는 모든 위험에서 자신을 지켜준 나샤가 있었음을 알기에 언제 폐기되어도 좋을 소모품인 자신이 삶의 의지를 가졌노라고 고백한다.

나샤와 미키. 둘은 연인 관계다.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나샤와 미키. 둘은 연인 관계다. 출처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색다른 관람 요소, 오마주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이 유명한 인용구가 일반적으로 알려졌듯이 피카소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짧은 문장 안에 대단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영화로 한정해서 말하자면, 존경을 담아 거장들의 장면을 훔치는 것을 흔히 ‘오마주’(hommage)한다고 한다. 이는 영화 산업에서 선배 영화감독들에 대한 단순한 존경 표현을 넘어, 영화 작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었다. 이번 ‘미키 17’ 곳곳에도 선배 감독에 대한 오마주가 숨겨져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가기 전, 미키 18이 니플하임의 독재자 마샬을 처단하러 가는 장면이다. 군중 속에서 환호를 받으며 연설하고 있는 마샬을 향해 미키 18은 총자루를 숨긴 채 전진한다. 미키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군중, 연설자, 그리고 암살자. 바로 마틴 스콜세이지가 연출한 ‘택시 드라이버(1976)’에서의 한 장면을 오마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대도시 안에서 고립감을 느끼는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가 군중 속에서 연설 중인 상원의원 팔렌타인을 향해 암살을 시도한다. 비록 암살은 실패하지만, 그 장면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강화한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세상과의 단절이 일상이 된 인간에게 생겨나는 비뚤어진 자기 과시욕.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간절하고 극단적인 표현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며 공부했던 것처럼, 봉준호 감독도 선배 거장의 영화를 보며 공부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감독상을 받을 당시 객석에 앉아 있던 마틴 스콜세이지를 향해 ‘당신의 작품을 보며 영화를 공부했노라.’ 말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이번 작품에서 봉준호 감독은 마틴 스콜세이지의 옛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한 장면을 훔쳐다 자신의 영화에 넣음으로써 영화 스승에게 존경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미래에 나올 법한 문명에 대한 따뜻한 야유

지난 2월 18일 방영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에서 진행자 손석희는 영화 ‘미키 17’에 대해 “미래에 나올 법한 문명에 대한 거대한 야유”라고 평했다. 그러자 봉준호 감독은 잠시 고민하더니 “따뜻한 야유”라고 응수했다. 봉준호 감독 입에서 ‘따뜻한’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의외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왜 그렇게 표현을 정정하고자 했는지가 눈에 그려졌다.

영화는 짜임새 있고, 탄탄하고, 그리고 따뜻하다. 단순히 소모되는 캐릭터 하나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영화라는 거대한 열차를 앞으로 움직인다. 아쉬움도 물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갑작스럽게 마무리된다는 인상을 받았다.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매듭지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건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서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현실에서 몰려오는 ‘찝찝한 카타르시스’가 덜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아직 연쇄 살인범이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고 있음을, ‘기생충’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 찝찝함은 영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이어지게 된다. 이번 영화에도 많은 메타포가 담겨 있지만, 결말부가 찝찝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결국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건 나를 정성스럽게 지켜봐 주는 존재이자, 나를 위해 간혹 이성을 잃기도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 원작 소설 ‘미키 7’에 수록된 봉준호 감독과 원작자 에드워드 애슈턴의 대담집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봉준호 감독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저는 우리를 억압하는 기술과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인간성을 유지한다는 아이디어를 다루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랑에 초점을 맞춘 19장에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것은 미키의 유일한 자산이며, 결국 가장 큰 자산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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