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추천 좋은 기사] 제410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통신 부문 추천작–한국일보 ‘방치된 믿음: 무속 대해부’
한국 사회에서 무속은 어디에나 있다.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 무속인의 조언을 빌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점 플랫폼의 등장으로 점집에 찾아가지 않아도,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전화 한 통으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시대다.
무속 콘텐츠의 인기도 상당하다. 지난해 2월 초 개봉한 영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달성한 것을 시작으로 MZ세대 무속인들의 사랑을 다룬 연애 프로그램 <SBS> ‘신들린 연애’, 무속신앙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 <티빙> ‘샤먼:귀신전’ 등 무속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들이 잇달아 흥행했다.
동시에 무속은 국내 언론에서 ‘어디에도 없는’ 존재다. 무속 콘텐츠들이 높은 관심을 끄는 와중에도 기성 언론에서 진지하게 다룰 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선입견 탓에 무속신앙을 깊이 있게 분석한 기획 기사를 찾기 어려웠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취재팀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무속의 현주소를 파헤쳤다. 취재는 한 산부인과 교수의 말에서 시작됐다. 태어날 아이의 운명을 위해 출생 시각을 정해주는 ‘시잡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왜 한국인은 점쟁이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아이를 낳을 정도로 무속을 신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지 취재팀은 의문을 품었다. 석 달간 전국의 점집과 기도터를 돌아다니며 무속인들을 만났다. 무속 관련 범죄 판결문 10년 치를 전수 분석했고, 사건 관계자들을 만났다. 나아가 한국 무속이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모색했다.
그들이 굿판을 걷어찬 사연
‘방치된 믿음: 무속 대해부’ 시리즈는 무속인으로부터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의 삶을 추적한 1회 ‘굿판을 걷어차다’로 시작한다. 한주은 씨 부부가 무속인 명도령에게 2년간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후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비롯해, 신내림 사기를 당한 후 무당을 고소했지만 여전히 불안에 떠는 김희은(가명) 씨 가족의 이야기를 내러티브 형식으로 기사 두 편에 나눠 실었다.
취재팀은 리드를 중시하는 기존의 역삼각형 구조 대신 이야기 자체에 방점을 찍는 내러티브 작법을 선택했다.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적설명서에서 이성원 <한국일보> 기자는 “(내러티브가)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는 동시에, 복잡한 사건을 설명하고 복합적인 인물들의 심리를 드러내기에 알맞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내러티브의 뼈대는 꼼꼼한 취재에서 나왔다. 취재팀은 피해자의 사연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사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1심에서 대법원까지 이어진 판결문, 경찰 수사자료, 고소장, 녹취론 등 모든 자료를 긁어모아 교차 검증도 진행했다.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와 가까운 지인, 당시 사건을 수사한 경찰 등 사건 관계자들을 두루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경찰 취재나 판결문에서 알 수 없는 내용도 밝혀냈다.
소설처럼 실감 나는 보도에, 독자들도 반응했다. 한주은 씨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귀신같이 알아맞힌 그 말, 삶을 저당 잡는 미끼였다’ 기사에는 “기사가 너무 재미있다. 또 써 달라”, “기자가 등단해도 되겠다”,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사람 잡는 무속 사기…10명 중 1명은 무죄
2회 ‘사람 잡는 무속’에서는 무속 관련 범죄 10년 치 판결문 320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취재팀은 한 달간 판결문 열람 서비스를 통해 2014년 8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무속인’ 키워드로 검색된 판결문 1990건을 모두 검토한 후, 무속 행위와 관련된 형사사건 320건을 추려 이를 분석했다.
무속 범죄는 대출 및 투자 사기(34.7%), 도를 넘어선 기도 행위 유도 및 횡령(26.3%), 성범죄(12.8%), 돈 받고 약속 미이행(9.9%), 폭행(9.9%) 등으로 구분됐다. 피해 금액은 평균 2억 6000만 원에 달했고, 주된 범죄 수법은 가스라이팅으로 나타났다. 피해자의 신뢰를 얻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만든 후, 이를 악용해 재산 등을 편취하는 식이다.
