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하야

▲ 민수아 기자

2012년 겨울, 난생처음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당시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있던 터라 ‘재외국민 투표’라는 방식으로 내 권리를 챙겼다. 인터넷으로 투표 방법을 미리 찾고, 기숙사에서 시간이 꽤 걸리는 거리에 있던 대사관까지 가 한 표를 던졌다. 모든 과정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다는 사실에 설렜고 투표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다. 인터넷 여론을 주로 지켜본 나는 별생각 없이 ‘내일이면 결정 나겠구나’ 하며 마음 편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눈앞에 마주한 나는 ‘첫 대선 투표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아쉬웠다.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며 ‘혁명’의 스토리텔링으로 대선 이후의 허무함을 달랜 기억이 난다.

11월 광화문 시위현장.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냈다. 하야. 국민 정서상으로는 사실상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다. 내가 지지하지 않은 대통령이지만 하야가 최선의 답일지 염려스럽기도 하다. 남은 임기를 반납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가장 우려되는 대목은 대통령이 지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혼란이 수습되고 형사처벌을 제대로 받지 않는 상황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기득권의 비리는 우리 근현대사 곳곳에 스며 지금의 부조리한 대한민국을 낳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 상투적인 명제의 굴레 속에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할까? 기대가 없는 염세주의자의 지나친 노파심이길 간절히 바란다.

1972년 ‘완벽한 투표 방식은 없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 최다득표제 하에서는 대중의 선호가 위배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콩도르세의 역설’. 둘 다 현행 선거제도가 금과옥조로 삼는 다수결 원칙의 허점을 짚는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도 국민의 지지를 더 얻고도 대의원 확보에서 진 힐러리가 낙선하지 않았는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역시 좋은 사례다. 물론 현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의 무능과 환관들의 비위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옳다. 현행 선거제도가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 Flickr

51.6%의 득표율을 자랑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지지율이 5%까지 곤두박질쳤다. 신뢰를 잃은 대통령의 종착역이 다가온다. 당선부터 세월호 참사에서 최순실 국정농단까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지난 4년을 돌아보면 섣불리 그 마지막을 예상하기도 쉽지 않다.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 책임을 회피하며 버티기에 급급한 대통령과 여당. 강력한 리더십으로 국민을 이끌지 못하는 야당. 난마처럼 얽혀 출구를 찾기 어렵다. 그나마 시민 대다수가 이번 일로 지도자 선출의 중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난제가 파국 직전 극적으로 해결되던 고대 그리스 연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기대해본다. 그 답은 국민명령에 따르는 일이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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