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비선

▲ 곽호룡 기자

카메라가 혼자 길을 걷는 아이를 따라간다. 아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더니 묻는다. "아저씨, 여기서 어떻게 가요?" 그렇다. 카메라는 아저씨이고 아이는 혼자가 아니다. 수많은 스태프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들이 없는 척 연기하는 어른 연기자와 다르다. 그 아이는 방송을 의식하기엔 아직 어리다. 그런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은 욕구가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프로그램 열풍을 낳았다.

어린아이는 순수한 만큼 잔혹한 일면도 지닌다. 개미떼를 꾹꾹 눌러 죽이거나 개구리를 잡아서 집어 던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섬뜩하다. 공포영화에서 '악마에 빙의된 아이' 모티프는 단골 소재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꿰뚫는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에게 학사경고를 줬다가 학부모의 항의로 지도 권한을 박탈당한 교수. 승마협회를 조사하다가 쫓겨난 문체부 공무원들. 이들이 본 최순실의 얼굴은 예능 속 아이일까, 영화 속 악마의 모습일까.

▲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 박근혜 대통령의 변명은 순수함이 주는 이미지에 기대 사태의 본질에서 도망치려는 게 아닐까. ⓒ flickr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독점한 유일한 공동체다." 막스 베버는 근대국가를 정의한다. 정치가들은 국민에게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위임받은 직업이다. 폭력은 다른 사람을 '정당하게'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 있는 무거운 권리다.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으로 수많은 신하를 살해한 연산군을 보자. 심정적으로 이해가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심연과 닮아간다"는 니체의 말처럼 폭력과 가까운 사람은 폭력과 닮아간다. 법과 윤리를 져버린 연산군은 역사 속에 악마로 남는다. 이렇듯 정치가는 의도 여부에 관계없이 불법과 폭력의 결과에 무한 책임을 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비선실세 최순실의 존재와 일탈에 대해 2번이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국민 앞에 머리 숙였다. 하지만, 지지율 5%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낙인 찍힌 것도 모자라 퇴진 촛불 시위는 갈수록 거세진다. 왜 그럴까? 박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의 핵심은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하다 벌어진 개인의 일탈"이다. 순수함이 주는 이미지에 기대 온갖 불법과 부정축재라는 게이트의 본질에서 슬그머니 도망친다. 수사에 응할 용의도 있다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불법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뼈저린 고해성사가 없다. 통치 능력과 정당성이 훼손된 만큼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국정에서 손을 떼라는 국민적 요구에는 특유의 불통 모르쇠다.

'어린왕자'가 지구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어른은 '등대지기'다. 등대지기는 쉴 틈 없이 등대를 켜고 끈다. 어떤 명령이나 감시 없이도 일에만 매달린다. 직분에 충실한 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린왕자는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유일한 어른이었다고 들려준다. 정치가가 순수함을 언급하려면 등대지기처럼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순수함’이어야 하지 않을까. 직분을 망각하고 비선실세에 불법으로 넘겨준, 아니 직분수행 능력이 없던 박 대통령은 순수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김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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