무속 범죄 피해자 중에는 결핍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판결문 분석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건강 문제(29.5%), 경제적 궁핍·사업 문제(16.7%), 가족·친지 간 불화(15.9%), 사망한 가족이나 귀신 문제(10.6%), 애정·결혼 문제(9.7%) 등으로 힘들어했다.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의 불안과 고통은 나쁜 무당들이 파고들기 좋은 틈이었다.
이런 무속 범죄에 대해, 법원은 10건 중 1건꼴로 무죄 판단을 내렸다. 취재팀이 분석한 무속 범죄의 1심 무죄율은 9.8%에 달했다. 법원은 무속 행위를 결과로 판단하기보다는,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위로 봤다. 재판부가 인정하는 종교 행위의 범위가 모호해 유무죄 판단이 엇갈리기도 했다.
한국 무속의 현주소를 짚다
3회 ‘기도터 가는 이유’에서는 6박 7일간 전국 기도터를 돌아다니며 만난 무속 관계자 31명을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취재팀은 평범한 무당들을 만나 무당이란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서울 인왕산, 강원 대관령, 충남 계룡산 등에 올랐고, 그중 계룡산에서는 2박 3일간 무당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24년간 한국 무속을 연구한 이스라엘 국적의 리오라 사파티 텔아비브대 교수와 만나 한국에서 무속이 성행하는 이유를 분석하기도 했다. 사파티 교수는 ‘현대 한국 샤머니즘’이란 책을 저술한 이력이 있지만, 국내 언론에 제대로 소개된 적 없는 인물이었다.
4회 ‘산업화된 점집’에서는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지역별 점집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크롤링 기법으로 네이버 지도에 등록된 점술 관련 업체 1만 5854곳의 주소를 추출한 뒤, ‘X-ray Map’ 분석 프로그램을 이용해 점집 주소를 지도상에 점으로 찍었다. 분석 결과, 서울에서는 논현역, 역촌역, 신당역, 미아사거리역, 홍대입구역 순으로 점집이 많았다. 광역시·도 기준으로는 경기도, 서울, 부산, 대구 순이었다.
MZ세대에서 성행하고 있는 온라인 점술도 들여다봤다. ‘점신’, ‘포스텔러’ 등 운세를 테마로 한 애플리케이션 유료 이용자의 절반 이상이 20·30대 여성이었다. 유튜브나 틱톡 등 동영상 플랫폼은 무당들의 주요 광고 수단이 됐다. 라이브 방송 등을 통해 무료 점사를 봐주며 관심을 끈 뒤, 유료 고객을 유치하는 식이다.
무속업이 산업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무속 관련 정부 통계도, 최소한의 실태조사 결과도 없었다. 무속을 어떻게 규정할지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었다. 무속인 상당수가 국세청에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아 국내 무속인 규모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데다, 사업자 미등록에 따른 세금 탈루 문제도 심각했다.
한국 무속이 나아가야 할 길
마지막 5회 ‘시대와 공존하려면’에서는 한국 무속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만신(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 3명을 만나 바람직한 무당의 길을 물었다. 또 무당 12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한국 무속의 현실과 바람을 조명했다. 무당 대다수는 무속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속신앙이 양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무속 범죄 방지 대책으로는 무교인 자격 인증제 도입, 범죄 행위 강력 처벌 등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일보>의 ‘방치된 믿음:무속 대해부’는 제410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통신 부문에 출품됐으나, 수상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다만 보도 이후, 국세청 관계자는 <한국일보>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무속인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세무조사 가능성을 전달했다. 취재팀이 지적한 정부의 무속업 방치 문제를 정부가 인정한 셈이다.
보도를 이끈 이성원 <한국일보> 기자는 한국기자협회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적설명서에서 “한국사회에 실재하는 무속의 모습을 학술논문 수준으로 기록한 최초의 심층보도라 자부한다. 보도 내용 대부분이 현장 취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사건이거나, 판결문 분석, 설문조사 등으로 자체적으로 만든 데이터”라고 자평했다.
*기사 원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에는 좋은 기사들이 있다. 저널리즘의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기사다. 언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도 여전히 언론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런 기사를 꿈꾸고, 독자는 그런 기사를 기다린다. <단비뉴스>는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주요 기자상 수상작을 중심으로 기자와 독자에게 두루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사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